문제제기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정의란 무엇인가?’ 연전에 하버드대 마이클 센델 교수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이고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150만 권이나 팔린 인문학 저술, 그것도 번역서로서 장안의 지가를 올린 보기 드문 저서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정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부정의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실 정의가 무엇이고 부정의가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만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살고자 하는 실행(実行)의 의지가 부족한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정의(社會正義)가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하고자 할 때 필자는 자주 인생여정을 100m 경주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한다. 인생이라는 100m 경주를 우리 모두가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스타트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점에서 출발하지만 상당한 사람이 50m 전방에서 시작하고, 또 일부의 사람은 80m 전방에서 시작하며 더욱 이 극히 소수의 사람이긴 하나 95m 전방에서 스타트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인생이라는 경주는 원초적으로 불평등한(original inequality)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인 동시에 지극히 우연적이고 운명적인 것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떠도는 말로서 인구에 회자하는 풍자어 중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론이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금, 은, 동 수저 혹은 흙수저를 입에 물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함축이 들어있다고 생각된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인생이 이같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운명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는 운명론적인 발상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운명을 바꾸거나 개선할 현실적인 제도나 정책이 없거나 있어도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다소 냉소적이고 비관론적인 전망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운명은 그야말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운명을 시정하거나 조정해 줄 현실적 제도나 정책이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비관적 전망이 사회적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게 보다 심각한 문제라 생각된다.

불평등한 운명은 모든 인간 사회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불가피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사정을 변화시키고 변혁시킬 방책이 부실하여 그야말로 복불복(福不福)의 사회, 운명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회관이나 인생관이 널리 퍼지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가능성을 열어줄 기회의 통로, 그것은 바로 교육

한때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나라(land of opportunity)’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부모나 타고난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각자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땅이라 생각되었다.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사실상 많은 이민자들이 이같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것 또한 사실이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도 이같은 기적 같은 꿈을 이루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개천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 태어났어도 고귀한 용으로 등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기회의 통로, 그것은 바로 교육이라 생각된다.

특히 그러한 통로로서의 교육은 어떤 부모나 사회적 지위를 타고나든 모든 이에게 공정하게 주어지는 교육의 기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공교육의 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의 교육은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공교육 현장인 학교는 무너지고 있고 사교육 시장인 학원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간 우리나라 사교육비는 20조 원에서 30조 원을 오가는 수준으로서 사교육 시장의 일원에서는 신흥 재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불행하게도 세계의 거대 자본들이 한국 사교육 시장에 투자를 탐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교육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조선 시대에는 백성들 중 노비에 속하는 사람이 적게는 50%, 많게는 70%였다는 통계가 있다. 노비는 계층이동(stratus mobility)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천민들이었다.

설사 노비가 아닌 일반 백성들에 있어서도 중인 계층에 속하거나 서얼 계통의 사람은 입신(立身)에 장애가 있었던 사회가 조선이었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있을 수 없는 기상천외의 기적 같은 경우를 묘사하기 위해서 생겨난 말이라 생각된다.

개천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는 용과 같은 영물이 날 수 없는 곳이니 이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둥근 사각형’과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조선 사회와 비슷할 정도로 계층이동이 어렵다고 하면 망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사회도 곳곳에 이같이 계층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어 여전히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희귀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최대의 기회요, 등용문은 교육이거늘 교육계가 이같이 파행으로 치닫고 있으니 우리의 차세대 아이들의 어두운 미래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가끔 농처럼 주고받는 말이 팔자를 바꾸려면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배우자를 잘 만나 결혼을 잘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길이다. 교육은 우리의 팔자를 바꿀 수 있는 두 번째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길이 중요한 까닭은 첫 번째가 우리의 노력보다는 운명적으로 결정되기 쉬운 길이라면 그래도 두 번째 길은 우리의 노력에 따라 성취할 가능성이 보다 큰 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번째 길은 다시 첫 번째 길을 결정하기도 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좋은 직장은 또한 좋은 결혼을 할 수 있는 유리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비 효율화와 역기능을 조장하는 사교육의 제도적 혁신이 이루어져야 앞서 지적한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입에 물고 나온다는 수저론, 이같은 원천적 불평등을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처리 혹은 관리하고 있는가?

원천적 불평등 그 자체는 단지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연적 사실(natural fact)일 뿐 그를 두고 정의 여부를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와 부정의를 평가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적 사실을 우리가 인간적으로 시정하고 조정하며 관리하는 방식 을 두고 평가할 때 문제가 된다.

원천적 불평등을 시정하고 조정, 관리하는 체제나 시스템을 두고 우리는 정의로운 체제, 제도, 시스템이라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이같은 원초적 불평등이나 격차를 다소간 약화 내지 완화 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나 교육의 기회 혹은 교육 복지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성과 또한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가슴 아픈 사실은 이같은 불평등이 세세 대대로 대물림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자녀의 학업성취, 입학, 취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상속되어 가난이 대물림하고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고착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1970~2003년 사이에 입학한 서울대 사회대생 1만여 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자료를 보면 전문직, 관리직으로 이루어진 고소득 직군 자녀들의 입학율이 저소득 직군의 자녀보다 무려 16배 (2003)나 높았다.

2004~2010 서울대 신입생의 아버지 직업 변천을 보면 전문직, 경영 관리직의 아버지를 둔 신입생이 2004년에는 전체 신입생의 60%를 차지했는데 2010년에는 64.8%로 늘어난 반면 농축수산업, 미숙련 노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둔 신입생 비율은 2004년에 3.3%에서 2010년 1.6%로 더욱 줄어들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 달에 사교육비로 평균 50만 원을 지출하는 고등학생이 내신 성적 3등급 이상에 속할 확률은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경우보다 2배 이상 높다(김민성 논문, 〈고등학교 내신 성적에 대한 사교육비 지출의 효과〉) 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아이들의 꿈인 장래 희망도 큰 차이가 있었다.

부모의 소득이 높고 특목고에 다니는 학생일수록 고소득 전문직을 희망하는 한편 부모의 소득이 낮은 특성화고(옛 전문계고) 학생일수록 저소득 직업군을 희망했다. 가난이 젊은이들의 꿈마저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권영길 전 민노당 의원 조사자료 참조)

취업을 비롯해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겪어야 할 학벌, 지연 등에 따른 심각한 차별을 생각하면 부모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 자녀 세대로 세습되고 이로 인해 신분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세습적 불평등 구조를 깨는 것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세습과 공정사회〉 정연주 칼럼, 한겨레 신문 오피니온 섹션 2010. 11. 1. 참조)

물론 모든 사교육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 필자의 진의는 아니다. 다양한 재능과 자기개발을 위한 사교육, 나이에 상관없이 꾸준한 배움을 통해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향유하 는 평생교육은 쌍수를 들어 권장할 만 한 일이다.

단지, 우리 사회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는 사교육, 지나친 선행학습으로 공교육의 비 효율화와 역기능을 조장하는 사교육은 하루빨리 청산할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