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철 박사

요즈음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교사들의 일상은 더없이 복잡하고 힘들어지고 있다. 그 많은 일들이 모두 교육적인 것은 아니며, 교육적인 활동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도 모두 동등하게 교육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교사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무엇이며, 그러한 일들이 과연 ‘교육적’인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육적이라고 하는 활동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활동은 무엇인가를 논의해 볼 필요도 있다.

이런 논의는 모두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포섭된다. 즉, 학교가 현재 수행 하고 있는 수많은 기능과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본질적인, 그리하여 다른 모든 기능과 역할은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학교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가장 원초적 기능은 무엇이냐는 문제로 포섭되는 것이다.

학교의 ‘본연적’ 기능에 대한 논의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만약 학교의 본연적 기능이 밝혀진다면 무엇보다 우선 학교 교육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방향을 확고하게 설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학교가 잡다한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에 대한 혼돈 없이 흔들림 없는 교육의 활동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와 동시에 학교가 수행해야 하는 잡다한 비본질적인 업무들 가운데서 어떠한 업무들을 어떠한 순서로 제거 또는 경감시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지침도 얻을 수도 있다.

만약 학교의 본연적 기능이 무엇인지가 밝혀진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학교 교육을 가장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원리이자 방법이 되기도 한다. 학교의 본연적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들을 ‘교육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여 학교가 수행하는 모든 기능들을 교육적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활 동 중 ‘교육’과는 무관한 활동들은 얼마든지 있다.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는 활동은 교육적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활동이며, 교사들을 특정 보직에 배치하는 활동은 행정적 활동이다. 학교운영위원회나 교무회의에서 주요 안건을 심의, 결정하는 활동은 정치적 활동에 유사하고, 수업 전후 학생들을 돌보는 활동은 보육활동이지 교육활동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보다 엄격하게는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기 위하여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를 처리하는 일 또한 교육활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교사들이 흔히 말하는 ‘잡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적 활동이나 기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활동 중 어떤 활동이 ‘교육적인 활동’인 것이냐를 엄밀하게 규 정하기 위해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활동이 교육적인 활동이냐를 논하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활동 이나 기능들은 어떤 것인가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라이머 (Reimer, 1971)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학교란 교육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육이 학교에서 표방하고 있는 이념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본격적인 비판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 ‘교육’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사람마다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가 다르면 거기서 하는 일도 다르겠지만, 오늘날의 모든 나라에서 학교들은 그 종류와 수준에 관계없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분해할 수 있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 학생을 보호하는 기능(custodial case), 둘째 사회적 역할의 선별기능(social-role selection), 셋째 이론이나 원리 혹은 사상을 주입하는 기능(indoctrination), 넷째 지식과 기술을 개발시킨다고 하는 통상적인 의미의 교육기능(education)이다.”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라이머는 학교는 학생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장래 학생들이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일, 즉 사회적 선발의 기능을담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나 사상을 주입시켜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들로 형성해 가는 사회화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학교는 학생들의 성장과 발달을 도모하는 교육 기능을 맡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우리의 일상적 통념과는 달리 학교의 사회적 선발 기능이나 사회화의 기능 모두 교육의 기능과는 다른 기능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매기어 상급학교 진학을 돕는 활동은 교육활동이 아니며, 한 사회의 주요 가치나 사상을 주입하여 사회가 원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는 활동 역시 교육활동이 아니라는 주장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나 학교가 수행하는 기능이 어떤 것들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만 그러한 기능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본연적인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마이클 영(Michael F. D. Young)의 입장

그러나 라이머와 달리 영은 너무나 간명하게 학교의 본연적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식사회에서의 교육의 미래: 교과중심 교육과정의 급진적 예(The future of education in a knowldege society: The radical case for a subjectbased curriculum, 2010)>라는 논문에서 영은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한다.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학생들의 ‘지적 발달’을 도모하는 일이며, 지적 발달을 가장 확실하게 도모하는 방법은 강력한 지식(powerful knowledge)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적 지식(theoretical knowledge)’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지식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교과(subjects)’라고 본다. 그리하여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강력하고 힘 있는 지식인 이론적 지식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는 교과를 가르쳐 학생들의 지적 발달을 최대로 도모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러한 영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의 학교 교육이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너무나 치우쳐 있어 그러한 폐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교육개혁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40~50년간의 치열한 학문적 노고의 결과 생존해 있는 전 세계의 교육사회 학자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노학자의 ‘최후 진술적 주장’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비판하지는 말도록 하자.

사실 2007년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이 지향했던 교육의 기본 방향이 2013년 개정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완전한 전복의 이론적 배경이 바로 마이클 영의 이론이 아니었던가? 마이클 영의 이론은 우선 지식에 대한 이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기본적으로 지식(knowledge)과 경험(experience)을 구분한다. 그리고 지식을 다시 ‘일상생활적 지식(Everyday life knowledge)’과 ‘전문가적 지식(Specialist knowledge)’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일상생활적 지식이란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맥락에 한정되어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에만 적용되는 맥락 의존적이며(context-dependent), 실제적이고(practical), 방법 절차적 (procedural)인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사물의 관계는 설명할 수 없으며, 일반적이며 보편적 명제도 산출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전문가적 지식(전문가의 지식, 혹은 학자의 지식)은 특정 상황이나 맥락에 한정되지 않는 맥락 독립적이며(context-independent), 이론적인 (theoretical) 지식이다.

따라서 이 지식은 여러 영역의 사태에 두루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보편적인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식은 모든 건전한 판단의 기초로서 기능하며 과학적 지식의 근거가 되고, 새로운 지식 창출의 기초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전문가가 보유하고 있는 이론적 지식은 모든 의미있는 새로운 지식 창출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지식이 바로 ‘강력한 지식’, ‘힘있는 지식’이 된다. 마이클 영에 의하면 이런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은 학교에서의 교수와 학습 과정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획득된다.

이에 반해 일상생활적 지식은 일상의 생활 경험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얻어진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경험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획득되는 지식이다. 

지식에 대한 이와 같은 이론에 의거하여 영은 학교의 본연의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한다. 그의 생각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즉, 학교는 학생들이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지식이나 경험은 구태여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학교는 가정이나 사회 등 학교 이외의 여타 생활 세계의 경험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야 하며, 그러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본연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학교에 서의 교육을 통하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은 바로 특정 대상이나 영역에 대한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학생들에게 전문가들이 생산해 낸 이론적 지식을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물론 학자의 이론적 지식이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본연적 임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의 이론적 지식을 가르쳐야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지식만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 내며 삶의 복잡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 오류가 없는 한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이러한 의미의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격파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그러나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학교의 본연적 기능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일상생활적 지식이 학교 교육에서 무용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일상의 생활 경험을 통하여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상적 지식도 교육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지식은 학교 교육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은 학교 교육의 내용이며 목표가 된다. 교사는 이러한 지식을 잘 가르쳐야 하며 학생들은 이러한 지식을 잘 배워야 한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이 학교 교육의 본연적인 임무인 것이다.

학교 교육의 내용과 목표가 되는 이러한 지식들은 특정 영역의 학문 공동체에 속하는 전문가들이 집요한 탐구를 통하여 생산해 낸 지적 결과물들로서 가장 믿을만한 지식의 원천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들을 학교 교육이라는 상황에 맞도록 체계적으로 재조직한 것을 마이클 영은 교과(subjects)라고 부르며, 이러한 교과들이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체계를 교육 과정(curriculum)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학교 교육과정이란 교과들의 집합체이며, 교과는 이론적 지식들의 조직체인 것이다. 이러한 교과는 학생들의 일상 경험을 초월한 요소로서 학생들이 일상의 사태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고 학교 교육에서의 수업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그리하여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적으로 주어진’ 배움의 대상이 된다.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이 교과와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내용임에 비해 학생들의 일상적 지식은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기 위한 수업의 과정에서 교사가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방법의 원천이 된다.

학자의 이론적 지식이 학생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두 번의 변용이 필요하게 된다. 1차 변용은 학자의 지식에서 교과의 지식으로의 변용이며, 2차 변용은 교과의 지식에서 학생의 지식으로의 변용이다.

2차 변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교사의 수업 활동이다. 2차 변용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교과의 이론적 지식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학생의 일상생활적 지식과 연결되어야 하며, 그 후 학생 내부에서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학생 수준의 이론적 지식으로 변질되어야 한다.

이 변용의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교과와 학생 경험의 만남과 연결이다. 학생의 경험과 연결되지 않는 교과는 학생의 인지 세계에 접근조차 거부된다. 설사 어쩌다 접근, 접수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생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난수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과를 전달하고자 할 때, 즉 이론적 지식의 세계로 학생들을 안내하고자 할 때 학생의 경험과 일상적 지식은 가장 중요한 일차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경험과 연결되어 이해함직한 지식에 접할 때 학생들은 ‘동기화’되고, 새로운 지식을 더욱 추구하게 되는 ‘적극적 학습자’가 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학생의 일상적 경험과 그에 의거한 일상 생활적 지식은 수업의 과정에서 교사가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핵심적 요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과 학생들의 일상적 지식의 성격과 역할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마이클 영은 교육과정(curriculum)과 수업(pedagogy)이 어떻게 다르며,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사람과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역할이 어떻게 다른가를 명료하게 구분한다.

교육과정이란 학생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서 국가에서 합의한 교육 내용이다. 교육과정은 교과들의 체계적 집합체이며, 각각의 교과는 해당 영역 학자들의 이론적 지식을 학교 교육 상황에 적합하게 만든 재구성물이다. 결과적으로 교과는 학자들의 학문의 세계와 학생들의 생활경험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물이 된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교과를 통하여 학자들의 이론적 지식과 세계에 접하고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 학자들의 지식을 학교 교육 상황에서 교육 가능한 지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교육과정 설계 작업이다.

학자들이 생산한 수많은 이론적 지식 중에서 어떤 지식들을 교육의 내용으로 선정하고, 그러한 내용들을 어떻게 조직하여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작업이 교육과정 설계의 핵심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교육과정 설계자의 몫이다. 교사의 몫이 아닌 것이다.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일이 오로지 교육과정 설계자들의 몫인 것처럼 교육과정을 학생들의 경험에 연결시키는 수업의 전개 활동은 오로지 교사의 몫이다. 수업이란 학생들을 동기화시켜서 학생들이 교육과정과 의미있게 관련을 맺게 하는 교사의 활동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의 일상적 생활 경험 지식수준에서 출발하여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사가 이끌어가는 교수-학습의 전 과정이다.

이 수업의 과정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선행 지식의 내용과 수준 등을 최대로 고려하고 활용하여 학생들이 전문가의 이론적 지식을 자신의 지식으로 변화시켜 가도록 노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이론적 지식을 수업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학생들이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은 전적으로 교사의 몫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떠한 교과나 교육과정도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 최고의 교육과정도 수업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무위로 끝나고 만다.

수업이란 교육과정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의 기능과 역할은 교육과정 설계자의 권능을 추월하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교사가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는 없다.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교사가 교육과정 설계도 하고, 동시에 수업 활동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을 설계한다는 일과 수업을 진행한다는 일은 개념상 명료히 구별되며, 구별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영은 주장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는 불가분의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학교의 본연적 기능은 과연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인가?

학교 교육의 근원적(본래적/일차적)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 발달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을 가르쳐야 하며, 지식 중에서도 이론적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학교 교육의 본연적 기능은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마이클 영의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여야 할까?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영의 주장은 2013년에 개정되고 2014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영국의 새로운 국가 교육과정 기본 성격의 근간이 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학교는 현대의 복잡한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폭넓고 균형감 있게 수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영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학교가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역할과 기능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 한 가지만 택하라고 요구받는 상황에서라면 그의 주장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학생의 경험이 아니라 전문적 학자의 지식(이론적 지식), 그리고 그러한 지식으로 구성된 교과를 교육의 중핵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확실히 ‘교과중심주의’ 교육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학문중심주의’이기도 하다. 영은 자신의 관점이 기존의 교과중심 교육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전통적인 교과중심 교육이 학생들의 순응적 반응에 기반을 둔 교육임에 반해 자신의 교과중심교육은 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론적 지식의 참된 획득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오직 학습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의 일차적인 임무는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영의 주장을 보다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지식’의 성격과 효능에 대한 검토와 함께 지식 전반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과 논의가 필요하다.

몇 개의 논문 들을 통하여 영은 이론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이론적 지식이야말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적으로 생산해 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초적 자산이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이론적 지식이야말로 일상의 특수하며 세부적인 생활 맥락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의 인식을 보다 넓은 이해의 세계로 안내함으로써 삶의 질을 고양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데에, 그리고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는 데에 이론적 지식이 필수적이라면 이러한 지식을 갖추게 하는 일은 오늘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로서 손색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전인교육을 강조하고 인성과 인격의 교육을 강조하는 오늘의 우리 교육의 현실에서 지식교육을 강조하는 영의 주장은 어느 정도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 교육이 과연 전인의 교육과 인성의 교육을 강조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

우리의 교육은 전인교육도, 인성과 인격의 교육도 전혀 강조하지 않는 교육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직관적으로 안다. 말로만, 구호로만, 이벤트성 슬로 건으로만 우리 교육은 전인교육이요, 인성교육이다.

그 요란한 구호 뒤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교육은 거의 대부분 지식 교육이다. 그나마 지식 교육이란 것도 제대로 된 지식 교육이 아니다.

하나의 개념 체계로서의, 이론으로서의 고급 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지식 교육이 아니라 조각난 정보로서의 단편적 지식들을 암기하는 수준의 지식 교육에 불과하다.

이러한 의미의 지식 교육은 진정한 의미의 지식 교육이 아닌, ‘정보 암기 교육’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 교육이 아니라 영이 말하는 제대로 된 의미의 지식 교육, 그것은 그러면 학교 교육의 본연적 과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영의 주장 이 학교에서는 오직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비록 바르고, 강력하며, 힘 있는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의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학교가 수행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와 과제 중에서 그러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어서 어느 과제보다도 우선적으로 지식을 잘 가르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고 싶다.

그의 주장대로 이론적 지식은 의미 있는 창조의 모체가 된다. 깊이 있는 이론적 지식의 축적 없이 의미 있는 창조는 불가능하다. 최근 유행의 대세를 이루는 ‘융합’이라는 것도 특정 영역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축적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이론적 지식이야말로 인식의 넓은 지평을 허용한다. 인식의 넓은 지평들끼리 만나고 부딪치는 가운데 융합이니 복합이니 하는 현상들이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시기보다도 고도의 창의력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고급 수준 창의력의 핵심 원료인 이론적 지식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경험’이 아니라 ‘지식’을, ‘학생’이 아니라 ‘교과’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은 너무나 보수적이지 않은가?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한 영의 답변은 우리의 상식적 견해를 뒤집어 놓는다. 지식과 교과를 강조하는 것은 ‘보수적’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radical)’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지식과 교과를 강조하는 입장은 보수적이었고 경험과 학생을 강조하는 입장이 진보적이며 급진적이었다. 그러나 영의 발상은 이를 뒤집는다. 경험은 학생을 일상에 가두어 놓는다. 일상의 경험 안에만 머무르는 한 학생은 자신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일상 경험 세계를 세계의 전부로 착각하게 된다. 한 뼘 하늘을 전체 하늘이라 생각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식은 눈을 뜨게 한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구체에서 일반으로, 자신의 안에서 자신의 밖으로 눈을 돌려 넓은 지평을 보게 한다.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여 자기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생각과 세상에 접하게 한다. 이러한 지식과 만난 학생은 지금의 자기와는 또 다른 자기를 형성하게 되면서 급격한 자기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어찌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의 바른 이름은 ‘급진적’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범했던 대학 신입생들이 어떻게 운동권 학생들로 급격히 변화하는가? 평범했던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열혈 당원이 되며 열성 신자들이 되어 옛날의 자기와 결별하게 되는가?

이러한 급진적 변화의 공통적 기반은 이들 모두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지식(새로운 사상과 이론)에 접하게 되고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식은 사람을 급격하게 변하게 만든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교육은 보수적이 아니라 급진적이다.

이러한 지식 교육을 항간에서는 사상교육, 정치교육, 이데올로기 교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본질은 모두 지식교육인 것이다.

지식은, 교과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 교육 본연의 과제는 올바른 지식교육이라는 영의 주장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