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돈희 前 민족사관고 교장

전통적인 일제식 수업의 형태는 학교 교육의 현장에서 크게 줄어들고, 관찰, 실험, 토론 등의 방법으로 탐구적 활동이 수업에 동원되는 비중이 높아가는 현상을 보인다. 토론식 형태만으로 모든 학습을 다할 수는 없지만, 토론은 학습자체의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성을 배양하며 사고의 개방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그러나 토론의 원리가 표준화되어 어떤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략적 긴장이 없이 방만하게 운영되면 주입식 혹은 암기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여기 연재하고자 하는 것은 ‘논쟁식 토론’에 관한 것으로서 필자가 민족사관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실천하던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여섯 개의 항목을 각기 두 차례로 나누어 다루게 되며 모두 12회로 연재한다.

대화로서의 토론

토론은 대화의 한 방식이다. ‘대화’라는 말은 좁게 이해하면 아무런 긴장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경험을 말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물리적 대결이나 고성에 의한 언쟁 대신에 대화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성인의 자질로 여긴다.

그러나 넓게 이해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를 매체로 하여 생각, 정보, 지식, 신념, 의견, 주장, 사상이 교환되는 모든 상황을 ‘대화’라고 하면, 토론도 대화의 한 ‘장르’이다.

때때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비언어적 매체인 음향이나 신호나 그림이나 제스쳐 등으로 어떤 의미를 주고받으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도 상징적 혹은 은유적(隱喩的) 대화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거기에도 어떤 주장이 있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거가 따르고 있다면 매우 느슨한 의미의 토론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서 나오는 독백(獨白)에서와 같이 마음속으로 어떤 문제의 해답이나 결론을 얻기 위한 체계적인 성찰이나 집요한 추론을 계속한다면, 이것 또한 내심(內心)의 토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계적인 사고는 마음 안에서 ‘나와 나’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토론인 셈이다.

토론에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산만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 다른 대화의 형식과는 달리 명확한 주제가 설정되어 있거나, 반드시 명시적인 주제가 아니더라도 참여한 모두가 분명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주제는 해결을 요청하는 문제의식을 고취시키며, 해결을 위한 주장은 사실의 확실한 증거나 논리의 엄격한 규칙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토론은 간혹 서한(書翰)이나 논단(論壇)을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토론은 다음에 설명할 ‘형식적 토론’에 비교하여 ‘비형식적 토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한식 토론

사람들은 어떤 논제를 두고 의견이 다른 두 사람 혹은 다수가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하는 ‘서한식 토론’을 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서한식 토론의 예는 많이 있지만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선 시대의 성리 학자인 이황(퇴계)과 기정진(고봉) 사이에 있었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이다. 이(理)와 기(氣)의 관계에 관하여 젊은 학자 기정진(奇正鎭)은 당시 노학자인 이황(李滉)을 상대로 대단한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기정진은 대선배 학자에 대하여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예의를 지키면서도 엄격한 논리와 분석으로 자신의 주장을 폈고, 이황은 젊은 학자의 치밀한 도전에 대하여 그 주장을 상대로 하여 성의와 인내를 다하여 토론에 응하였다.

이러한 서한식 토론은 서로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진행되는 토론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지, 토론자가 준수해야 할 암묵적 규칙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셈이다.

서한식 토론은 회신 혹은 반론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논단식 토론’은 논박 혹은 회신을 반드시 기대하지는 않는다.

논자는 그냥 불특정 다수 혹은 전문가 집단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주장을 편다. 논박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간혹 그러기도 하지만 논박 혹은 회신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논설, 칼럼, 비평, 혹은 학술지 등에서 어떤 학설, 이론, 정견, 주장 등을 비판하거나 지원하거나 해석하거나 하는 글들은 일종의 논단식 토론을 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논박이나 회신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토론이라고 할 수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정해진 구체적 대상은 없지만 논자가 펴내어 주장하는 주장이나 메시지는 독자의 생각과 주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와 전제가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토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형식적 토론과 형식적 토론

이러한 비형식적 토론에 비하여 ‘형식적 토론’은 종국적으로 토론의 상대방이나 제3자의 동의, 혹은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려는 전략으로 진행되며,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정한 기회를 제공받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토론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어떤 의견을 논박하여 물리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리고 결론의 도출을 명백히 겨냥하는 경우도 있고 결론을 유보한 채로 대화 혹은 언쟁이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1) 결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여러 가지의 의견을 수렴하는 ‘협의식 토론’(Conference),

(2) 결론을 유보하면서 온갖 의견들을 수렴하는 ‘뇌뢰식(腦賴式) 토론’(Brain-Storming),

(3) 결론을 유보하면서 반대 혹은 대립의 의견을 공격하거나 비판하여 이를 물리치려는 ‘논쟁 식 토론’(Debate),

(4) 결론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서 적대적 관계에 있는 대상을 상정하고 있는 ‘음모식 토론’(Conspiracy) 등이 있을 수 있다.

위의 네 가지 중에서 교육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해 볼 수 있는 형태는 협의식 토론과 논쟁식 토론이다.

일상적으로 ‘토론’이라는 말이 다소 느슨하게 사용될 때는, 대체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보다 합리적이고 타당한 해결의 방법을 위하여 여러 가지를 함께 검토하면서 의견을 모으는 ‘협의’ 혹은 ‘의논’을 뜻한다.

그러나 다소 엄격하게 사용될 때, ‘토론’은 어떤 사상, 이론, 정책, 의견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로 양분된 상태에서의 경쟁적, 비판적, 공격적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논쟁’을 의미한다.

‘협의식 토론의 특징’에 참여한 사람들에겐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면 어떤 발언이나 주장도 허용된다.

예컨대, 어느 학급에서 소풍의 목적지를 협의하는 경우에 누구든지 좋은 곳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의견으로 제시해 볼 수 있고 왜 좋은 곳인지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 혹은 의견이 다른 누구의 의견과도 반드시 대립하지 않아도 좋으며, 어떤 의견에 대해서 꼭 논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른 의견을 반대하고 논박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나 논박도 자신의 주장을 펴는 과정에서 우연적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문제는 긴박하게 해결해야 하지만 의견이 분분할 때, 대개 교사나 사회자는 토론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고 다수결로 결정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권위(예컨대, 특별위원회)에 해결을 위임해 버리기도 한다. 협의식 토론은 집단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반영하고자 할 때 흔히 취하는 방식이다.

난상토론(爛商討論)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논쟁식 토론의 특징

이에 비하여 ‘논쟁식 토론’은 주제와 문제의식과 규칙이 매우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토론의 형식을 가진 것이다.

논쟁식 토론에는 어떤 문제나 의제에 대하여 찬성론과 반대론이 있다. 양론이 서로 상대편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면서 자기 측 주장의 타당성 혹은 정당성을 명확한 증거와 엄격한 논리로써 입증하고 상대를 승복케 하려는 전략과 기술을 동원한다.

대립된 주장이 서로 긴장된 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참여자의 동기나 집념이 강하고 논리의 엄격성과 사실의 확실성을 내세우면서 집요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잘 활용하면 수업의 방법으로 매우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도하는 토론도 있지만 그런 것은 교육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거기에는 합의된 규칙이 없어 발언의 기회가 공정하게 관리되지 않으며, 주장의 타당성과 확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임의적이어서 성공과 실패를 분별하기 어렵다.

논쟁식 토론을 교육적으로 활용코자 할 때, 대개 (1) 하나의 문제를 두고 (2) 상반된 의견을 가진 양측이 동등한 의견진술의 기회를 가지게 하는 것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논쟁식 토론은 학생을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쪽이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을 펴면, 다른 쪽이 반론을 제기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찬성론이나 반대론은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체계적으로 파악 하여 정연한 논리로 조직하고 설득력 있는 논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 하여야 한다. 찬성론과 반대론의 지지자들은 이에 참여하여 토론을 활발하고 생산적이게 한다. 발표되는 내용은 사전에 준비토록 하여야 학습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토론 학습과 사고력 연습

토론식 학습은 학교의 수업 상황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흔히 교사들은 토론해 볼만한 주제를 설정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도록 분위기를 유도하여 활발한 토론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학생은 그러한 수업을 통하여 주제와 관련된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업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토론의 방법적 전략을 잘 세우지 못한다거나 학생이 토론의 규칙과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오히려 전통적인 강의식 혹은 주입식 수업보다 효과적이지 못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분위기가 잡히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하면, 흔히 교사는 그 침묵을 깨기 위하여 억지로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도록 종용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 자발성과 확신이 없는 학생들은 교사와 함께 조바심만 일으킬 뿐이고 좀처럼 생산적인 토론을 경험하지 못한다.

반대로 비록 교실이 요란할 정도로 활발한 토론이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산만하고 잡다한 주장과 생각이 어지럽게 난무하기만 하면, 잘 정리된 지식을 질서있게 가르쳐 주는 교사의 강의식 수업보다 나을 것이 없다. 오히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수업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필자도 대학에서 30년이 넘도록 교육철학 강의를 해왔지만 토론을 시도해서 별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 대개 토론할 제목은 예고되어 있으나 학생들은 준비가 부실하고, 토론의 절차와 기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초점없이 방만한 수업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토론을 중심으로 수업을 하고나면 학생들은 체계적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학습으로 끝나버려 별로 배운 것이 없는 수업이 될 수가 있다. 그리하여 토론보다는 교수가 준비한 체계적인 강의를 듣게 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수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하는가? 아마도 수업에서의 토론을 빈 머리로 시작한 데서 실패의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학습상황에서의 토론은 ‘빈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토론될 내용이 충실하게 준비된 수준에 있지 않으면, 학생들은 수업에서 별로 깊이가 없는 의견만을 교환할 뿐이고, 때로는 부질없는 말싸움만으로 끝나버릴 수가 있다.

토론수업은 그냥 제목만 두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서로 논박하는 것만으로는 학습의 생산성을 높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좋은 수업을 하자면 사전에 토론할 주제에 관한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하고, 토론에서 의견과 발언을 공정하게 제공하기 위하여 진행하는 형식과 규칙이 체 계적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논쟁식 토론’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 맞는 토론수업의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적 원리를 제공해 준다.

학습할동에서의 토론은 사고력의 연습이다. 어떤 사실이나 가치나 정책에 대하여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확인하고, 쟁점을 발견하여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세우며, 비판에 대비하여 논거를 확실히 하고, 반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훈련하는 학습의 장이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습이 없이 배운 지식은 많은 경우에 맹목적으로 수용된 것으로서 자신이 소화한 것이 아닌, 즉 설익은 정보일 따름이다. 토론은 혼자서가 아니라 학급 속에서 동료와 함께, 서로의 도움으로 사고력을 학습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