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성과 창의성

앞선 강의에서, 사람들을 두 집단, 즉 영재인 집단과 영재가 아닌 집단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 바가 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그 재능에 관한 한에서는 영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그 재능의 사회적 유용성 때문에 일반적 의미의 영재, 즉 ‘사회적 영재’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는 있다. 대체적으로 뛰어난 과학의 영재는 놀라운 마술(魔術)의 영재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높은 관심과 대우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사회적 인정도가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주로 ‘영재’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영재가 영재로서 발휘해야 할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능력은 창의력이다. 영재적 잠재력은 기본적으로 창의성의 잠재력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창의력을 말할 때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없던 것을 있게 하는 능력, 기발한 착상의 능력 등을 언급한다. 그러나 쉽게 말해서 창의력은 어떤 유형의 것이든지 간에 주어진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통하여 그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는 능력을 뜻한다고 하면 비교적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적으로 유의미한 창의력은 온갖 잡다한 종류의 창의력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다음의 요소들을 만족시키는 범주의 것을 뜻한다. (1) 기본적인 이지적(理知的) 능력에 기초하여 발휘하는 창의력을 뜻하고, (2) 우연적으로 발휘하는 기지(機智)나 착상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집착을 통하여 발휘하는 문제해결력을 뜻하며, (3) 일시적인 어떤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라기보다는 하나의 성향으로 체질화된 특성을 의미한다.

창의력의 교육을 말할 때,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창의력이란 사고의 대상이 되는 소재 혹은 내용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계발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창의력 이란 ‘일반지능’처럼 그것이 발휘되는 내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성향인가 하는 것이다. 그 경우 창의력이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창의력, 예술적 창의력, 기술적 창의력, 전술적 창의력 등 그 어떤 이름의 것이라도 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교육과정은 내용, 즉 정보, 지식, 이론 등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창의적 사고의 연습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하여, 즉 영재로서 제대로 교육시켜 위대한 과학자, 사상가, 사업가 등으로 길러 민족과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로 기르고자 할 때,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집중도를 지녀야 하는가이다.

아마도 30세가 넘은 성인에게 야구를 가르쳐 훌륭한 야구선수로 만든다거나, 40세의 나이에 피아노를 배워 세상을 놀라게 할 피아니스트가 되게 한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듯이 영재가 영재로서 그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의 전문성이 요청될 것이고, 그 전문성은 어느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계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계발의 시기와 범위이다. 말하자면 언제부터 얼마나 넓게, 혹은 얼마나 집중적이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의 문제는 일상적 경험의 분석과 체계적 검토를 통해서도 답할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두 번째의 문제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재가 그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넓게 공부하도록 해야 하느냐, 아니면 좁게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집중하는 분야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하고 장기적인 체계적 관찰과 연구를 요하는 문제이다.

창의력은 내용과 무관한 일반능력이 아니다

우선 내용에 관계없이 창의력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또한 작용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창의력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 사회적 문제의 해결에도 그 능력을 반드시 잘 발휘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내용이 다르면 창의력은 발휘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며, 내용과 더불어 창의력은 작용한다는 말이다. 바둑이라는 게임, 적어도 유단자들이 즐기는 바둑이라는 것은 고도의 기본기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대단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바둑의 고단자가 과학적 혹은 예술적 창의력도 발휘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흔히 창의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기 위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용을 지나치게 경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지적(理知的) 창의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론, 지식, 정보, 규칙 등의 소재가 주어져야 하고, 그것을 조작할 수 있는 방법, 요령, 안목 등의 도구가 있어야 한다.

창의력을 발휘하자면 그것이 작용하기 위한 도구와 소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런 소재도 도구도 없는 텅 빈 방 안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조잡한 소재를 가지고 기발한 방법으로 다루어 탁월하게 발휘되는 창의성이란 창의적일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그 내용은 하찮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격이 높은 지적 소재를 가지고 탁월한 도구를 사용하여 성취한 창의적 결과는 고도의 유의미한 창의성이 발휘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예술적, 문학적 창의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창의성을 위한 교육에서 내용 혹은 지식(이론)은 무용하거나 경시해야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에 실어 놓은 지식, 이론, 사상 등의 내용은 대개 천재들이 개발한 것으로서 매우 탁월한 창의력을 발휘하여 생산한 것들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연히 발견한 창의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뉴턴 이전에는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지도 않았고 뉴턴 이외에도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뉴턴처럼 그러한 법칙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뉴턴이 지녔던 지식과 관심과 집착, 그리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의 질적 수준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 즉 그 내용이 일차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창의성을 지녔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창의성에 있어서 내용은 학습자의 필요조건일 뿐이며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런 사람은 박식할 수는 있으나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창의성이 발휘되는 마음의 적절한 작용이 없이 단순히 마음속을 채우기만 하는 지식, 이론, 사상을 소유하고 있을 따름이다. 암기에 의한 지식, 점수따기식 교육의 결과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잡다한 지식과 정보들이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법적 원리에 의해서 조직되고 다듬어지고 가공되고 사용되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좋은 교육을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창의력 또한 이 과정에서 작용하는 법이다.

창의력의 깊이와 넓이

그러면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한 교육의 내용, 정보, 지식, 이론 등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집중해야 하는가? 야구 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야구만 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야구는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달리고 하는 동작 이외에 게임의 규칙과 전략과 안목이 필요하다.

이에 맞는 체력을 소유해야 하고 야구장비의 성질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경기에 나설 때는 담력과 용기와 재치를 소유해야 한다. 야구란 이런 스포츠이다. 적어도 이런 정도만 구비하기 위해서도 야구 선수로서의 학습의 과제는 적지 않게 많은 셈이다.

혹시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탁구 연습을 많이 하여 순발력을 키우고, 검도나 궁도를 해서 집중력을 높이고, 태권도나 유도를 해서 순간적 사태의 대응력을 높인다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야구 선수에게 수학이니 과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교과는 단순히 학생이 야구 선수로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건강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양적 목적으로밖에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마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야구 선수가 그러듯이 수학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수학만 잘하게 하면 되는 것인가? 야구에서 하는 달리기, 던지기, 치기 등은 다른 스포츠에서도 하듯이, 스포츠는 종목마다에 한정된 기술과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수학도 자연과학, 사회과학, 철학, 기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나 예술과도 무관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수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에서만 아니라, 관련 분야와 공유하는 영역에서도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에 수학자로서 통달해야 하는 전문적 영역의 범위가 있다면 교육과정에서 어느 정도로 넓혀 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좁은 구역을 정해 놓고 깊게만 파고자 하면 그 깊이는 사실상 한계가 있다. 더욱 깊게 파기 위해서는 구역을 더욱 넓게 해서 파야 한다.

어떻게 넓혀야 하는가? 인접 학문으로 그 영계를 넓혀야 할 것이다. 예컨대, 수학 혹은 물리학의 인접 학문이라는 것의 전통적 관념이 상당히는 흐려지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과학의 한 분야는 자연과학이라는 영역에서만 아니라, 사회과학, 인문과 학, 예술, 스포츠 등을 인접으로 수용하려는 예상치 못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의 분야별 전문화와 분화현상은 한 분야 내의 전문적 분업의 형태만이 아니고, 인접과학과의 교차와 접변을 통하여 다시 통합되기도 하고 세분화되기도 하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과학에서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학문 영역 간의 통합과 접변은 인접한 것과의 관계를 넘어 상상하기조차 힘든 엉뚱한 영역들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여러 분야에서 전통적인 학문의 영역들 사이에 있던 벽들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학문 영역들 간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통적 영역들 간의 접변으로 인한 재분화가 발생한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심리학은 과거에는 인접 학문이라고 하면 기초부문에 철학을 들 수 있고, 응용부문에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교육학 등을 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심리학의 어떤 분야, 예컨대 뇌과학과 관련된 분야는 그것이 자연과학이라고 해야 할지 사회과학이라고 해야 할지를 구별하기 힘든 분야이기도 하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구별은 단지 관심의 집중 정도에 따른 구분이지 대상과 방법의 엄격한 경계를 둔 구분은 아니다. 그리고 많은 사회과학적 논의는 철학, 역사학, 문학 등의 인문과학과의 접변에 의한 연구과제들이 개발되고 있다. 

잠재적 창의력을 체계적으로 발휘하는 데는 다소 전문화된 분야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전문화의 분야가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그 범위를 지나치도록 협소하게 규정하면 오히려 창의력 혹은 재능의 성장을 제한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전문적으로 집중하는 영역이나 관심사가 없이 방만하게 이것저것을 섭렵하여 초점을 잃으면 창의력이 충분히 계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학습범위의 집중과 확대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는 영재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전문적 분야의 성격에 따라서 그 넓이와 깊이 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직관적 판단이나 엄밀한 계산이나 이론적 유추를 통해서만 검토할 수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실천적 경험, 특히 장기적 경험을 요하는 문제도 얼마든지 있다.

두 가지의 장벽 — 입시와 학제

내가 영재교육기관에 속하는 민족사관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 제도상의 문제 두 가지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나는 대학입시라는 절박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있는 고등학교에서 영재교육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하는 데는 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직된 학교제도에 맞추어 영재교육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영재교육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잠재적 창의력이 실현될 수 있도록 계발하는 교육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오늘의 여건 속에서 창의력 교육은 심각한 제도적 장벽을 경험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창의력 교육의 문제는 영재교육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영재교육을 하는 학교라고는 하지만 민사고도 우리나라의 학제상 3년의 고등학교이고 도리 없이 대학의 진학을 위한 준비교육을 해야 한다.

이 학교가 실질적으로 영재교육을 하고 있고 그러한 성과를 거둔 학교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대학선발정책에서는 어떤 특전이나 고려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사정관 제도와 같은 정성적 평가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소규모의 영재학교는 내신등급 등에서 오히려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의 전통적 사립학교와 문법학교(Grammar School)는 영재교육이니 지도자 교육이니 하는 건학 이념의 천명 없이 본래가 대학의 준비학교(Preparatory School)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민사고도 그러한 서양의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대학의 준비학교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지금까지 교육의 성과도 진학의 실적으로 말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에, 어쩌면 외국의 경우에도, 대학의 진학을 준비하는 교육은 영재의 계발을 위한 교육과 상당한 정도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창의력 교육의 장벽을 설명하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내가 민사고에 부임했을 초기에 교사들은 영재교육과 입시교육을 동시에 한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기 힘든 일로 여겨 갈등을 겪고 있었다. 당장의 입시교육을 위한 효율성은 좋은 점수따기에 있다.

그러나 점수따기식 교육으로는 영재적 잠재력을 계발하는 교육을 효율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고민도 있는 듯했다. 학교장인 나는 이렇게 말해 왔다.

“우리가 영재교육만 충실히 하면 진학 교육이 부실할 수밖에 없고, 진학 교육에만 충실히 하면 영재교육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지금의 학생들, 영재학생들을 평생토록 데리고 있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 학생들의 영재성을 계발하되 적어도 그 영재성을 계속해서 잘 계발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대학에 보내주는 것 역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진학교육 역시 영재교육과 무관한 것이 아니며 또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렵지만 우리는 영재교육의 방법과 일관성이 있는 진학교육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다.

충실한 영재교육이면서 효율적인 진학교육인 것, 이 말은 사실상 듣기에는 쉬우나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철저한 영재교육의 원리를 일정 부분 유보하면서 진학 교육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반드시 영재성을 계발하는 교육의 전략으로 불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야 3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 마지막 1년은 입시 준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초기의 2년을 완전히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만으로는 영재교육의 원리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사실상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소위 명문 대학의 진학을 원하는 학부모 측의 압력까지 가해지면 학교의 교육과정은 대학입시의 준비를 위한 모양새를 갖출 수밖에 없다. 중학교는 비교적 대학입시와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영재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적어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하여 6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면 영재교육과 대입 준비를 더욱 균형 있게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웃 일본에서 영재교육을 위한 학교들 중에 초기 중등의 중학교와 후기 중등의 고등학교를 한 체제로 연계한 ‘일관중등학교(一貫中等學校)’로 개편한 사례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에 일본의 일관중등학교와 같은 제도가 허용되려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의 학제(學制)가 바뀌어야 한다. 기왕 학제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교육부와 연구기관의 주변에서 학제의 개편에 관한 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오고 있다.

초등학교를 5년으로 한다든가 고등학교를 4년으로 한다든가 등의 아이디어들이 검토되고 있는 것 같이 들린다. 내가 보기로는 학제에 관한 한 적어도 두 가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구태여 현행과 같이 6-3-3-4 제도니, 5-3-4-4 제도니 하는 식으로 학교 제도를 규격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의 사회, 특히 지식기반사회로 전망되는 미래의 사회에서는 필요로 하는 교육연한이 과거처럼 몇 년 몇 년으로 규격화해서 정해져 있으면,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의 인력의 개발에서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기실현을 위해서 매우 불편하거나 비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래의 학교는 산업, 지식, 생활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획일화된 학교제도는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기가 어려우므로 능률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임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중앙정부가 교육과정의 개발이나 교원공급의 편의 등을 위해서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등의 수준은 제도적으로 구분해 두되, 구체적인 개별학교는 그 학교의 성격에 따라서, 혹은 설립이념에 따라서, 예컨대 5학년에서 7학년까지, 8학년에서 12학년까지, 혹은 9학년에서 12학년까지의 학교들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도록 개방해 둘 필요가 있다.

학교 간의 이동은 이수한 학년을 기준으로 그 가능성을 판정하면 된다. 어떤 초등학교 중에는 4년제도 있고 5년제나 6년제도 있으며, 어떤 중학교 중에는 3년제도 있고 5년제도 있고 4년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제도는 그 그 효율성을 점검하기 위하여 경쟁상태에 두면 언젠가는 자연히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혹은 다양한 모양으로 안착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급 학교의 수업연한이 몇 년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 보다는 지금의 한 학년도 2학기 제도와 3월 학기제도 등도 개방적으로 검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의 학기제는 재조정되어야 한다. 해당 학년도의 2학기는 대개 12월 말까지 교육과정의 운영이 거의 끝나는 데도 불구하고 겨울방학 후인 2월의 한 달 동안 학생들을 학교에 허술하게 묶어둔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차라리 2월부터 신학년 신학기를 시작하게 하고 여름 방학을 연장하든가 아니면 개별학교로 하여금 방학으로 정한 기간에 여름 학기도 운영할 수 있는 여유를 줄 필요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마도 미래에도, 학생들의 국가 간 이동이 매우 빈번할 것이고, 국제적 취업구조에도 적응해야 할 것이므로, 매 학년도의 신학기를 3월에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학기제를 국제적 동향에 맞추어 전년의 9월로 앞당기는 방식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외국, 특히 서양의 경우보다 6개월 정도 늦게 취학하고 있다. 요컨대, 미래의 교육은 고정된 제도적 틀로써는 변화에 대응하기가 어려 울 것이다.

투자적 동기에 의한 교육계획이거나 복지적 동기에 의한 교육정책이거나 간에,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나 중학교에서까지도 학생 선발의 규칙, 교육운영의 체제, 교육내용의 조직, 학습활동의 범위를 기계적으로 고정시켜 놓고서 국제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혹은 교육받는 각자에게 충분히 봉사하는 제도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한꺼번에 온갖 것을 고쳐버릴 수는 없으므로, 국가는 교육의 여러 부문에서 크고 작은 교육적 실험이 가능하도록 국가적 통제의 경직성을 풀고 오히려 이를 지원하는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의 교육정책은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사고와 실천의 여지를 허용하기보다는 규격성과 획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제와 규제가 너무 많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