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해마다 몸살을 앓는 대학입시가 다가오고 있다. 이미 수시전형은 시작됐고 수능도 며칠이 채 남지 않았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도 입학 정원을 줄여가고 있지만, 입시를 위한 열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는 교육적 관점에서의 평가보다 능력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선발과 배치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뿐 아니라 대학과 관련기관들은 입시와 관련해서 매우 긴장되고 첨예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입시의 결과가 장래의 사회적 성공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시에 온 힘을 다해서 매달리는 것이 이상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입시와 관련해서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일들이 간혹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서 학생생활기록부를 조작하도록 지시하는 학교장과 그에 따르는 교사들, 돈을 내고 조작된 자기소개서를 구매하는 학부모 등 비교육적인 일들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다.

일부에 국한된 일이겠지만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낙심이 된다. 학교는 학교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대학 입시에 성공하려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학부모는 자녀가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사회적으로 실패자가 될까 봐 두렵다. 부모가 이룬 만큼의 생활 수준을 자녀들이 유지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반대로 부모의 생활 수준 이상을 성취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는 입시 결과가 좋지 않게 되면 학교의 평판이 떨어질까 봐 두렵고, 그래서 이듬해 지원율이 낮아질까 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성적 우수자 학생들의 성적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특별관리한다. 두려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가장 최악의 상태를 현재 내 삶으로 끌어들여 지금 이 시간에 미리 체험하도록 만드는 어두운 마음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상식적인 판단조차 제대로 내릴 수 없게 된다. 두려움은 사물이나 사람을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야만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방적 행동은 이를테면 예방주사나 안전교육 등과 같이 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강제를 해서라도 취하지 않을 경우에 사람에게 심각한 위해가 나타날 수 있는 공공적 행동이 예방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르다. 결과를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대신 져 주지 못한다. 두려움에 의한 행동은 그 목적, 과정, 결과가 비도덕적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을 기르고 자녀를 양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의 동기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을 이기는 건 믿음 

우리는 두려움의 반대 정신으로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처음부터 교육의 정신이었다. 믿음을 종교적 대상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고 국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고 뿌리가 내리고 가지를 뻗어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씨를 뿌린다.

교사들은 우리 아이들의 장래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말썽꾸러기 아이들과 보람된 씨름을 할 수 있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아이돌 그룹에만 빠져 있는 사춘기 자녀들도 언젠가 자신의 길을 찾아서 행복한 배움의 길을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에 부모들은 그 시기를 견디는 법이다.

어느 고3 미술반을 맡고 있는 교사로부터 자신이 맡고 있는 반의 학생들에게 즐겁게 그림 그리게 하고 행복하게 공부하자고 이야기하며 1년을 보냈더니 그 반의 합격률이 다른 반보다 훨씬 높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교사의 믿음대로 된 것이다. 부모들이 두려움을 갖는 제일 큰 이유는 부모 세대가 겪은 시행착오를 자녀 세대가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살던 세계와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자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부모의 경험이 정답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자녀 스스로의 인생 탐험을 믿고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수학 75점을 받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에게 “너 이 성적으로는 대학을 못 간다”고 단정하여 말하는 교사가 있다면 이 교사는 그 순간 아이의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비겁하게 두려움을 선택한 것이다.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얼마 전 보았던 뮤지컬이 생각난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 주인공이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아내가 홀로 남겨질 것을 두려워해 자신이 시한부임을 숨긴 채 아내에게 홀로서기를 강요하며 혹독하게 행동한다.

그러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느끼고, 아내가 살아갈 이 세상에도 벗과 이웃이 있고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인생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홀로 두고 가는 게 아니야
하늘과 이 거리에 맡기는 거야
믿어 볼래. 용기 내서 너를 맡겨 볼래.
나 대신에 수많은 손길들을 남겨 놓을게.

깊어가는 가을, 입시의 계절을 지나며 이 노랫말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웠으면 좋겠다. 그 믿음은 단순히 아이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붙잡고 있는 더 큰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이 믿음에 힘입어 올해의 입시도 명예롭고 품격있게, 더 교육적으로 치러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