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여행·사진 작가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값싼 물가로 여행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넉넉하게 해 주는 곳이다. 어디 가나 몇천 원으로 배를 불릴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다. 우유니 소금사막 같은 극적 풍경까지 품고 있으니 남미여행에서 볼리비아는 빼놓을 수 없는 나라다.

우유니에서 볼리비아의 심장 라파즈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저녁 8시 출발하기로 한 버스는 당연하다는 듯 연발 이었다. 우유니~라파즈 구간은 보통 10시간 정도 걸린다.

<라파즈는 시작부터 인디오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승객은 모두 배낭여행자였다. 출발 전 버스 기사 아저씨와 안내양이 승객 앞에 나란히 섰다. 기사 아저씨는 스페인어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했고, 안내양은 이 말을 영어로 통역했다.

말을 들어 보니 도로공사 인부들의 파업으로 4~6시간 정도 시간이 더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볼리비아에선 흔한 일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날이 좋지 않았다. 버스는 변비에 걸린 것처럼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한번 서면 30분간 멈춰 있을 때도 많았다.

남미 여행 중 최악의 이동이었다. 버스 안은 추웠고, 난 밤새 뒤척이며 어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등걸잠을 자고 눈을 떴다.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정신도 비칠대며 정상이 아니었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설 때쯤 버스는 어느 도시에 정차했다. 라파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4~5시간은 더 가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야간 비포장길이 주는 뻑뻑함은 상갓집에서 밤을 새우고 맞는 아침같이 찌뿌둥했다. 밤새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버스 기사 아저씨는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웠다. 그제야 밤새 승차감이 급격하게 나빠진 이유가 이해됐다.

아침으로 나온 스낵과 요거트가 넘어가질 않았다. 타이어를 갈아 끼운 버스는 그렇게 5시간 30분을 더 달렸다. 심신이 거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승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버스 기사아저씨는 센스있게 라파즈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포인트에 차를 세웠다. 사랑에 빠진 남녀 한 쌍이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우유니에서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행 버스에 올랐다. 라파즈에 도착했을 때 한 남녀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상상하던 남미의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그들은 라파즈가 ‘평화’란 이름의 도시란걸 몸소 가르쳐주었다. “대박! 여기가 진짜 남미네!”
라파즈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보니 근처에 이발소와 미용실이 즐비했다.

<볼리비아는 값싼 물가로 배낭여행자들이 쉬어가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

내 헤어스타일은 6개월간 머리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옴므파탈 매력(?)을 발산하는 사자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조금 더 기르면 조선 시대 죄인의 목을 치던 망나니를 연상시킬 기세였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만난 이발소와 미용실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이발소와 미용실이 이렇게 집단으로 성업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숙소 건너편 이발소에 가격을 문의하니 이발은 15볼, 면도는 10볼 선이었다.

머리 한 번 자르는 가격이 2,000원이란 이야기였다. 가격은 둘째 치고 이들의 실력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잘못된 선택이 치명상을 남길 수도 있었다.

물론 현재 몰골 자체가 더 치명적이긴 했다. 산에서 검게 그을린 피부에 사자머리, 여기서 더 망가질 게 없긴 했다. 잘못된 판단이라는 걸 알면서도 단돈 2,000원이란 말에 무빙워크를 탄 듯 자연스럽게 이발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발사 아저씨는 내가 신기했고, 나는 그가 신기했다.

<미장원이 몰려 있는 골목에서 몇 개월 만에 머리를 손질했다. >

이발사 아저씨는 내가 극동에서 온 사람인지, 동남아에서 온 사람인지 아니면 볼리비아 현지인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단 눈치였다. 그는 순간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는지 국적 불명 여행자를 자리로 안내했다. “운뽀꼬(Un Poco).” 스페인어로 조금만 잘라 달라고 했다.

이 말이 이 상황에서 맞는 표현인지 몰랐지만 다행스럽게 뜻이 통했다. 이발사 아저씨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단 분홍색 알코올이 든 램프에 불을 붙이며 범상치 않은 시작을 알렸다. 그리곤 빗과 가위를 차례로 알코올램프에 갖다 댔다.

이어 또 다른 알코올 스프레이를 능숙하고 과감하게 램프에 뿌렸다. 순식간에 알코올이 허공을 태우며 화염방사기에 버금가는 화력을 선보였다.

소독치고는 무척 과한 느낌의 ‘불쑈’가 펼쳐졌다. “와우!” 이발사 아저씨의 공연 같은 화려한 준비를 보곤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는 충분히 소독된 가위와 빗을 몇 차례 더 ‘초벌구이’했다. 동그래진 눈으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이발사 아저씨는 흐뭇한 웃음을 날렸다. 그는 천천히 내 머리를 빗겼다. 그런 다음 머리끝을 보여주며 이만큼만 자르면 되느냐고 물었다. “씨! 씨!” 딱 적당한 길이였다.

‘싹둑’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경쾌한 가위질 소리였다. 그런데 가위질 소리는 채 열 번을 넘기지 못했다. 그걸로 이발은 끝이었다.

6개월간 머리를 안 잘랐는데 가위질 10번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어이상실 시추에이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리 사자머리를 한 뜨내기손님이라지만 너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장기 여행에서 머리를 잘라도 그만, 안 잘라도 그만이었지만 제값은 받고 싶었다.

거울 밑에 놓인 숱가위를 가리켰다.이발사 아저씨는 그제야 별 필요 없는 가위질이란 식으로 듬성듬성 숱을 치기 시작했다. 순간 왜 숱을 치지 않았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가위 날이 거의 다 죽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뽑혀 나가는 식이었다.

“아~앗! 아놔!”

내 작은 비명에도 이발사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위질을 계속했다. 그런 뒤 그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구레나룻을 싹둑 밀어 버렸다.

한국 미용실에선 으레 구레나룻 끝을 뾰족하게 다듬지만, 칼질 한 번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 구레나룻이 사라지자 사자머리와 조화를 이루며 라파즈 버전의 컨트리 스타일이 완성됐다. 이발사 아저씨는 의도한 스타일이 제대로 표현된 것처럼 ‘므훗한’ 미소로 날 내려다봤다.

다음은 면도 차례. 한마디로 이런 면도인 줄 알았으면 절대! 절대! 절대! 하지 않았다. 이발사 아저씨가 새 면도칼을 꺼내 면도기에 꽂아 넣었다. 그런 다음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내 턱과 뺨 부위에 골고루 알코올을 발랐다.

보습기능이라 곤 전무한 순수 알코올을 그냥 피부에 발라 버리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 내 피부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가만보니 소독은 해야겠는데 피부에 ‘불쑈’를 할 수 없어 선택한 차선책 같았다. 알코올이 시원하게 피부에서 증발했다. 그는 곧장 칼을 내 뺨에 갖다 댔다.

“오~ 이런 맙소사!”

면도엔 큰 게 하나가 빠져 있었다. 거품칠은 고사하고 비누칠도 없었다. 거품 면도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수염 나고 처음 해보는 초건식 면도였다. 중간에 면도를 그만두고 싶어도 순식간에 뺨 한쪽을 다 밀어버린 뒤였다.

면도가 끝나자 이발사 아저씨가 다시 알코올 스프레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초건식 면도로 한껏 놀란 피부에 순정 알코올을 꼼꼼히 분사했다. “뭐야! 앗 따가워~어!” 턱을 들어 거울을 보니 군데군데 피가 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상처 난 곳을 가리켰다.

“운뽀꼬!” 이발사 아저씨가 눙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