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아는 예술가로 키우는 교육

<늦은 시간임에도 수업에 열중인 서울미고 학생들의 표정이 밝다>

대학들이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추세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2015학년도와 2016학년도 수시모집 신입생을 학종으로 100% 선발하는 등 대학가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야말로 학종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학종도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종에 반영되는 것은 자기소개서, 학교생활기록부(교과성적, 수상실적, 창의적 체험활동, 독서활동상황, 봉사활동, 세부능력특기사항 등), 교사추천서인데 자기소개서는 여전히 돈을 주면 전문 컨설팅을 통해 만들어지고, 질 낮은 교내 행사, 고액을 들여 만들어 낸 소논문, 조작된 창업회사 대표 이력 등의 폐해가 나타났다.

정작 성실성, 창의성, 문제해결능력 등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과 발전 가능성을 점검해 각 대학의 인재상에 맞는 학생을 선발하려는 취지는 무색해지고 있다.

이러한 입시 상황에서도 서울미술고등학교(이하 ‘서울미고’)는 ‘헤더윅 스튜디오’라는 수업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의 특성에 맞게 학생들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 수업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취재 지성배 기자

 

미술은 상상력···꿈을 꿀 수 있게 해야 한다

기자가 서울미고를 찾은 것은 저녁 8시 방과후학교 시간이었다. 이른 추위로 인해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었지만 수업 준비중인 교실에 들어서니 학생들의 열정과 활기에 어느새 외투를 벗고 있었다. 온종일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이 학생들은 어떤 수업을 듣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하던 찰나 수업이 시작됐다.

“창의력은 영감보다 끝없는 토론에서 발전한다.”

방과후학교 멘토링 담당 전혜민 선생님은 이 같은 문장을 읽으면서 헤더윅 수업을 시작했다. 4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은 어느새 조를 이뤄 준비된 헤더윅 스튜디오의 작품 사진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헤더윅 스튜디오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내부 디자이너와 건축가,외부 조경업체와 시공사, 정부기관 등 서로 다른 사고를 하는 그룹 원들이 참여하여 이견을 조율하고 결과를 구현하는 과정을 통해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영국 헤더윅 스튜디오에서 디자인한 런던 패딩턴 지역의 '롤링브릿지'(좌)와 웰컴트러스트 본사 건물 내의 설치물 '블라이기센'(우)이다>

논의 과정에서 나오는 단 하나의 의견도 무시하지 않고 작품에 녹여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런던 패딩턴 지역의 ‘롤링 브릿지(Rolling Bridge)’, 웰컴트러스트 본사 건물 내의 설치물 ‘블라이기센(Bleigiessen)’, 중국 상하이 엑스포의 ‘UK Pavilion’, 싱가포르의 ‘러닝 허브(Learning Hub)’ 등이 있다.

헤더윅 스튜디오 수업은 헤더윅 스튜디오에서 위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그대로 수업에 반영해 학생들이 영감을 표현하는 능력과 작품을 창조하는 능력을 기르는 수업이다.

그렇다면 서울미고의 헤더윅 스튜디오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전혜민 선생님이 보여준 헤더윅 스튜디오의 작품들을 보니 기자의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에게 처한 어려움을 이용해 디자인하라

“지금부터 당신들은 헤더윅 스튜디오의 일원입니다. 여러분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단, 8가지의 어려움을 선택해 각각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주세요.”

학생들은 헤더윅 스튜디오의 일원이되었다. 5~6명으로 구성된 조별 미션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교실이 없다’, ‘책이 없다’, ‘책상이 없다’, ‘선생님이 없다’, ‘전기가 없다’ 등 12가지의 어
려움 중에서 8가지의 어려움을 선택해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해야 한다.

공부하는 공간을 디자인해야 하는데 교실, 책, 책상, 선생님, 전기 등 꼭 필요한 조건이 없어진 상황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가 문득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조건을 갖고 어떻게 공부할 수있는 공간을 만들지?’

기가 찬 기자는학생들의 토론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별 토론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어디선가 기자의 귀를 자극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서울미고 헤더윅 스튜디오 수업시간에 마주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책상이 없으면 땅을 파서 앉자. 그러면 바닥이 책상이 될 수 있을 거야.”, “교재는 어차피 필요 없어, 자연 체험학습을 통해 우리가 교재를 만들자. 그러면 교실도 필요가 없겠네?”

조별로 선택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것이 ‘창의성이고 문제해결능력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는 기자의 모습이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을 통해 보였다. 문득 헤더윅의 테마가 다시 떠올랐다.

‘창의력은 영감보다 끝없는 토론에서 발전한다.’

헤더윅의 테마가 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서 그대로 나타나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있자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열띤 토론을 한 이유진 학생은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디자인하는 과정을 통해 실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실무자가 된 것 같아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며“사회에 나가면 산적해 있을 각종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예술가는 능동적으로 나를 찾으며 창의력을 폭발시켜야 한다

많은 수업 콘텐츠 중에 어떻게 헤더윅 스튜디오를 수업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을까? 기자의 궁금증을 전혜민 선생님은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해결해주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스튜디오의 작업과정을 보며 학생들의 창의성과 융합적 사고를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서울 용산구 디뮤지엄에서는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이라는 주제로 '헤더윅 스튜디오'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때마침 서울 용산구 디뮤지엄에서는 <헤더윅 스튜디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 전시회를 국내 최초로 개최하고 있었고 전 선생님은 이 전시회가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수업 콘텐츠라고 확신했다.

체험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콘텐츠는 많지만 사고를 확장하고 융합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실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서울미고 학생들에게는 가장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관람한 이지은 학생은 “전시장에 들어간 순간 디자인적 요소와 조형 요소 등이 함께 접목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며 “이러한 작품들을 탄생과정을 살펴보고 감상을 하다 보니 나의전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주희 학생은 “전시된 작품들은 공공미술 작품으로 이공계열적인 요소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이공계열을 선호하지 않는 입장이었지만 공공미술이라는 분야를 알게 됐고,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며 관람 소감을 전했다.

전 선생님은 미술전문고등학교라는 학교와 예술인의 길을 걷고 있는 재학생의 특수성에 맞추어 수업 콘텐츠를 선정하고 있었다. 창의성을 넘어 창작활동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학생들에게
영감을 심어주고 능동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수업 콘텐츠를 선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달라진 예술가의 의미와 작업환경을 반영할 방법을 찾기 위한 전선생님의 고민이다. 과거에는 예술가 한 사람만 있어도 작품을 만들고 발표하는 것이 가능했고, 예술가들 또한 고독한 창작활동을 즐겼는데, 현대 미술은 그 적용 범위의 다양성과 전문화된 세부 분야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은 필수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디자인 협업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헤더윅이 현시대를 반영한 가장 적합한 수업 콘텐츠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해주었다.

기술적 훌륭함 보단 융합적 사고(思考)

최근 학종으로 신입생을 뽑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고 이러한 현실에 마주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종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렇다면 전 선생님이 지도하는 헤더윅 스튜디오와 같은 수업이 학종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학종도 영역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국내 유수 미대의 학종 추세를 분석해 본 결과, 기술적 훌륭함만 갖춘 학생보다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융합적 사고와 창의력을 갖춘 학생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 선생님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단호했다.

“학종은 따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생활과 수업을 통해 자연적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학종의 요소들을 채우기 위한 준비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고, 이러한 한계는 학생의성장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는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서울미고와 제가 지향하는 교육 철학입니다.”

최근 학종을 통해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돈으로 소논문을 사고 동아리 회장을 하고 창업회사 대표가 되는 등의 폐해가 나타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서울미고는 스펙 쌓기에 연연하기보다
는 예술가로서의 내적 자질을 심어주는 데 더욱 노력하고 있었다.

미술고라는 특성에 맞게 나만의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내적 성장을 돕고 편법이 아닌 정공술로 대학 문을 돌파해 나가고 있는 것이 서울미고가 지난 50여 년간 지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중요 이유가 아닌가 싶다.

1학년 박하린 학생은 “헤더윅 스튜디오 수업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중시하는 입시를 벗어나 사회에서 디자인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며 “우리의 예술적 시야를 넓혀주어작품 활동을 하기 위한 영감을 얻는데 더욱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인터뷰를 마치며 서울미고로의 진학을 뿌듯하게 생각했다.

<헤더윅 스튜디오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서울미고 전혜민 선생님>

나를 아는 예술가가 되길 바랍니다

이 수업을 진행하는 전 선생님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스칸디나비아어와 언론정보를 전공하고 졸업 후 독서, 토론, 논술 지도를 해왔다. 올해부터 서울미고에서 방과후학교 멘토링을 담당하게 됐다.

주로 체험과 문제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멘토링 수업은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관련 콘텐츠를 심화 학습하며 내면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1 : 1 상담을 통해 고민은 나누고 진학지도와 미래설계를 함께 하고 있다.

“저는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는 퍼실리테이터입니다.”

전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에 확실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다면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을 통해 미술고 학생들이 어떤 예술가로 성장하길 바랄까?

“저는 학생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예술가’로 성장했으면 합니다. 즉, 자아정체성을 확립한 예술가로의 성장을 바라는 것입니다.”

청소년기의 경험과 체험, 그리고 내면화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분야에 강점이 있는지 파악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예술가인지 정의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되었으면 하는 게 전 선생님이 바라는 학생들의 성장 모습이라고 한다.

전 선생님은 학생들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해서 수업 콘텐츠를 찾아 학종을 위한 수업이 아닌 학생들의 내면이 성장할 수 있는 수업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