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평가, 상대평가 논쟁을 보고

수능을 절대평가화하자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대선공약이기도 하고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낙연 총리는 며칠 전(2017. 08. 03) 총리주재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교육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절대평가를 연도별로, 과목별로 순차적으로 도입하고 지금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2021년도부터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준비기간이 길어져 어느 정도 혼란에 대비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육현장에서의 파행을 단시일내에 해결하자는 교육부의 주장과 배치된다. 그렇지만 수능의 절대평가화는 많은 교육적 함의를 품고 있으므로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절대평가는 사전기준에 구속되고 상대평가는 응시 대상자의 총 수에 구속된다.

절대평가는 모두가 사전기준을 통과할 수도 있고 아무도 통과못할 수도 있다. 그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물수능 불수능 소리가 나오고 아이들은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낙거리게 된다.

한편 상대평가는 평가대상자 총 인원에 맞추어 강제배분하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퇴서를 쓴다.

결국 교육평가제도를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두 가지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이라면 이 두 가지가 가진 문제점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필자는 이런 교육현장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능 자체를 버리라고 주장해오고 있지만 반향은 없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절대평가건 상대평가건 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은 감수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딱한 일이다. 세상에 극복못할 문제라는 게 있을까.

수능 같은 것 없이 학생들을 선발해 잘만 가르치는 나라가 부지기수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들은 수능시험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지 않는다. 물론 대학별 고사도 없다. 정 있다면 문제지가 우리나라에 나돌아다니지 않을 리가 없다.

대학을 최초로 만들고 발전시키고 세계에 보급한 유럽은 대학생들을 선발하는 데 시험을 보아 그 성적에 따라 뽑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유는 물론 많지만 그중에서도 시험이라는 것은 결국 암기력 측정이 되고 말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암기력이란 새로운 가치의 탐색이 아니고 기존가치의 답습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서구의 대학들은 학습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고등학교 성적을 참고하기는 한다. 그러나 스스로 출제를 하고 테스트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아이들이 시험에 올인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하지만.

결국 이런 차이는 대학을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대학을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보고 있고 우리는 대학을 신분제조창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학 4년을 실력을 배양하는 기간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지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한순간에 좌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수능의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 하는 문제는 서구의 대학에서는 전혀 논의한 바도 없고 논의될 수도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풀기 어려운 숙제로부터 그렇게 벗어나면 안 될까.

그것은 원점으로 돌아가 ‘우리에게 대학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나아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