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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교육] 식민지 교육의 이해
월간교육 | 승인 2017.07.26 10:35

글.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1. 추한 한국인

몇 년 전 《추한 한국인》의 실제 저자인 국수주의 일본 논객 가세 히데아키는 그 후속편을 계획하면서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매우 훌륭한 교육을 했고, 특히 식민지 주민들을 위해 교과서까지 편찬한 것은 어느 식민지 교육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내용을 부각하겠다고 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그 목적이야 어떻든 일제 통치하에서 우리나라의 교육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고 거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현재 대다수의 교육사 책에는 일제하에서 학교 수나 학생 수가 많이 증가했으며, 그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일제는 식민지 교육 기간 내내 학교의 설립을 제한하였으며, 교육 기간을 축소하기에 급급하였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1906년 8월 일제는 갑오개혁에 의해 공포된 모든 교육령을 폐지하고, 식민지 교육을 위한 대체 법률을 공포하였다.

즉 기존의 소학교령을 보통학교령으로 개정하여 기존의 수업연한 6년을 4년으로단축하였으며, 중학교령을 고등학교령으로 바꾸어 7년의 수업연한을 3~4년으로 축소하였다. 중학교의 교명을 ‘고등학교’로 바꾼 것은 더 이상의 교육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일제는 보통학교 4년, 고등학교 3~4년으로 식민지 백성의 최종 교육으로 삼으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4년제 상공학교도 2년으로 감축하고, 4~5년 과정의 외국어 학교의 수업연한도 3년으로 단축하였다.

또한 통감부 설치 이후 전국 120여 개의 소학교 중 23개 교를 폐쇄하고, 시설이 비교적 좋은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로 개편한 뒤, 이를 두고 학교를 ‘신설’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와 함께 1908년 「사립학교령」을 통해 전국 5,000여 개의 사립학교 중 절반도 안 되는 2,241개만을 인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쇄하였다.

그나마 이들 사립학교도 일제하에서 계속된 탄압으로 일부 선교계 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쇄되어 1940년에는 271개만 존속할 수 있었다.

2. 식민교육에 대한 바른 이해

그렇다면 일제하에서 학교와 학생 수의 증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제 통감부 설치 이후 우리의 교육여건 또한 크게 악화하였다. 개화기 공립소학교의 경우 학급당 법정 정원은 40명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30명을 기준으로 삼아 그 이상이 되면 학급을 증설하였다. 이것은 서당이나 서원, 향교 등 우리의 전통교육기관의 운영에서 알 수 있듯이 학생 수가 30명이 넘으면 교육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06년의 「보통학교령」을 통해 학급당 학생 수를 60명으로 규정하였다. 실질적으로 일제하 보통학교의 학생 수는 학급당 평균 73.4명의 과밀학급이었다. 이후 학급당 60~70명이 넘는 과밀학급이 우리의 전통인양 이어져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교육전통이 아니라 바로 일제 식민지 교육의 잔재인 것이다.

일제는 「보통학교령」을 통해 학급당 정원을 증대했을 뿐만 아니라그동안 무상이었던 수업료 징수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취학기회를 억제하였다. 수업료는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매달 40~80전으로 그 액수가 결코 적지 않았으며, 수업료 외에도 교과서값 60전, 모자값 1원 70전 등을 별도로 징수하여, 보통학교 학생 연간 교육비는 최소 20원 이상이 소요되었다.

1930년대 한국인 노동자의 일일 평균 임금이 90전으로 한 달에 25일 일한다고 해도 22원 50전에 불과하였으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의 경우 연간 총수입이 70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과도한 교육비로 수업료를 체납한 학생들과 중도 퇴학당하는 학생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1930년과 1931년 전라북도 15개 군을 대상으로 한 표본 조사에 따르면 수업료 체납자는 1930년 23.3%, 31년에는 22.8%이고, 그로 인해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은 1930년에 9.6%, 31년에는 10.3%에 달하였다.

수업료가 장기간 체납될 경우 일제는 「조선학교비령」에 따라 학부모의 자산을 압류하는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압류품은 식량은 물론 밥솥이나 제기 등에까지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밀린 수업료를 상환토록 하였으며, 심지어 2개월 치 체납된 수업료 1원 40전을 징수하기 위하여 논을 경매에 부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왜 일제하 우리 국민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려고 하였을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심층적인 원인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치하에서 자녀교육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우리 국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경제 정책의 근본은 토지를 극소수의 대지주에게 집중시켜, 고액의 소작료를 통해 한국을 식량 공급기지로 만드는 식민지 지주제였다.

이러한 정책하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계속된 소작료의 인상에 따른 극심한 생활고는 농사를 계속한다는 것이 더는 합리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가 자녀의 학교 교육이라는 판단이 학교 교육에 대한 집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학교 입학경쟁은 치열하였다. 1927년에 보통학교에 입학을 지원한 아동은 10만여 명이었으나 8만 5천 명만이 합격하여 84.8%의 합격률을 보였다. 이러한 경쟁은 해가 갈수록 심해져 1936년에는 합격률이 51.4%까지 떨어져 지원자 중 절반만이 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한국인의 교육열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1920년대 이후 일제의 서당에 대한 탄압과 3.1운동 실패에 따른 좌절감 등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교육열이 서당에서 보통학교로 이관되어 보통학교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대되었음에도 일제는 보통학교의 확대 설립에 극히 부정적이었다.

이에 한국인들은 지역 단위로 ‘보통학교 증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면 단위로 4년제 보통학교를 신설하는 것으로, 보통학교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면민 스스로 조성하여 총독부에 보통학교 설립을 인가해 달라고 청원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보통학교 증설운동에 대해 일제는 ‘간이학교제’로 대응하였다. 즉 수업연한 2년에 80명 정원의 1개 학급만을 설치할 수 있는 간이학교로서 조선인의 교육열을 무마코자 하였다. 더구나 간이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나 6년제 보통학교에 연결되는 기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종결교육기관이었다.

비록 교과목은 수신과 일본어, 조선어, 산술과, 직업으로 되어 있었으나, 교과 시수의 1/3이 직업훈련이었으며 교육시설이나 교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간이학교 교사들에 대해 “모래를 담은 쟁반으로 글자를 배우고 미루나무 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루어지는 한, 필묵이 갖추어지지 않아도 교육 교수는 가능하다”고 강변하였다.

3. 황민화 교육의 정체

일제하 식민교육의 목표는 이광수가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라는 글에서 “아주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했듯이 일제에 충실한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모든 교육환경을 충량한 황국신민의 육성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내용으로 변화시켰다.

그 첫 번째 작업은 우리말을 일본어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령」에서 일본어가 우리말과 같은 비중으로 들어간 이후, 1909년 4월 일제는 각 학교령을 다시 개정하여 우리말을 한문 과목과 통합시켰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조선어 수업시간은 일본어의 절반으로 단축되었다.

「제1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된 1911년 이후 일제는 우리말을 조선어로 일본어를 국어로 변경하고, 일본어의 수업시수를 조선어와 한문을 합친 수업시수의 두 배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제3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을 수의 과목으로 전락시켜 실질적으로 조선어를 학교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후 모든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 학생들에게 각종 제재를 가하였다. 이 때문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무의식중에 조선어를 입 밖에 내어 낙제하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으며, 조선인 교원은 나이가 많은 학부형이 학교에 찾아와 조선어로 말을 했다가 교장에게 알려져 즉각 좌천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국어상용카드’를 나누어주고 조선말을 하는 학생을 먼저 발견하는 학생이 이를 빼앗도록 하여 학기 말에 이를 확인하여 상과 벌을 주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 밖에서도 일본어의 사용이 강제되어 소위 ‘보도연맹’이라는 것이 있어 학생들이 조선어를 사용하면 불러서 야단을 치거나 학교에 알려 단속하게 하였다.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연맹에서는 한술 더 떠서 소위 ‘국어 상용의 가(家)’라고 하여 집안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집을 선정하여 표창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부 친일파 인사들은 집안에서 5, 6세 된 자식들과도 일본어만 쓰고 이것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제3차 조선 교육령」 이후 일제는 모든 학교를 병영화하여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부과하였다. 모든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은 신전 조회(神前朝會), 수요일은 교련 조회, 그리고 화, 목, 금요일에는 보통 조회를 개최하여 매일 조회가 이루어졌다.

특히 교련 조회 시에는 보통학교 아동들에게도 열병과 분열과 같은 정식 군사훈련을 시행하였으며, 일본군이 직접 군사훈련을 검열하기도 하였다. 또 목검을 이용한 ‘황국신민의 체조’와 건강 체조, 건국 체조 등의 다양한 훈련을 매일 시행하였다.

황민화 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조치는 모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에 대한 우상화였다. 따라서 모든 학생에게 천황의 궁성과 신사, 교육칙어 및 천황의 사진을 비치한 봉안전, 이른바 천조대신을 모셨다고 하는 신붕(神棚), 그리고 교실마다 전면에 걸도록 조치한 천황궁성 사진, 흥국위인 초상액자, 황국신민서사, 일장기, 일장정신 10개 조 등에 대해서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도록 의무화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일과는 이들 상징물에 대한 우상숭배 의식인 경례로 시작해서 경례로 끝났다.

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하여 교문에서 5~10m 정도 들어서면 이러한 상징물에 대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가장 정중하게 몸을 굽혀 절하는 사이게이레이(最敬禮)를 해야 하였다. 이후 손뼉을 두 번 친 후 “대일본제국과 황국신민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교실에 들어가야 했다.

또 교실에 들어갈 때나 발표를 위해 교단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일본궁성사진을 향해 경례해야 했으며, 하교 때에도 “천조대신과 봉안전 덕분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라는 감사의 뜻으로 절을 해야 했다.

조회를 비롯한 각종 의식에서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이른바 궁성요배와, 신사가 있는 쪽을 향해 절하는 신사요배를 해야 하였으며, 조선인 학무과장 김대우가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만든 ‘황국신민의 서사’를 낭독해야 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는 어린이용과 어른용 두 가지가 있었는데 어린이용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 합니다.

3)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됩니다.

황국신민 육성을 위한 우상화 훈련은 다양한 학교행사일을 통해 반복하였다. 보통학교의 경우 조회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월중 행사가 있었다.

국체명징일(매월 1일, 15일), 애국일(매월 1일), 부국저금일(매월 10일), 근로보국대 봉사일(매월 6일 및 적당한 날), 전교 체육일(매월 10일), 자치실행회(매월 첫째 일요일), 폐품회수헌금일(월 1회), 인고 단련일(매주 토요일), 근로봉사일(매주 수요일), 용의 학용품검사일(매주 토요일), 열단(閱團) 분열식(월 1회), 소년검도회(월 1회), 신사참배(매일), 국기게양일(1일, 15일, 축제일, 기타), 위인제 등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각종 행사로 실제 학교 수업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빈약한 수업시간도 1929년 개정 공포된 보통학교 교육과정의 ‘직업과’ 교과의 도입으로 상당 부분은 풀베기 등의 노력 봉사로 채워졌다.

직업과 교육은 일제가 1920년대의 교육을 소위 ‘독서교육’이라고 비판하고 이러한 독서교육이 헛된 사상의 전파와 과격한 발언의 확산으로 이어진다고 간주했다. 때문에 조선 인민의 우민화 정책의 하나로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그들은 이를 ‘교육실제화 정책’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직업과의 도입으로 보통학교 학생들은 매주 2~3시간씩 풀베기, 가축 돌보기, 실습지 청소 등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시간이고 실제로는 이를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방과 후에나 방학 중에도 ‘직업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노역에 동원하였다.

특히 태평양 전쟁 도발 이후에는 모든 남학생을 비행장, 공장 등에 근로 동원하고, 여학생은 학교에서 위문대 제작, 군복 깁기, 위문편지 쓰기에 동원하였다.

황민화 교육의 가장 극단적인 정책은 역시 창씨개명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어용단체였던 ‘녹기 일본문화연구소’에서 주도한 창씨개명은 교원을 포함한 공직자와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강요되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교원으로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창씨를 하지 않은 학생은 아예 받아 주지도 않는 학교도 있었다.

4. 전통교육의 단절

일제 식민교육으로 인한 최대 피해는 우리 전통교육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전통교육의 장점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제 식민교육을 우리의 전통교육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통적 교사상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적 교육이 스승에 대한 존경(尊師)에서 비롯되고, 이에 따라 교사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전통적 교사상의 파괴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강제 병합 직후인 「제1차 조선교육령」 하에서 일제는 모든 교사가 군복을 입고 각반을 차고 군도를 찬 채로 교실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복장은 문무(文武)구별이 엄격했던 우리의 문화에서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일반인들의 교사관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교육방법도 모든 것이 지시와 명령으로 이루어졌으며, 전통적 교육방식인 개별식·토론식 수업이 아니라 주입식·획일식 수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부터 이러한 군대식 복장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교사들의 군사적인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교사들에게는 일제 식민교육의 첨병으로서의 해야 할 역할이 강요되어 결코 학생들이 존경하는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우리는 일본 신민이다’, ‘우리는 우리말을 절대로 쓰지 말자’, ‘우리는 일본에 충성하자’, ‘일본의 것은 무엇이나 좋다’,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정치는 무엇이나 다 옳다’, ‘우리가 총독 정치를 비평하는 것은 죄다’, ‘조선 민족적 사상이나 민족적 운동에 감염되거나 참가하면 국민이 아니다’ 등의 발언을 하는 교사들을 학생들은 결코 존경할 수는 없었다.

1933년 경성의 한 공립중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이 일본인 교장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3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60여 명의 학생이 퇴학을 당했다. 그때 조선인 교원 한 사람은 퇴학당한 학생들의 억울함을 동정하였으나 교내에서는 한 마디 반대의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조선인 선생이라고 믿고 그의 사택을 방문하여 직원회의 결과를 물었을 때 그는 자기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을 고백하고 학생들 앞에서 울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교사가 어떻게 학생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등 전 세계가 다시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극우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극우 보수주의자 아베가 집권하여 한반도의 갈등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어설픈 위안부 합의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국중심주의와 민족주의는 치유해야 할 ‘질병’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에는 국경이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모든 민족과 집단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다. 화해의 기본 전제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가 월간교육 7월호에 기고한 글을 재게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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