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여행·사진 작가

남미 파타고니아 지방을 여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있다. 바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다. 모레노 빙하는 지구 온난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최대 2m까지 몸집을 키워가는 중이다.

게다가 이 곳에는 빙하 위를 걸을 수 있는 트레킹 코스가 갖춰져 있어 나와는 궁합이 잘 맞는 장소였다. ‘무자격(이지만) 전문(이라고 주장하고픈) 트레커’를 자처하는 마당에 빙하를 먼발치서 눈으로만 즐기는 건 본분을 망각한 행위였다.

<모레노 빙하 투어 중에는 빙하 위를 걷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

모레노 빙하 트레킹은 보통, 긴 거리를 걷는 ‘빅아이스’와 짧게 끝나는 ‘미니 트레킹’으로 나뉜다. 640페소를 내고 미니트레킹으로 코스 결정. 그런데 알고 보니 국립공원 입장료 100페소는 따로 내야 한다고. 당시 환율로 모두 110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점심으로 소고기 수제 햄버거를 만들었다. 소를 닭잡듯 하는 아르헨티나에선 고기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음식이 저렴했다.

갈비찜, 떡갈비, 양곱창 등 한국에서 제대로 먹으려면 적잖게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요리를 자유자재로 조리해 볼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완성된 수제 햄버거를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짐을 챙겼다.

여행자를 태운 버스는 깔라빠떼를 벗어나 숲길을 산책하듯 달렸다. 멀리 설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면 위엔 드문드문 유빙이 부표처럼 떠 있었다.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모레노 빙하를 설명했다.

<모레노 빙하 주변으로는 산책로가 잘 갖춰져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길은 빙하가 희미하게 보이는 옅은 숲길로 이어졌다. 갑자기 꼭 홍대 클럽을 처음 찾던 날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빙하가 제일 잘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머리 위로 아르헨티나 국기가 나부꼈다. 그리고 모레노 빙하가 내…앞… 내 눈앞에… 어마어마한 덩치를 드러냈다. “뜨아~악!”

<모레노 빙하를 보고 나서야 아르헨티나 국기의 색이 왜 파란색인지 이해가 됐다.>

압도적인 위용, 페리토 모레노 빙하

설산의 곱고 새하얀 빛깔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빙하의 영롱한 비취색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마치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빙하는 산을 넘던 수증기가 얼면서 만들어 진다고 했다.

<영롱한 푸른색이 빙하를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빙하 색이 유독 파란 하늘 빛으로 물들어 있는 이유가 납득됐다. 빙하가 몸집을 키우며 작은 낙빙을 만들어 냈다. 모레노 빙하는 고고한 자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내 상식을 과자봉지 구기듯 순식간에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머릿속은 상식의 저항으로 복잡 미묘했다. 빙하의 압도적인 위용 앞에서 난 움쭉달싹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에서 본 빙하도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지만, 여기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요,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손맛이 진하게 배인 햄버거를 먹고는 페리 탑승장으로 이동했다. 승객을 태운 페리는 빙수를 헤쳐 반대편 선착장으로 향했다.

페리가 빙하에 가까워 지자 승객 모두가 입을 ‘쩍’ 벌린 채 오른쪽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빙하는 어림잡아도 10층짜리 빌딩높이는 되고도 남았다.

가만히 빙하를 보고 있자, 1981년 개봉한 영화 ‘슈퍼맨2’에서 슈퍼맨이 연인 로이스를 얼음 요새로 데려가 태생의 비밀을 털어놓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슈퍼맨의 요새가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면 아마 모레노 빙하가 아닐까 싶었다. 선착장에 내리자 트레킹 가이드는 크램폰(Crampon, 등산화 바닥에 부착해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등산 장비) 착용법과 걷는 요령을 설명했다.

<가이드가 크레바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빙하 트레킹이라고 해서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절벽을 오르거나, 크레바스 (Crevasse,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를 따라 내려가는 탐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이드를 따라 트레킹을 시작했다. 크램폰이 빙하에 박히며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냈다. 가이드는 미니 크레바스에서 잠시 멈춰 서서 설명을 이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빙하의 갈라진 틈 안에 마치 푸른 네온사인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모레노 빙하에서는 빙하 녹은 물을 직접 마셔 볼 수도 있다.>

미니 크레바스를 지나 ‘절그적, 절그적’ 걷다 작은 빙수가 담긴 웅덩이를 만났다. 다들 여기서 빙수를 들이켜며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빙수가 내 몸속을 푸른빛으로 물들일 것만 같았다.

가이드는 테이블 주변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테이블 위엔 유리잔과 아이리시 위스키병이 준비돼 있었다. 가이드는 피켈(빙설로 뒤덮인 경사진 곳을 오를 때 사용하는 작은 폴)로 빙하를 쪼아 담은 뒤 테이블 위 유리잔에 아무렇게나 들어부었다. 그리곤 준비된 위스키를 적당량 따랐다.

세월의 조각 위로 뜨거운 위스키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차디찬 얼음 조각은 투명한 영혼을 피워 올리며 서서히 녹아들었다.

“딸그락, 딸그락.” 잔을 빙빙 돌리며 꽁꽁 얼어 있던 시간이 위스키 속에 스며드는 걸 재촉했 다. 하얗다 못해 푸른 빙수에 알코올이 더해진 술 한잔이 한낮의 버스 여행처럼 알알하게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빙하 위를 걸은 뒤에는 시간이 녹아 있는 위스키를 마셔볼 수도 있다.>
<여행자들이 빙하 위를 걷고 있다. >

 

여행정보
빙하는, 바람과 함께 파타고니아 지방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이 지역엔 5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빙하가 있으며, 그 규모는 남극, 그린란드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

1981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모레노 빙하는 지구온난화로 급속히 줄고 있는 지구상의 다른 빙하와 반대로 유일하게 팽창 중이다. 과학자들도 이런 기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모레노 빙하는 하루 최대 2m, 1년에 700m씩 몸집을 불리는 중인데, 수년 만에 호수 건너편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이 때문에 모레노 빙하엔 ‘하얀 거인’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빙하의 붕괴현상을 관찰하기 쉬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모레노 빙하는 길이 30km, 폭 5km, 높이 60m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