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 영남대학교 교수

Ⅰ. 공부에 대한 이원론적 신화

오늘날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거나 학생들과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일종의 신화 즉 공부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신화의 중심에는 공부와 시험공부를 동일시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공부와 시험을 동일시할 때 사람들의 공부에 대한 생각은 시험에 대한 생각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이나 학교 밖의 자격고사에서 보는 대부분의 시험에서 채택하는 방법은 객관식 고사이다.

객관식 고사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배울 때에 교사와 학생 모두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화는 서로 긴밀하게 관련된 두 가지 사항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문제에는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는 별개로 독립된 것 즉 ‘개별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객관식 고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생각은 교육의 과정에서는 정답암기식 교육과 정답암기식 공부방법으로 나타난다. 정답암기식 교육이나 공부방법에 의하면 교과를 구성하고 있는 지식은 진리이거나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서 타당하며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공부는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공부는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에 자기 스스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에 비추어 문제에 대한 타당한 답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있는 답을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따라서 공부는 각각의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암기하는 것이 된다. 시험에 나오는 질문들은 서로 분리되고 독립된 것으로 제시되는 만큼 질문의 답에 해당되는 지식 역시 개별적 사실들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부의 결과 공부는 시험을 위한 것일 뿐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요약하면 공부와 시험을 동일시할 때 ‘개별적인 객관적(또는 절대적) 지식’이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개별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적 관행은 교육 당사자들에게 이러한 지식관과 이에 입각한 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적 관행을 영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에 의한 교육과 공부가 관행으로 굳어진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공부의 관행을 오랫동안 유지하게 된 데에는 보다 근본적으로 지식이나 앎과 관련된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믿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신화를 낳게 한 중요한 원인은 철학이나 사상적으로 볼때 인간과 자연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는 이원론에 있었다.

일단 인간과 자연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본질로서 자연에 참된 지식이 있다는 이성중심주의적이며 본질 위주의 전통철학 사상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생각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자연에 참된 지식이 있으며, 개인의 삶의 경험과는 무관한 학문과 교과를 배움의 절대적 대상으로 보는 세계관과 이에 기초한 교육적 전통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중시하는 이원론적 철학이나 사상도 그러한 철학이나 사상을 지지해 주는 기본적인 경험적 사실이 있을 때 그리고 일반 대중들이 적어도 경험적 사실에 동의할 때에 성립되며, 경험적 사실에 동의하는 한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화를 낳게 한 이면에는 이원론 철학을 타당한 것으로 보게 만든 경험적 사실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부에 대한 이러한 신화가 허구 임을 보여주고 공부에 대해 새롭게 탐구하는 방법은 이원론과는 다른 ‘경험적 사실’에 대해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Ⅱ. 교변작용에 대한 탐구로서 공부

이원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 경험적 사실을 형성한 중요한 원인은 아마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작용 때문일 것이다. 시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작용 중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그런 점에서 시각은 인간이 대면하는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각을 기준으로 보면 시각 밖에 있는 것은 세계 또는 자연으로, 시각 내부에 있는 것은 인간 또는 정신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시각에 주어지는 외부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사물과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반하여 인간은 물질의 세계는 물론 심지어 인간을 제외한 동물에게는 없다고 여겨지는 사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사고(또는 정신작용)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세계 즉 인간 밖에 있는 자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험적 사실’이다. (이 경험적 사실은 이하 글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적 사실과는 다른, 잘못 파악된 경험적 사실이다.)

일단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는 전통철학이 보여주듯이, 자연과 인간이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며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가장 근본적인 경험적 사실로, 일종의 선험적 가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시각의 안에 있는 인간(의 정신)과 시각 밖에 있는 자연이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로 전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를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하여 자연, 지식, 가치, 종교, 삶의 성격 등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소위 이원론이다.

듀이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전통철학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이원론을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독립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험론적 자연주의자이며 일원론을 주장하는 듀이는 이러한 이원론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전통철학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인간, 그리고 인간과는 완전히 독립된 자연, 곧 환경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에 의해서, 그리고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에 인간과 자연이 비로소 만나고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상호작용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상호작용은 존재의 기본적인 모습도 아니며 존재의 본질적 속성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하고 나서 나타난 ‘제삼의 것’이며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Dewey, 1938b: 33). 그런데 듀이는 이원론적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제안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듀이는 외적 자연과 인간이 통합된 것으로서 자연관을 주장한다. 듀이는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현대 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생물학적 관점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진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환경 속에 존재한다.

환경이 없는 또는 환경을 떠난 인간은 오로지 상상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 또는 모든 사물은 “환경 ‘속’에 있으며, 환경에 ‘의해서’”, 보다 정확히 말하여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Dewey, 1934: 13; Dewey, 1938a: 3장).

또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양자역학과 같은 현대 물리학 이론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다른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결과 변화된 상태로 존재한다. 사실, 현대 과학의 이론에 의하면 환경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상상할 수도 없다.

인간이나 사물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존재하며,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된 상태에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을 비롯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의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태에 놓여 있다. 만일 지구의 중력이 달과 같았다면, 우리의 얼굴이나 걸음걸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지금보다 몇 배 더 부풀어져 호빵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며, 걸음걸이도 우주인들이 달에서 걸어 다니는 것처럼 성큼성큼 뛰어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인간이 접촉할 수 있는 자연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인간에 의해 영향을 받고 한정된 것일 뿐이지, 인간 경험을 넘어서서 포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봄에 신록이 지닌 초록빛은 나뭇잎의 본질적인 색이 아니라 햇빛이 비치는 상황에서 인간의 시각 작용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것도 자연의 본질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눈이 가지고 있는 감각작용이 자연과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은 서로가 서로를 성립 가능하게 하고, 서로의 모습을 규정 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존재하는 것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작용 즉 교변작용(交變作 用) 속에 존재한다는 듀이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인간과 자연은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외적 자연 없는 인간, 또는 인간 없는 외적 자연은 생각할 수 없다.

앞 문단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이미 ‘자연화된 인간’이며, 자연은 인간이 존재하면서 적어도 인간에게는 이미 ‘인간화된 자연’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태, 즉 인간화된 자연 또는 자연화된 인간의 상태가 삶과 사고와 탐구의 궁극적 출발점이다.

Ⅲ. 상황적 교변작용의 총체성과 앎의 총체성

인간이 교변작용하는 경험으로 존재한다면, 인간이 습득하는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한 탐구 결과로 생긴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교변작용의 과정을 통하여 마음속에 앎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의 앎은 주지주의적 전통에서 말하는 앎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변작용의 과정에서 갖게 되는 앎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의 총체성 또는 교변작용의 총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미 분리되고 독립된 언어나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하겠지만 사람들은 분리되고 독립된 개개의 사물들을 경험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교변 작용이 존재의 일차적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시에 얽히고설킨 교변작용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연은 무수히 많은 물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론상으로 보면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교변작용의 조합을 생각할 수 있다. 자연에는 수없이 많은 교변작용 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전체로서 자연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은 셀 수 없이 많은 교변작용을 포괄하는 ‘하나의 거대한 교변작용’의 덩어리가 된다(Dewey, 1929: 97). 수많은 교변작용을 포괄하는 하나의 거대한 교변작용은 그 속에 포함된 교변작용의 산술적 총합 이상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교변작용을 아는 것만으로는 전체로서의 교변작용을 충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전체로서의 교변작용은 나름대로의 유기적 관련 속에서 새로운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전체를 ‘총체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총체성은 자연 전체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전체를 분할하여 그 중 어느 한 부분만을 본다 하더라도 자연 전체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자연 전체에서의 총체성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총체성이 있다.

하나의 총체성을 가지고 의미 있게 묶을 수 있는 범위가 ‘상황’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일정한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다(박철홍, 1994: 297308; 박철홍, 2016; Dewey, 1938a: 137; Dewey, 1938b: 72).

예를 들어 우리가 보는 나무의 색에 대한 경험은 인간과 나무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햇빛과 주변 사물의 배치 전부를 포함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에는 관찰자의 신체적, 지적, 심리적 요인들 전부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변작용은 어느 경우든지 일정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특정 맥락을 전제로 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듀이가 말하는 형이상학의 기본 단위는 엄밀히 말하면 규모가 작은 수많은 교변작용을 포함하는 덩어리 즉 ‘상황’이 된다.

이를 좀 더 형식을 갖추어 말하면 ‘교변작용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교변작용하는 상황으로 존재하며, 상황에서 교변작용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교변작용에서 이루어지는 탐구는 상황 속에서의 탐구이면서 동시에 상황 자체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상황을 탐구하는 인간의 앎이 총체성을 띠게 된다.

상황에 대한 탐구의 총체성을 자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질성적 사고와 이성적(지적) 사고의 관계, 나아가 다양한 사고양태의 통합적 작용과 같은 인간 사고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자세한 설명은 박철 홍(2016)을 참고할 것).

이러한 것을 자세히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며 많은 논의와 설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앎이 총체성을 지향한다는 경험적 사실을 지적하는 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앎이 총체적 지식을 지향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내면에 있는 앎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 확인된다. 교육철학자로서 연구자의 예를 들면, 연구자는 어린 시절부터 적지 않은 지식들을 습득해 왔으며 다양한 신념체계를 받아들여 왔다.

그러한 모든 것을 통합하여 지금은 연구자 특유의 교육 철학적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러한 지식을 반영하는 교육철학자로서의 삶을 가장 가치 있는 삶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연구자 자신도 그런 수많은 사항들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특정한 교육철학적 지식체계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교육철학 중에서도 특정 영역을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만 연구자에게 분명한 사실은 지금까지 습득한 모든 경험과 모든 지식, 그리고 지금까지 내면화한 모든 신념체계와 가치체계들이 모두 섞이고 통합되어 독특한 교육철학적 지식체계를 형성했으며, 특정 영역을 공부하는 교육철학자로서의 삶을 가장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현재 연구자에게 존재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다양한 영역에서 배운 낱낱의 지식이라기보다는 그런것들을 통합한 독특한 교육철학적 견해와 이를 포함하는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생각(삶의 총제적 이상)을 갖게 해주는 총체적 지식이 있다. 나아가, 현재 공부의 목적도 바로 총체적 지식을 보다 더 확실하며, 풍부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있다.

Ⅳ. 총체적 지식의 계속적 재구성

이러한 앎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앎은 낱낱으로 나누어진 지식과 정보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지식과 정보를 넘어서서 통합된 총체적인 앎, 즉 총체적 지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언어적 표현상으로는 하나하나 분리되어 있는 지식을 다루고 습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단 어떤 지식을 습득하게 되면 그 지식은 전체 마음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공부나 탐구를 통해 학습한 지식들은 고립된 것으로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습득하는 사람의 앎의 전체 덩어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마음속에 저장된다.

탐구나 공부의 과정에서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전체 덩어리는 새로 들어온 지식을 물 들이게 되고, 새로 들어온 지식은 전체 덩어리에 의해 채색되게 된다.

마음속에 있는 총체적 지식이 새로 습득하는 지식을 채색하여 총체적 지식에 흡수된다는 주장은 개별적 지식을 지식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지식관이나 개별적 지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교 교육과 평가의 관행에 비추어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검토한 바로는 우리의 실제적인 앎의 과정에서는 항상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를 들어 술의 성질에 대한 지식을 경험에 의해 탐구하거나 배웠다고 하자. 그러면 술의 성질에 대한 지식은 마음속에 들어와 총체적 지식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술에 대한 지식은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수한 형태로 꺼낼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술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액체는 술꾼에게는 활력과 기쁨의 원천이라면,  술을 못 먹는 사람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이며, 술장수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이요, 가난한 술꾼의 아내에게는 빈곤과 외로움의 상징이 된다.

이처럼 실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술에 대한 지식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총체적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각각의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은 겉모습에서는 동일한 지식처럼 보이지만, 총체적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별개의 것이며 서로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총체적 지식이라는 전체 덩어리가 새로운 지식을 물들이고 새로운 지식이 전체 덩어리에 의해 채색된다는 앞의 언급에 함의된 보다 중요한 사실은 탐구나 공부의 중요한 목표는 공부하는 사람의 밖에 있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총체적 지식의 함양이라는 점이다.

원래 우리 내면에 있는 지식의 덩어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총체적 지식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점과 불확실한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보면 총체적 지식은 그 속에 탐구해야 할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체적 지식은 언제나 기회가 있으면 자신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을 보완할 기회를 찾게 된다. 설령 총체적 지식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무엇인가와 마주치게 되면 총체적 지식은 새로운 지식이나 대상과의 조절을 필요로 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총체적 지식이 있기에 새로운 내용이나 대상과 만날 때에 그것을 배울 것인지 아닌지, 그것을 배우되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배울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즉 총체적 지식이 있기에 주어진 내용이 탐구하고 공부할 대상인지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어진 내용을 공부하는 방법과 구체적인 의미까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총체적 지식이다. 그리고 공부의 결과로 새로운 총체적 지식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총체적 지식을 확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상황적 교변작용을 하는 것이며, 이 경험의 과정을 통하여 끊 임없이 총체적 지식을 재조직하고 재구성하게 된다. 요약하면, 상황적 교변작용을 하는 경험을 삶의 속성으로 하는 인간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총체적 지식을 재구성하는 일을 하게 된다.

총체적 지식을 재구성하는 것은 삶의 속성이며 필연이다. 그것은 마음이 있으며 사고 하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총체적 지식의 재구성이 멈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을 사용하며 사고하는 존재 즉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삶은 사망 상태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Ⅴ. 인간 삶의 원초적 현상으로서 총체적 지식의 함양

지금까지 본 연구에서는 지식은 개별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며, 교육은 이러한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라는 널리 퍼져있는 믿음에 대한 대안적인 생각을 탐구하였다.

그 방법은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통합성에 기초한 ‘교변작용하는 상황’이라는 형이상학과 이 형이상학의 아이디어에 들어 있는 인식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는 공부에 대한 본 연구의 주요 결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공부는 자연의 본질에 대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교변작용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다. 둘째, 공부는 낱낱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공부는 개인 밖에 있는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지식을 ‘계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인간 앎의 성격, 즉 총체적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사지선다형의 답이나 단답형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은 참된 앎의 모습이 아니며, 그러한 지식은 공부의 궁극적 대상은 아니다. 공부는 그러한 지식을 매개로 총체적 지식을 확충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공부에 대한 생각은 총체적 지식의 형성과 재구성의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에서 ‘총체적 지식의 함양으로서 공부’ 또는 총체적 지식을 줄여 ‘총지(總知)의 함양으로서 공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총지의 함양으로서 공부’의 아이디어는 전통철학적 관점에서의 공부에 대한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만큼 교육과 공부 전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는 풍부한 함 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총지의 함양으로서 공부의 중요한 특성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총지의 함양으로서 공부의 관점에서 보면 공부는 언제나 소위 폴라 니(M. Polanyi)가 말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에서 개인적 앎 또는 개성적 앎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성적 앎은 개인마다 다른 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을 가정하는 전통철학의 관점에 의하면 경험 속에서 처음 마주치는 대상, 지금까지 탐구하지 않았던 대상만이 연구나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일단 그 대상의 본질이 탐구되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한 더 이상의 탐구가 불필요하게 된다. 나아가 그 사물에 대한 탐구는 모든 사람이 할 필요도 없다.

어떤 천재가 있어서 그것을 탐구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천재의 탐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 철학의 공부론에서는 지적 제국주의가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총지’의 함양으로서 공부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의미는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 탐구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있는 총지를 기초로 하여 보다 의미 있는 총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육내용으로 주어진 진술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그 진술에 대해 전체로서 마음에 적합한 새 로운 의미를 탐색하고 부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과정은 항상 ‘창조’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때 공부의 결과 갖게 되는 지식은 자신의 삶과 앎 전체에 적합한 개성적 앎이다.

둘째, 공부한다는 것은 삶의 속성이 요 삶의 필연이라는 사실이다. 교변작용을 하는 상황에서 보면 인간이 어떤 지식을 습득하고 나면 인간이 변화한 셈이 된다. 인간이 변화하고 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경험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교변작용은 이전에 경험했던 대상을 경험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교변작용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대하는 사물이나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총체적 지식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게 된다.

설령 어느 시점에서 대상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총체적 지식이 변화하면 상황이 변화하게 되고, 다시 대상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필요로 한다.

결국 총체적 지식의 함양으로서 공부측면으로 보면 인간 삶은 계속적인 탐구를 특징으로 한다. 즉 산다는 것은 총체적 지식을 가지고 세상과 교변작용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총체적 지식을 가지고 교변작용을 하는 것은 항상 탐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공부와 탐구는 삶의 속성이며 삶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 삶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인간 삶의 ‘원초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부나 탐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즉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에 교변작용하는 상황과 총체적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생물과는 달리 사고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의 결정적 특징은 각자의 삶의 상황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삶의 의미를 확대한다는 데에 있다.

즉 사고 능력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고 획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새로운 의미의 획득이나 의미의 확대로 생긴 총체적 지식 때문에 그 이전에는 존 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탐구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갖게 되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문제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처럼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총체적 지식을 가지고 교변작용을 하는 인간에게는 삶의 속성이요 삶의 필연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하여 왜 가치 있느냐 하는 질문은 의미를 잃게 된다.

그것은 마치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것이 왜 가치 있느냐 또는 지금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더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왜 가치 있느냐 하는 질문과 동일한 것이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교육(또는 공부)에는 더 교육받는 것(또는 더 공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Dewey, 1916: 51).

새로운 의미의 탐구와 확대를 뜻하는 교육과 공부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즉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과정은 교육과 공부의 과정이며, 이런 의미에서 삶과 교육과 성장은 동일한 것이 된다. 요약하면, 인간의 삶은 계속적인 의미의 탐구를 특징으로 한다.

서양의 주류 전통철학처럼 확실한 지식의 상태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리고 확실한 앎의 상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앎의 상태를 앎의 시지프스적 상태라고 보고 비참한 상태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확실한 지식이 있는 상태는 더 이상의 탐구가 없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사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더 이상의 성장이 멈춘 상태, 즉 ‘정신의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탐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섭하고 사는 것이다.

교육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탐구능력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따라서 공부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은 모든 인간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