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 교육학박사, 중학생과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다

둘째 아이가 중학교를 배정받았을 때, 동네 사람들은 좋은 학교에 배정받았다고 축하해 주었다. 자녀를 그 학교에 보내고 있거나 이미 졸업한 자녀를 둔 학부모들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어떤 점에서 그 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하는지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특목고를 많이 보내서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학교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젊고 유능한 선생님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 모두 자신의 관점과 이익에 비추어 학교를 좋다고 평가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그 학교에 대한 평가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우리 아이는 특목고에 갈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특목고 입학생을 많이 배출한다는 점은 나에게 그리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다른 이유도 과연 그런지 궁금하였다.

학교 배정을 받은 후 예비 소집일에 학교를 가보았다. 교실에서 임시 담임교사가 학생들을 향해서 내뱉는 육두문자를 듣고 깜짝 놀랐다.

‘좋은 학교라더니 선생님이 처음 보는 학생들에게 험한 말이나 하고 말이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담!’

학교에 대해 가졌던 좋은 감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이의 학교생활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학부모 활동에 참여하면서 내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동네 사람들 말대로 좋은 학교인 것 같았다. 학교 분위기도 좋은것 같았고,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선생님들의 표정도 밝고 활기차 보였다. 학부모 연수에서 뵈었던 교장 선생님도 진취적이고 유연한 생각을 지니신 분 같아 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교장 선생님과 교사, 학교 시스템 전반이 학생을 위하는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 초에 들었던 노골적인 육두문자도 중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아이들을 적응시키기 위한 선생님의 의도적이고 과장된 제스처였다고 생각하니, 학교가 풍기고 있는 좋은 학교 이미지에 별반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다.

크게 거부감 없이 어느새 나도 학교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는 내내 나는 기회가 된다면 이 학교는 어떤 점에서 좋은 학교인지, 왜 좋은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등을 연구해 보고 싶었다. 다른 학부모와 교사도 그렇게 느끼는지도 궁금했고, 다른 학교 학부모들의 생각과도 비교해 보고 싶었다.

다른 중학교에 다녔던 첫째 아이 때와는 다르게 느끼고 있는 나의 이 만족감의 실체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잊혀 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궁금해했던 실체의 단편을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날은 우리 아이가 속한 반이 급식 도우미를 하러 가는 날이어서 나는 다른 학부모와 함께 학교 급식실에서 급식 도우미 활동을 하였다.

학부모 급식 도우미는 선생님을 도와 아이들을 줄 세우고, 다 먹은 식판을 제자리에 두도록 안내하고, 다음 학년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렇게 매일 학부모 3~4명과 교사 3~4명이 함께 급식 지원 활동을 한다.

며칠 동안 급식 도우미 활동을 하며 나는 학생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급식 지도를 하는 선생님들의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내가 받은 인상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친하다’라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아이들과 그날의 식단에 대한 이야기부터 얼마전 치른 중간고사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웃으며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학생들은 손 등에 스티커도 받으며 즐겁게 식사를 마무리하였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친근한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던 나는 집에 돌아와서 내가 받은 인상을 나의 첫째 아이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첫째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와, 정말? 선생님이 애들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래? 우리 학교랑은 정반대네. 우리는 학생부 선생님들이 나와서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서 거기 앉지 못해?’라고 맨날 소리 지르면서 급식 지도하는데!”

나는 이 말을 통해서 둘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실마리를 확인했다. 그것은 ‘친(親)함’이었다.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친밀함이 있었기 때문에 전교생이 이동하며 급식을 하는 복잡한 가운데에서도 선생님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지 않고도 급식 지도가 가능했던 것 같다.

비록 두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배경과 여건이 다르고 급식 지도라는 제한된 상황을 통해서 들여다본 것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볼 만한 열쇳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형식적인 말과 명문화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다. 말로 가르치고 말로 대답하고 말로 평가한다. 엄한 말, 즉 교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점을 받거나 징계를 받는다. 말을 잘못하거나 잘못 받아들이면 칭찬의 말이 폭력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

말과 규칙의 이면에는 어떤 사람들의 사정과 살림살이가 들어 있다. 그 사람들은 친한 사람들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는 사람들이다.

어떤 규칙이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그 사람들의 삶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규칙의 필요성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고 강요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그 규칙과 문장을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명문화된 말들과 규칙들은 그 사람들 자신이나 마찬가지다.

말의 기본은 ‘대화’이다. 상대방을 알고자 하고 나를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의 활동이다. 대화에서는 무게중심이 양자 모두에게 같다.

어른과 아이의 대화라고 하더라도 어른이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어른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아이를 마치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래서 아이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충분히 대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움직일 경우,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통제가 된다. 한쪽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억압이 될 수 있다. 대화는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대화를 통해 인간은 통제나 조종의 대상이 아니라 연합과 창조의 주인공이 된다.

대화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말이 달라진다. 말투가 달라지고 선택하는 어휘가 달라진다. 말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말의 횟수가 달라진다. 말할 때의 낯빛이 달라지고 몸짓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애정이 어린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가 나온다. 물론 대화에서도 단호할 때가 있고 물러서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때도 대화의 당사자들은 그 이유와 목적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대화 참여자들은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하기보다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나 규칙을 바꾸기에 앞서 학교, 아이들, 학부모들 사이에 ‘대화적 삶’이 회복되어야 한다. 학교나 교육 정책의 실패는 단지 규칙이나 정책 자체의 결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기적인 목적에 따른 통제와 맹종, 무관심과 외면 같은 것들 때문에 학교는 학교대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또 그들대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더 친해지기 위해서 더 많이 소통하고 더 많이 듣고 더 자주 마주 앉아야 한다.

급식 시간에 보여준 선생님과 아이들의 친밀함은 지속적인 대화로부터 온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실제로 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어떤 방식으로 대화하는지는 직접 관찰하지 않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를 통해서 듣는 이야기 속에서, 또 내가 학부모로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속에서, 대화의 그림자를 본 것 같다. 학교의 커튼을 살짝 들추고 그 속에서 오고 가는 내밀한 속삭임을 엿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