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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돌아보기] 내가 만난 '페스탈로치'(상)
월간교육 | 승인 2017.09.27 10:28

“정들었던 학교를 뒤로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 반년이 되었다. 30대 중반에 입직하여 비록 남들보다는 조금 짧은 교직 근무 기간이었지만, 좋은 일은 남들보다도 더 많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많은 좋은 일 중에서도 참으로 행운인 것은 이 시대의 페스탈로치를 만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 유종도 前 언주중학교 교장

얼마 전 여름휴가지에서 우연히 김 선생을 만났다. 지난봄에 보고 몇 달 만에 만났으니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서로가 반가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저녁 찬거리를 구입하기 위해 나섰다가 마트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늘 격식을 갖춘 점잖은 차림의 모습만을 보다가 피서지에 어울리는 간편하고 시원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한결 더 친근감이 느껴졌다.

김 선생과 나는 같은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 나는 생활담당 교감이었고 김 선생은 생활지도부장이었다. 한 교무실에서 지냈고 업무상으로도 수시로 협의할 일이 많다 보니 직위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은 나보다는 나이가 3살이 적다. 그런데도 나는 늘 김 선생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 있었다.

내가 교장으로 첫 발령을 받은 것은 2010년 9월 1일이었으니 꼭 7년전의 일이다. 오랫동안 해 온 학교 일이었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그저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느 때에는 교장이라는 자리가 매우 외롭고 어색하기까지 했다.

이러던 차에 초보 교장이었던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학교 현장에서 일체의 체벌을 금지한다는 ‘체벌금지’ 뉴스가 흘러나온 것이다. ‘체벌금지’ 정책이 발표되자 학교 현장은 혼란스러웠다. 수업과 생활지도 면에서 특히 걱정이 많이 되었다. 여러 선생님과 머리를맞대고 고민하였으나 그럴수록 머릿속만 더 복잡해질 뿐 시원한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고민을 하던 어느 날, 몇 년 전까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김 선생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김 선생과 내가 함께 근무했던 학교는 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ㄱ 고등학교였다. 김 선생은 그런 ㄱ 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이나 생활지도부장을 맡아 큰 사건사고 없이 업무를 잘 수행해오고 있었다.

ㄱ 고등학교는 과거에 전국적으로도 이름을 떨치던 명문학교였다. 서울에서도 네 손가락 안에 들던 학교가 평준화 정책 이후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더 자존심 상해하던 이들이 이 학교 동문이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던 ㄱ 고등학교 동문회를 중심으로 학교 살리기(?)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학교를 살릴 신통한 방법을 찾기는 쉽지않았고,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가운데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생활지도부장 자리는 그때에도 3D 업종이라 하여 교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학년말이 되면 생활지도부장 구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ㅇ 선생이 생활지도부장을 자진해서 맡겠다고 나섰다. 학교로서도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 하는 구석이 있었다.

ㅇ 선생은 ㄱ 고등학교 출신으로서 평소에도 위기에 처한 모교를 살릴 방법을 늘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구원투수를 자청한 것이다. ㅇ선생은 먼저 기본 생활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지각없는 학교, 흡연 없는 학교, 핸드폰 없는 학교’ 등 3무(三無) 학교 만들기에 힘을 기울였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소위 ‘교실 붕괴’가 ㄱ 학교라 하여 예외일 수 없었다. 학생들의 두발과 복장이 말이 아니었고, 지각과 흡연은 물론이고, 수시로 담을 넘고, 수업 중에는 자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학생들을 상대로 ‘3무(三無)’를 아무리 강조해도 ‘쇠귀에 경 읽기’였다.

참다못한 ㅇ 선생은 급기야 물리력을 동원하였고, 불과 한 달 만에 학교를 거짓말같이 완전히 바꿔놓기에 이르렀다. 수업 분위기가 살아나고, 생활지도가 제자리를 잡아가자, 자연히 모든 것이 점차 나아져갔다. 그러자 처음에는 방관하던 여타의 교직원들도 함께하였고,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뭉친다는 동문회가 발 벗고 나서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이렇게 몇 년이 흐르는 동안 ㄱ 고등학교는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연임(連任) 기간을 다 채운 ㅇ선생이 타교로 전근을 가야 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그렇게 되자 학교 안팎에서는 ‘이제 ㄱ 고등학교는 또 다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파다하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 궁리하였으나 모처럼 일으켜 세운 학교의 명성을 지켜나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서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지도부장을 맡게 된 이가 바로 김 선생이었다.

새로 생활지도부장이 된 김 선생은 ㅇ 선생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인격적으로 대했다. 그러는 데도 학생들은 전보다도 더 교칙을 잘 지키고 있었으니 모든 사람이 그 비결을 궁금해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김 선생의 허리에 찬 만보계(萬步計)를 보게 되었다. 오후 3시경이었는데 무려 2만 보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김 선생의 행동을 관심 두고 살펴보게 되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교내뿐만 아니라 학교 밖까지 순찰을 하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학생을 상담하거나 교실로 직접 올라가서 학생을 만나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상담 내용은 주로 교칙을 위반하거나 격려가 필요한 학생과의 약속을 잡고 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약속을 다시 잡고, 이를 수첩에 기록하고, 이렇게 확인하는 일을 무한히 반복하였다. 이러다 보니 학생과의 약속 내용 등을 빼곡히 적은 업무 수첩을 해마다 2권씩이나 쓰고 있었다.

1,500명이 넘는 남자 고등학생들을 생활지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회초리 한 번 사용하지 않고,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러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진정으로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ㄱ 고등학교에서 근무를 마친 김 선생은 그 후로도 2개 학교에서 생활지도부장으로 초빙을 받아 근무하였고, 가는 곳마다 학생을 인격적으로 지도하였고, 회초리를 사용하지 않고 큰소리도 내지 않는 지도 방법 역시 한결같았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김 선생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김 선생 이야기를 하곤 한다. 김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의 페스탈로치였다고······. 그리고 교직 생활에서 김 선생을 만났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 김 선생의 교육 에피소드는 10월호에 계속 됩니다.

월간교육  edum@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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