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李贄), 중국 명대의 사상가·문학가. 출처=다음백과>

“나는 스승과 친구는 원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둘이 다르단 말인가? 만약 친구라서 사배를 올리고 학업을 전수받을 수 없다면, 필시 그와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스승이라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지 못한다면, 또한 그를 스승으로 섬길수 없다(이지, 1998: 141).”

격정의 생애를 살았던 명나라 사상가 이지의 말이다. ‘교학상장’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교학상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학상장? 그래, 교학상장이지! 그럼, 교학상장이지!”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교학상장’에 담겨있는 원래의 의미도 깊지만, 다양한 해석을 덧붙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본래 뜻에서 살짝 벗어나 보자!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가 함께 성장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뜻. 그러니까 ‘배울 권리’와 ‘가르칠 권리’는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야 할 것 같다! 배울 권리와 가르칠 권리는,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배려하면서 가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 두 권리가 사소한 충돌이 아니라 중대한 갈등으로 서로를 등지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떤 권리가 우선권을 가지게 될까? 물론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르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교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큰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는 힘의 불평등에서 비롯된 불공정함이 아니고, 배울 권리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한 교육적 배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울 권리를 가진 학생은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므로 무엇을, 어떻게, 왜 배울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은 교사가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입장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것은 교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 자신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가르칠 권리가 우선인, 첫 번째 경우

학생의 배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교사는 자신이 일그러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년 감독 박종원)의 김 선생님은 엄석대의 불의를 밝히기 위해 아이들을 때린다.

“불의 앞에 굴복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어 갈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매를 때리는 김 선생님의 말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매를 때려서라도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교사가 알려주어야 한다.

가르칠 권리가 중요한 이유를, 그리고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가 충돌했을 경우 가르칠 권리가 우선되어야 하는 까닭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매를 때려서라도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하는 김 선생님의 절절한 고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배운 아이들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김 선생님의 폭력은 민주주의 교육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가?’, ‘김 선생님의 판단이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는 ‘유일한’ 잣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르칠 권리가 우선인, 두 번째 경우

이번에는 가르칠 권리의 보장을 통해서 학교를 바꾸어나가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보자. 영화 <고독한 스승>(Lean On Me, 1989년, J. G. Avildsen 감독)에서는 문제 학교에 새로 부임한 클라크 교장 선생님이 주인공이다.

교장 선생님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학교를 바로 세울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교가를 부르지 않는 말썽꾸러기는 즉석에서 퇴학시킨다. 가르치라는 교가는 가르치지 않고 콘서트 준비만 하는 음악교사도 파면해버린다. 가르칠 권리의 전형을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 그 권리의 모범이 되지 않는 교사는 퇴출해버리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잊어버리라고, 그리고 자신의 말이 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를 독재적인 교장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다. 그의 막무가내인 행동은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보장하기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학교에 와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를 ‘공부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공부하지 않아서 인생에서 실패하면 절망감에 빠져서 두 손을 번쩍 들게 되고 그렇게 두 손을 든 사람에게는 총이 겨눠지게 된다고 말한다.

‘배움’의 의미, 다시 생각해보기

가르칠 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배울 권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울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교육적 배려일 수 있다. 그래서 클라크 교장 선생님의 처신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배움’의 의미를 재정의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대학에 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 또는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제반 기술을 익히는 것만이 배움이 아니라고 정의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현상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 반응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린 왕자에게는 오천 송이 장미꽃이 아니라 자신이 정성 들여 길들였던 한 송이 장미가 중요했다. 그러므로 학생의 머리에 지식을 쏟아부어서 무엇인가를 배우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본다면 배움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경험의 현재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배움이라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현재화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역량이며,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그 경험의 의미를 극대화할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배울 권리’에 대한 정의 또한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배울 권리’를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학습하는 권리(Illich, 1970 :29)’로 재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성숙’의 의미, 다시 생각해보기

‘미성숙’에 대해서도 다른 정의가 가능하다. 성인들의 ‘가르칠 권리’를 확대 적용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들이 미성숙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Dewey의 철학에 근거해서 미성숙을 바라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즉 미성숙을 앞으로 발달하고 성장할 가능성으로,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보면 미성숙은 결코 ‘결핍’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채워주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어떤 것 또한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당한’ 경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본’ 경험이 반복되고 누적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 해지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르칠 권리가 아니라 배울 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들이 현재는 성숙하지 못하지만, 성숙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가능성을 살려줄 수있는 권리, 그러니까 ‘배울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배울 권리는 교사나 부모가 없어도 충족될 수 있다. 하지만 가르칠 권리는 배울 권리를 전제로 해야만 성립한다. 즉 배우는 일은 혼자도 가능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대상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칠 권리를 가진 사람은 배울 권리를 가진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는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배우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관계적 자아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교사의 존재는 학생에 의해 확인되고 의미부여를 받는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사라는 존재는 없으며, 학생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교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학생은 교사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교사의 가르칠 권리는 학생의 배울 권리보다 우월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학생의 배울 권리에 의해 제한받는 권리라고 볼 수 있다.

가르칠 권리는 배울 권리를 전제로 성립한다고 해서 가르칠 권리가 배울 권리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르칠 권리는 매우 중요한 권리이며, 그러므로 그 권리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는 권리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는 함께 가야 하는 권리라는 점이다.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가 손을 잡은, 첫 번째 경우

영화 <홀랜드 오퍼스>(Mr. Holland's Opus, 1995년, 감독 S. Herek)의 홀랜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로큰롤을 가르친다. 교감 선생님은 로큰롤은 학생들에게 혼란을 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브람스, 모차르트, 스트라빈스키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홀랜드 선생님은 스트라빈스키야말로 러시아 혁명기의 음악가였다고 말하면서 “전 음악을 가르칠 뿐입니다. 베토벤에서 로큰롤까지요. 음악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인다.

고전음악 대신 로큰롤을 가르친다고 해서 자동으로 훌륭한 음악 교사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배울 권리와 교사의 가르칠 권리를 만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가르칠 권리와 배울 권리가 손을 잡은, 두 번째 경우

영화 <위험한 아이들>(Dangerous minds, 1995년, 감독 N.J. Smith)의 주인공 존슨 선생님은 9년 동안의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아카데미 클래스’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아카데미 클래스는 문제아를 모아놓은 학급이다. 그래서 존슨 선생님은 처음부터 다양한 문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간다. 문제아들이 “죽고 싶다(We want to die)”나 “죽음을 선택한다(We choose to die)”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런 문장을 국어 시간에 활용한다.

식당 메뉴를 이용한 학습을 시도하기도 하고 밥 딜런의 노래를 활용하기도 한다. 밥 딜런의 노래를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전 가수인 밥 딜런의 가사는 저항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학생들의 반항적인 성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딜런 토머스의 시를 가르치기 위해서 밥 딜런의 노래를 가르친다.

존슨 선생님의 교수 방법에 대해서 다양한 평가를 할 수 있다. 매우 비교육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학생들의 경험과 요구에 맞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존슨 선생님의 노력에 성원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평가를 받든 지 관계없이 홀랜드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나는 존슨 선생님이 두 가지 권리가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한 점을 높이 산다.

‘배울 권리’와 ‘가르칠 권리’가 함께 가야 하는 권리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교사들이 많다.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1967년, J. Clavell 감독)의 태커리 선생님이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90년, P.Weir 감독)의 키팅 선생님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그 두 가지 권리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 그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주체가 교사일 수밖에 없으며 어떤 경우든지 최후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 역시 교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교육의 모든 과정이 그렇듯이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것 또한 그 과정 자체가 ‘예술’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은 머리로 이해하는 예술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고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예술이다! 예술가로서의 교사의 위상이 다시 한번 굳건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