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공훈 학벌카르텔 대표

교육개혁은 교육행정가나 교사나 학부모에게 맡겨질 일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도 신중하게 검토되고 가능한대로 반영해야 하지만, 그것은 낮은 차원의 개선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교육개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교육개혁이고 누가 교육을 개혁해야 하는가.

군사용어에 전략과 전술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는 그 용어가 일반사회에 널리 쓰이고 있다. 전략이라는 말은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 쓰이고 전술이라는 말은 국지적으로 영향을 미칠 때 쓰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말을 교육에 대입하면, 그 교육적 주장이 국가의 성격과 방향과 운명에 영향을 미칠 정도면 그것은 교육개혁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고 부분적이거나 한시적이거나 지역적일 때는 교육개선 혹은 교육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법은 교육에 대한 수많은 주장을 간단히 구분 짓게 할 것이고 나아가 그 가치의 실현을 도울 것이다.

반대로 그런 구분을 하지 않으면 어떤 주장이 있다고 할 때 그 주장의 효용범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된다.

예를 들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평가방식을 절대평가로 할 것인가 상대평가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수험생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평가방식은 교육과정의 여러 단계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컨대 고등교육을 국가가 관여하지 말고 무책임화하자는 필자의 주장 같은 것은 그 영향력으로 미루어 보건대 국가의 성격과 방향과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수준의 주장은 교육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국가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교육개혁을 누가 맡는 게 좋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는 적어도 교육행정가나 교사나 학부모들은 아니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국가운명에 개입할 만큼 안목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어 보인다.

국가운명에 영향을 미칠만한 교육개혁안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됐고 또 그래야 한다고 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필그림파더처럼 나라를 세운 국가건설자이거나 그들의 사상을 승계한 자들, 그리고 국가의 구조와 기능을 천착하는 헌법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들과 경세가들이 그들이다.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굳이 얘기하는 이유는 교육행정가들이나 교사나 학부모들이나 생각이 깊지 않은 교육개혁운동가들이 잡다한 주장을 펼치면서 정말 중요한 교육개혁안들이 파묻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동안 거창하게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된 것들 대부분이 혁신이나 개선 수준에 불과한 것인 경우가 많아 보여 누군가가 이를 구분 지어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교육개혁의 지체와 이완이 생길 수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교육적 주장이 개선이나 혁신에 관한 것이 아니었나 싶고, 정부수립 이후에 교육개혁이라고 할 만한 것은 50년대에 실현한 초등학교 무상교육 시행과 60년대에 실시한 중학교무시험입학과 고교평준화제도 도입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 이외의 것으로 교육개혁이라고 내세울 만하지 못하다. 교육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되는 것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교육이 외형은 커졌지만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도 필자와 같은 취지에서 한 말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