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 한울고등학교 교장

 

시작하는 말

자연과학도로서 교육에 관해 완전 까막눈인 채로 무작정 교육학과 대학원생이 되었던 1979년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가 신간 한 권이 눈에 꽂혔다.

에베레트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였다. 당시에는 잘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줄을 쳐 가면서 읽었다. 그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식이나 잠재력을 계발해주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불합리한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신화를 주입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사망선고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이후 세계 각국의 학교 교육은 확대일로를 걸었다. 우리나라도 70~80년대를 거치면서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의 완전취학이 실현되었다.

학생과 학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학교에 들어가려 했고 이름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국내외의 많은 학자나 정치가는 이러한 교육열이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칭송하였다. 그야말로 학교의 전성시대였다.

그런데 90년대에 들면서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학교의 군대식 통제 문화에 매우 순응적이던 학생들이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는 이례적으로 학생 자살이 급증했고1), 뒤이어 학교 중도탈락자가 급증하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자발적 중퇴자2)가 급증하고, 강제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 두발과 복장 규제에 대해 전국의 학생들이 집단으로 저항하는 운동3)이 전개되었다.

2010년대는 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펼쳐졌다.

1) 한국교육신문사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새교육》 1993년 7월호는 당시의 상황을 ‘한국교육의 총체적 위기’로 진단하였다.

2) 징계로 인한 퇴학이나 자퇴가 아니라 입시 위주의 교육이나 체벌 등의 비민주적 학교문화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학교를 그만둔 경우를 말한다. 이들은 학교 밖에서 다양한 형태의 탈학교 소모임을 하기도 하고 비인가 대안학교에 진학하기도 한다.

3) 90년대 후반 강제 보충수업이나 각종 인권침해에 반발하여 ‘학생인권회복회’가 결성되었고, 2000년 무렵에는 온라인에서 두발규제 반대에 서명운동이 벌여졌으며(16만여 명 참여), 이를 계기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이종태, 2017).

다음으로, 철옹성 같던 학교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 움직임이 나타났다. 90년대 초부터 학교 안팎의 교육운동가들이 대안적 형태의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방학이나 방과후 또는 주말을 이용하여 입시 준비가 아닌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1997년 3월 비인가 형태의 간디학교 설립을 계기로 대안적인 전일제 학교 설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흐름은 당시 대대적인 교육 개혁을 추진하던 정부와 만나면서 1998년부터 대안교육 특성화학교라는 새로운 제도를 낳게 되었다. 이후 제도권 안과 밖에서 기존 학교와는 다른 방식의 교육을 추구하는 다양한 대안학교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90년대 말에 불거진 ‘학교붕괴’ 현상은 이러한 흐름의 결론 격이었다. 1999년 한 방송사가 몰래카메라로 찍어 방영한 수업 장면은 혼란스러운 교실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학교붕괴’ 담론이 급부상하였다(전교조, 1999).

이후 정부나 교육청에선 학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을 내렸지만, 학교의 전성시대는 끝나고 있는 느낌이다.

흔들리는 학교

외형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학교는 아직 건재해 보인다. 일 년에 60조 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고 40만 명의 교사들이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PISA 평가에서도 최상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속내도 그럴까? 내 눈에는 속 빈 강정처럼 보인다.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는 학교 교육이 내놓은 결과에 대해 학생도 부모도 사회도 별로 만족스러워하지 않은 지 오래다.

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 아이가 교장실로 나를 찾아왔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지만 매사에 적극적이고 밝은 표정이어서 모든 교사가 예뻐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뜻밖의 부탁을 하였다. “교장 샘, 저 위탁생으로 보내주시면 안 돼요?” 아이가 보내달라고 하는 학교는 도내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위탁학급을 운영하고 있었다.

“네가 고민이 많구나. 그래, 무엇 때문에 그러니?” “학교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왜 이것을 배워야 하나 싶고, 아이들이 욕하고 장난하는 꼴도 보기 싫어요.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그냥 당분간 내가 하고 싶은 활동에만 몰두하고 싶어요.”

지금 어느 학교에든지 이런 학생들이 무수히 있다. 그들에게 학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장소일 뿐이다. 수업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고, 또 알아듣는다 해도 별 관심이 없다. 결국 그들의 생각과 몸은 게임이나 즉흥적인 소비성 오락으로 향한다.

성인들은 으레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학교에서 수업 참여는 기본이고 교사들의 지시에 직접 토를 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당연하다고 여겨온 이 불문율이 요즘의 학교에서는 상당히 무너져 있다. 성적 우수자를 선발하는 일부 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고나 특성화고에서는 일반화된 현상이라고 봐도 좋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선천적 학습능력 결핍이나 가정 해체로 인한 학습 결손 탓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제법 학습 능력을 갖춘 아이들도 이런 무의미감을 갖는 이유는 아이들이 배워야 할 내용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현행 학교 제도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인터넷과 SNS 등에서 다양한 정보와 오락 프로그램에 무한대로 노출된 아이들이 학문 분야별로 잘게 쪼개진 교과의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일에 흥미를 느낄 리 만무하다.

교육 당국은 오래전부터 교사들에게 학생들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수업 방법을 적용하도록 독려했다. 교과 재구성이나 융복합 수업, 체험을 곁들인 수업 등이 그것이다. 혁신학교에서는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2015 개정교육과정이 핵심역량 중심으로 편성되었다지만, 국·영·수·과·사 중심의 교과체제와 각 교과의 시간 배당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들의 인식이나 관행도 문제이다. 물론 현행 교육과정과 학교 상황에서도 정말 의미 있는 수업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교사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배적인 형태는 다인수 학급이든 소인수 학급이든 교사가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일제식’ 수업이다.

50분 수업에 10분 휴식 구조도 수업방식의 다양성을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든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75분 수업도 하고 블록 수업도 하지만, 이런 시도는 대부분 교사나 교장이 시도하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새로운 시도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은 STEAM과 같은 융복합 수업의 길을 터줌으로써 학교 현장에서 기존의 시간표를 넘어 창의적인 수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재직시절 교사들에게 기존의 틀을 완전히 넘어 선 새로운 학교교육과정을 구상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기존의 교과 체제와 시간표에 익숙한 교사들에게 그런 시도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새로운 상상력 자체가 발동되지 않는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단절도 심각한 수준이다. 진정한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인격적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임기 4년 동안 학교 안에서 보고 들으면서 ‘그러한 만남이 과연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만 키웠다.

내가 있던 학교는 ‘부적응 학생들을 위한 공립 대안학교’였다.

학생들은 온갖 종류의 어려움을 가진 혼성집단이었다. 일상적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 조울증과 자학증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아이들, 부모와의 심리적 단절로 대화조차 하지 않는 아이들, 공부라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상당수의 아이….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깊은 관심과 배려였다.

특히 한 아이의 현재 상태가 어떠하고 그의 말과 행동이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 배경이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그 학생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전제 요건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나의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다. 교사들에게 학생은 그저 학생일 뿐이었다. 특히 여리고 예민한 아이들은 세심한 배려와 함께 때로는 가슴으로 끌어안는 진한 사랑이 필요하다. 속내를 보이지 않은 채 방황하는 아이들의 경우 그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전략적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는 나의 바람일 뿐 현실에서 그러한 감동적인 사례를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내가 교사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현재의 학교라는 공간을 교육적으로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교직도 직업 중 하나다. 하지만, 교직은 수많은 아이의 인생에 알게 모르게 깊이 개입하는 특수한 직업이다. 이 점에서 교사를 일반적인 노동자로 보는 견해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교사의 말과 행동은 학생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사들은 학생들이 말 잘 듣던 시절의 교사와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이들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달라져 있는데도 말이다. 이 괴리가 오늘의 학교 위기, 무기력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학교를 다시 살리는 길은

어떤 미래학자들은 머지않아 현재와 같은 학교는 없어지거나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하지만 미래 사회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지금과 유사한 교육기관은 존속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의 학교가 미래에도 의미 있는 교육기관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학교가 학생들의 삶에서 유의미한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눈을 가진 아이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과 공부를 위해 땀을 흘리는 학교. 그러한 학교는 꿈이 아니라 이미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

널리 알려진 미국의 공립 대안학교인 메트 스쿨은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교과별 수업 시간표가 없다. 학생들은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인턴십과 개인별 학습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간다.

그 결과는 경이로울 정도이다. 학년별·교과별 수업 상황에서는 낙오 수준이었던 아이들이 이 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혁신학교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이 관심이 있는 프랑스의 프레네 학교는 지극히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아이들의 실생활과 연관된 수업 진행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다. 독일의 헬레네랑에 종합학교 역시 개인의 자유로운 작업을 통한 학습을 실천한다.

50년 역사를 가진 미국의 알바니 프리스쿨은 평범한 아이들을 대도시의 환경 문제 해결과 같은 큰 프로젝트에 도전하게 함으로써 자존감과 역량을 키워나간다.

이들 학교의 공통적인 것은 기존의 분과학문에 기초한 교과를 기본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훨씬 뛰어난 학습 성과를 낸다는 점이다.

모든 배움은 아이들의 실생활과 내적 욕구에서 출발한다. 당연히 비교 평가도 없다. 아이들의 공부는 오로지 자신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교사는 이 과정을 안내하고 지원할 뿐이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삶의 현장이자 배움의 장소이고 행복한 일상이 펼쳐지는 놀이터이다.

우리는 왜 이러한 학교를 만들지 못할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육과정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교사 문제이다.

먼저 교육과정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간단히 말해서 국가교육과정은 모든 학생이 배워야 할 지식의 내용과 순서를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다.

산업화 시대에서 학생들은 그것을 금과옥조로 삼아 배웠고, 그 결과에 따라 취업을 하고 주어진 일을 처리하였다. 하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와 학습 수단이 넘치는 지식기반사회가 되면서 선험적으로 정해진 교과 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시대적 적합성도 떨어졌다. 다수의 아이가 외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내에서도 일부 교사들은 배움의 공동체나 거꾸로학습 등의 새로운 수업 전략을 통해 아이들의 학습 흥미와 참여를 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강고한 국가교육과정의 구조 속에서 부분적이고 간헐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교과 구조를 넘어 아이들의 삶과 직결된 학습을 시도하는 것은 아예 꿈조차 꾸기 어렵다.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비인가 대안학교들은 이런 시도를 자유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는 그들에게 학력 인정도 재정지원도 해주지 않는다.

현행 교사 제도의 문제도 심각하다. 현재의 교사들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교과 교사이다. 특히 중등교사들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교과로부터 자유로운 교육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이들이 재미없어하는 교과 지식을 전달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나라 교사 양성대학의 교육과정이 그렇게 되어 있고 지금까지 학교에서 하는 일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교사는 아이들에 대한 심층적 이해나 아이들을 위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을 자신의 업무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몸담았던 대안학교에서 그런 역할이나 프로그램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지만, 교사들은 그것을 다른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두 사람의 상담교사나 진로교사가 전체 학생의 생활 지도나 진로 지도를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이러한 상황이 대다수의 교사에게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있으며 스스로 변화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공부를 잘 안 하려는 것이 교직 생활을 좀 더 피곤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뭐 세상이 그런 걸 난들 어쩌겠나’ 하는 태도로 보인다. 질적으로 달라진 아이들을 대하는 이러한 태도는 학교의 무의미성과 무기력증을 심화시킨다.

가능성 유무를 제쳐두고 말한다면, 우리나라 학교를 살리는 길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긴급 처방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선 국가교육과정을 폐지하거나 아주 느슨하게 만들어야 한다.

말로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면서도 진작 없앴어야 할 1차 산업혁명기의 교과 구조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교사양성대학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현재의 교육학 체계나 개념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며 교사 자격증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교과 지식의 전달로 국한된 교사의 역할이나 기능도 재규정되어야 한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면서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유연한 교육과정 제도와 학교 시설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사 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 나는 운 좋게 예산을 확보하여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진로체험 실습 공간(‘꿈 공작소 해봄 센터’)을 학교 안에 마련해 놓았다. 그곳은 수업공간인 동시에 학교 안의 ‘작업장 학교’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교사를 임용하여 장돌뱅이처럼 순환시키는 제도는 국가주의 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교사 신분 보장을 위한 좋은 제도이지만, 교사의 나태를 초래하고 학생이나 학부모를 영원한 을로 만드는 부작용이 심각하다.

교사는 기본적으로 학교 단위로 임용해야 하고 한 곳에서 장기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번 임용으로 정년이 보장되기보다는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주기적인 재신임이 필요하다.

교장은 현행 승진제도 대신 별도의 훈련과정을 통한 자격증 부여와 이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제로 임용해야 한다. 서양의 여러 나라처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유능한 교장을 뽑고 그 교장에게 인사권을 부여하되 학부모와 지역사회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지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맺음말

얼떨결에 교육학도가 된 지 거의 40년이 되어 간다.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했고 한때는 교육이 아닌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내 버리지 못했던 관심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교육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현재의 상태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동안 여러 대안교육 현장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정책에 목말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글에서 제시한 두 가지의 긴급 처방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의 학교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실은 훨씬 더 많은 변화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실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완강한 기득권 구조와 변화에 따른 혼란 가능성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은 교육이 망하고 나라가 망해도 움켜쥐고 있는 권한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을 설득해 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국가와 혁신적 학자 집단의 엄중한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