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할 때 토론을 한다. 토론을 질서 있게 잘 전개하면 문제를 푸는 길을 함께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주장이나 이론의 타당성 혹은 확실성의 여부를 밝히고자 할 때도 토론을 한다. 특히 토론이 옳은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이루어지면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많은 문제의 해답을 얻기도 한다. 토론은 비록 해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결을 위한 올바른 가닥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토론은 이처럼 제대로 전개되기만 하면 우리의 일상생활, 사회생활, 학습활동, 연구 활동 등에서 문제 해결의 좋은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이에, 에듀인뉴스는 이돈희 발행인(서울대 명예교수, 전 민족사관고 교장)이 제안하는 '논쟁식 토론의 학습과 수업 전략'에 관해 8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글 · 이돈희 前 민족사관고 교장

토의와 토론은 다른 말인가?

전통적인 일제식 수업의 형태는 학교 교육의 현장에서 크게 줄어들고, 관찰, 실험, 토론 등의 방법으로 탐구적 활동이 수업에 동원되는 비중이 높아가는 현상을 보인다.

토론식 형태만으로 모든 학습을 다 할 수는 없지만, 토론은 학습자체의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성을 배양하며 사고의 개방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토론의 원리가 표준화되어 어떤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략적 긴장이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면 주입식 혹은 암기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여기 연재하고자 하는 것은 ‘논쟁식 토론’에 관한 것으로서 필자가 민족사관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던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여섯 개의 항목을 각기 두 차례로 나누어 다루게 되며 모두 12회로 연재한다.

토의와 토론은?

토론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토론’과 ‘토의’를 엄격히 구별하려고 시도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물론, 어떤 표현에서 ‘토론’이라는 말 대신에 ‘토의’라는 말을 쓰면 어색한 경우가 있다. 토의와 토론은 의미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식목일을 휴무일로 정할 필요성에 관해서 토의했다”라는 말에서, ‘토의’라는 말 대신에 ‘토론’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지만 의미는 다소 다른 것 같다.

‘토의’는 그냥 의견을 나누는 수준에서도 쓰는 말인 데 비하여 ‘토론’은 다소 의견의 차이나 약간의 대립, 그리고 의견을 교환(찬성, 반대, 논박 등)하는 다소 형식적 규칙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최근의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기 위해서 어느 지역을 조사할 것인가를 두고 우리는 함께 토의했다”고 한 표현에서 ‘토의’라는 말 대신에 ‘토론’이라는 말을 쓰면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이 경우에,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약간의 대립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 대립을 해소하거나 승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다소 형식적인 규칙을 지키면서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전략에 관해서 장시간 토의를 했다”고 한 표현에서 ‘토의’ 대신에 ‘토론’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아무런 무리가 없고 또한 의미상의 차이를 찾기도 어렵다.

구태여 꼭 구별하고자 한다면 이런 정도를 밝혀볼 수는 있다. 우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을 ‘토의’라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 중에 의견의 차이가 있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애쓰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때, 이러한 분위기는 ‘토론’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의하다가도 토론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고, 토론을 하다가도 토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을 ‘토의’라고 하고 어느 순간을 ‘토론’이라고 할 것인가를 구별하기도 어렵거니와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토의’와 ‘토론’은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 말로 보고 맥락에 따라서 어색하지 않게 골라서 사용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토론의 원리와 토의의 원리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토의는 약간 느슨한 토론이라면, 토론은 약간 긴장된 토의라고 할 수 있다.

토론은 옛날부터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함께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거나 사실의 진실 여부를 엄격히 검토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하였거나 분분할 때도 토론을 한다.

토론을 질서 있게 잘 전개하면 문제를 푸는 길을 함께 찾아낼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주장이나 이론의 타당성 혹은 확실성의 여부를 밝히고자 할 때도 토론을 한다.

토론을 통하여 각 가지의 증거와 추리의 과정을 엄격히 검토하면 더욱 충실한 결론을 얻기도 한다. 물론 토론을 통하여 해결하거나 밝혀낼 수 없는 문제도 있다.

그러나 토론이 옳은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이루어지기만 하면 해결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많은 문제의 해답을 얻기도 한다. 비록 해답을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결을 위한 올바른 가닥을 잡는 데 도움을 준다.

토론은 이처럼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전개되기만 하면 우리의 일상생활, 사회생활, 학습활동, 연구 활동 등에서 문제 해결의 좋은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일상적 토론과 암묵적 규칙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토의’ 혹은 ‘토론’을 하면서 살아간다. 심각한 것이든지 하잘것없는 것이든지 간에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고,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있으며, 그 주제나 문제를 두고 다소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 우리는 토의 혹은 토론을 하는 셈이다.

때로는 조용한 어조로, 때로는 격렬한 어투로, 때로는 서로 협조적인 태도와 자세로, 때로는 서로 공격적인 표현과 몸짓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문제가 잘 해결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되어 더욱 복잡해지고 해결하기 어려운 경지로 빠지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우연으로 시작하게 되는 토론에서는 감정대립, 인신공격, 폭력사태 등과 같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를 자주 낳기도 한다.

이런 일은 왜 생기는가? 가장 큰 이유는 일상적 대화나 언쟁에서는 효율적인 토의나 토론을 하는 ‘합의된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토의나 토론의 과정에서 지켜야 하는 올바른 규칙이 없으면, 우기는 사람이나, 목소리 큰 사람이나, 힘센 사람의 주장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아니면 끝없는 언쟁과 비난, 욕설하면서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할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 말리는 사람이 없으면 싸움은 계속된다.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토론에서도 주제에 관한 생산적인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고 문제를 진지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서로가 공유하는 규칙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가 있는가? 이 경우는 비록 이야기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명시적으로 확인된 규칙은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들이 서로 성의를 다하여 노력하면서 지키려는 ‘암묵적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반드시 형식적으로, 명시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토론의 현장에서 설정하거나 확인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일종의 관습으로 함께 인식하고 있는 규칙, 그리고 별도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수용하고 있는 규칙이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으면, 이야기는(혹은 토론은) 물이 흐르듯 어려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가 있다.

이런 규칙들은 일부러 확인할 필요가 없지만 실제로 지켜지고 있거나 그렇게 요청되고 있으므로 ‘암묵적 규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암묵적 규칙으로 이런 것들을 들 수 있다.

상대방의 인격, 가치관, 자존심, 지위, 권위 등을 모독하거나 손상하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든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대방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조리 있게, 불쾌하지 않게, 차근차근하게, 겸손하게, 신뢰를 보이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한다든가, 상대방의 발언을 방해하지 않고 인내를 다 하여 끝까지 듣고자 하는 성의를 보인다든가, 발언을 독점하여 중언부언하면서 장황하게 말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등이다.

우리는 수시로 크고 작은 토론을 하면서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부부 사이에도, 형제나 친척이나 친구 사이에도, 때로는 모르는 사람과도 우연히 토론해야 할 일이 발생한다.

일상적 상황에서 토론을 효율적으로 하는 사람은 다른 상황, 예컨대 공공적 사업이나 학술적 연구에서도 좋은 토론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토론의 능력과 자질을 학습하여 잘 훈련된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나 세련된 토론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상대하는 가족, 친구, 친족, 동료, 이웃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반목하고, 적대하는 관계가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대화와 토론의 암묵적 규칙을 제대로 내면화하지 못하여 거칠고 무례한 표현이나 악의적 언사를 무책임하게 내뱉은 데서 연유한 결과라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러한 암묵적 규칙의 내면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 교육이나 경험을 통하여 기회 있는 대로 명시적 규칙들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여 습관화하면 일상생활에서의 대화나 토론에서도 그 규칙들이 암묵적 수준에서 작용하여 논쟁이나 토론의 세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사회적 토론과 제도적 규칙

우리는 사회생활, 특히 제도적 조직의 생활에서 토론을 정식으로 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임하게 된다. 비근하게는 반상회, 동창회, 교회, 학회, 친목회, 그리고 각종 동호회 등의 조직에서부터 학교, 회사, 정부, 국제기구 등에 이르기까지, 그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목적으로 토론을 해야 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지키는 암묵적 규칙 이외에 대개 정관, 회칙, 법령, 관습, 전통 등의 ‘제도적 규칙’이 있어서 토론이 필요한 경우에 이를 적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한다. 규칙이 없으면 토론은 진행될 수가 없다.

크고 작고 간에 제도적 조직은 규칙들로써 그 목적과 체제와 기능이 설명된다. 예를 들어 어느 학교의 동창회라는 것은 누구나 그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모임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창회의 목적, 회원, 조직, 사업 등에 관한 규정은 그 동창회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규칙이다.

그 규칙을 지키지 않고서는 동창회가 유지될 수 없다. 사업을 계획하거나 예산을 세우거나 임원을 선출하거나 할 때, 어느 것이든지 그 조직에서 정한, 혹은 상식이나 관례에 따른 규칙에 의존하여 토론하고 의결한다.

토론의 과정에서 아무나 발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거론되는 모든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아니다. 총회에서 토론할 수 있는 주제가 있고 간부회의에서 논의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 그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목적을 실현하거나 문제의 해결을 위한 토론은 바로 그 제도적 규칙을 준수하는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제도적 규칙은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암묵적 규칙과는 성격상 다르다. 물론 어떤 조직에서 우연히 혹은 정례적으로 이루어지는 토론이 반드시 제도적 규칙만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 규칙들은 수없이 많은 암묵적 규칙들과 더불어 조직 속의 토론을 지배한다. 스포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야구라는 게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우리는 야구의 규칙으로 설명한다. 야구 게임은 두 팀이 대결하며, 한쪽이 공격할 때 다른 한쪽이 수비하고, 시합이 진행되는 동안 활동하는 선수는 한 팀에 아홉 명이며, 공격 측에서 세 선수가 아웃되면 공격과 수비의 팀을 교체한다는 등의 규칙들을 들면서 설명하게 된다.

야구에서의 규칙은 전문가가 아니면 전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야구를 정식으로 하는 셈이 아니다.

야구가 진행되는 도중에 심판의 판정에 문제가 생겼다든가, 어느 쪽이 부정한 방법으로 경기했다든가, 경기 도중에 소나기, 관중의 난동 등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면, 그 상황에서 유리한 쪽과 불리한 쪽이 있게 되고 토론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때의 토론도 규칙을 언급하면서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가지 이상의 규칙이 적용되는 수가 있고 그러면 어느 규칙이 우선하느냐의 시비가 있을 수 있다. 해결은 어디까지나 규칙의 적용에 의하지만 규칙의 권위적 해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도 토론을 필요로 한다.

토론은 반드시 계획된 시간과 장소에서 정해진 주제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체나 회사나 정부는 추구하는 가치, 수행코자 하는 과제,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등이 있는 한, 언제나 토론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조직의 장이 행사하는 독재적 통제와 명령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혹은 심각한, 형식적 혹은 비형식적, 우연적 혹은 계획적 토론이 거의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학술적 토론과 윤리

과학에서나 철학에서나 간에 무엇을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토론의 장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이 어떤 연구에 임할 때,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 가설은 아무런 선행 연구도 없는 진공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이론 혹은 법칙에서 유도된 새로운 발전적 가설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려는 비판적 가설이다. 이 가설을 내세우는 연구자는 기존의 이론 혹은 법칙과 연관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학술적 대화 속에 임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서 토론의 시작을 의미한다.

가설의 검증(혹은 부정의 실패)은 타당성을 전제로 하는 근거나 논리로 제시되며, 이 과정은 기존의 이론 혹은 법칙을 상대로 하는 토론의 장에 있는 셈이다.

철학적 연구의 경우도 과학적 연구와 본질에서 다를 것은 없다. 다만 다루는 내용과 방법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과학적 연구는 사실에 관한 이론 혹은 법칙을 세우려는 노력이며 검증 혹은 해석의 방법을 통하여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에 비하여, 철학적 연구는 의미나 논리에 관한 것이며 논증 혹은 이해의 방법을 통하여 주장을 정당화한다. 철학의 경우에도 그 연구가 진공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 혹은 주장된 이론에 대한 분석, 이해, 검토, 반론, 비판 등으로 제시되며 성격상 그 이론과의 대화 혹은 토론의 장을 만들게 된다.

과학자나 철학자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에 있어서 허위를 용납하거나 전개하는 논리의 과정에서 범하게 된 오류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동료나 이웃의 잘못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학술적 연구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학술적 연구자는 어떤 이론 혹은 연구에서 허위, 오류, 모순 등이 발견되면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할 의무가 있다. 물론 이러한 학술적 비판은 상대방의 인격, 권위, 경험 등을 무시하는 어조가 섞인 비판이 아니라, 순수하게 증거와 논리와 방법을 중심으로 오류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두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무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암묵적 규칙으로서 이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연구자의 기본적 윤리에 속한다. 이처럼 학술적 연구는 그 자체의 일차적 특징이 토론의 장에 있다는 것은 뜻한다.

물론 연구자들이 임한 토론의 장은 얼굴을 서로 맞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토론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이론이나 의견과의 학술적 대화 혹은 토론의 맥락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를 다 할 수가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