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윤형섭 연세대 명예교수(전 교육부 장관)

초하(初河) 유성종 박사, 내가 그 어른을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이며 진정한 선비라고 생각하는 데는 내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분의 자제(유승원)가 조심스럽게 보내온 원고청탁서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친은 2008년 2월에 꽃동네대학교 총장직을 임기만료로 떠납니다. 현직에서 50년을 넘긴 일을 자식들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고마워하고 있는데 본인은 늘 민망하고 죄송스럽다하여 취임 때와 같이 퇴임식도 하지 않겠다 합니다. 이런 성품이니 남이 무던히도 권하여 온 자신에 관한 저술도 계속 거부하여 온 터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자식된 도리로서 아버지 모르게 더러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 초하평전(初河評傳)을 엮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닌가. 건국대학교와 호남대학교에서 총장 취임식과 퇴임식을 모두 거창하게(비록 내 뜻은 아니었지만) 치르고 떠난 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바로 이점에서도 나는 그 어른을 따라갈 수 없다.

<2016년 7월 충북도교육청에서 '교육정책 산책' 특강을 하는 유성종 박사. 사진=충북도교육청>

내가 초하선생을 알게 된 것도 비슷한 연유에서이다. 1991년 내가 현직(교육부 장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교육부 장학편수실의 이준해(후 일 서울시 교육감) 실장을 EBS 원장으로 보내고 그 후임을 선임해야 할 일이 생겼다. 모두 내부에서 승진·보임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래야만 교육부내의 인사숨통이 트이고 6~7명이 승진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전국에서 가장 교육적으로 존경받고 행정적으로 유능한 교사 출신을 밖에서 모셔와야 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장학편수 실장은 초중고교 교과서 편찬의 총 책임자이며 전국의 현장 교사에 대한 장학지도의 총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 직책에 부합하는 권위와 능력과 인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로서는 전국에 걸쳐 나의 안테나를 펼쳐놓고 적임자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천 타천이 많았다. 결국 나는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을 낙점하고 그 후속조치를 조규향 당시 차관에게 부탁하였다. 조 차관의 설득이 주효하여 나로서는 소원을 성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초하 선생과 나의 인연의 시작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한국교총회장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교육계의 거물급 명사들을 대충 아는 입장이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유성종 충북교육감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 교총 회장 때도 그랬고 장관 때도 그랬다.

물론 전국교육감회의 같은 공식적인 회합에서는 몇 번 정도 악수를 하였겠지만 기억도 안 나거니와 개인적인 만남, 더군다나 사적인 접촉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품격과 능력에 확신이 있었다.

1957년 이후 1991년까지 34년간에 걸친 그의 교육 및 행정경력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고교교사, 학무국장 그리고 교육감, 한결같이 교육과 교육행정으로 일관했다. 그 모두 한결같이 충북교육위원회 관내에서의 일이었다.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이 '16년 6월 청주교대에서 열린 충북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 토크쇼에 참석해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진=충북도교육청>

특히 그는 교육감(6, 7대)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 있으며 삼선의 여망을 물리치고 그럴 뜻이 없음을 일찌감치 선언해버렸다. 교육자로서의 정체성과 진정성이 없었다며, 그리하여 가는 곳 마다 그처럼 능력을 높이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의 경력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정석대로 전개될 수 있었겠는가. 교육외길에서 한 발자국도 옆길로 샌 일이 없다.

내가 1992년에 교육부를 떠난 후에도 그는 장학편수 실장으로 반년 간 더 근무하더니 교육부 국립교육평가원장(차관급)으로 영전한 바 있다. 1993년 그는 중앙정부의 고위관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10년간 교직에 몸을 담았는데 그 직책의 전개 과정이 역시 질서정연하다. 즉 주성전문대학의 사회교육원장을 시작으로 주성대 학장, 주성대학 이사장, 다시 주성대 학장을 맡아 고향의 고등교육발전에 이바지하였으니 그의 발자취는 참으로 귀하고도 거룩하다.

초하께서 진정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1999년도에 있었던 사건이다. 일찍이 1969년에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던 분이 어느 날 갑자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 1학년으로 입학하였으니 듣는 이 마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당연히 우수학생, 모범학생으로 교수들의 칭송을 받으면서 2003년 또다시 두 번째의 학사모를 썼다. 그때의 그의 나이 71세이었으니 하늘아래 다시 있기 어려운 감동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참으로 감격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이듬해인 2004년의 일이다. 바로 1년 전의 그 졸업생이 바로 그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2008년 2월에 4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76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앞으로 그가 또 무슨 일로 우리를 감격케 하거나 감동하게 할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앞으로는 노인 복지기관에 나가서 심부름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로 보나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감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쯤 되면 그를 신선이나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그는 정기적으로 나를 감동하게 한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어김없이 도시락 크기의 오곡쌀(840g)이 배달된다. 단양 소백 농업협동조합의 이름으로 나오는 단양 소백산 찹쌀 오곡밥이 그것이다.

온달과 평강의 단양 잡곡이란다. 그의 고향사랑은 이처럼 눈물겹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우리 집 식구들에게 내가 가장 자랑하는 선물이기도 하다. 그 잡곡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그의 애틋한 고향사랑만이 아니라 그의 삶의 철학을 들여다보는 것 같으며 명절을 맞아 그가 온 국민에게 보내고 싶은 교육적 메시지가 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오곡밥이야말로 그의 삶의 철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성 높은 창구라 하겠다.

사람이 한세상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을 자기답게 지키는 일일 것이다. 나라와 사회의 격랑기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외압에 의한 본의 아닌 굴절도, 공리타상에 의한 자의적인 변절도 우리 눈에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우리 시대의 많은 선비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하선생의 일생은 마치 땅 위에 떨어진 씨앗하나가 수직으로 선을 그으면서 하늘을 향하여 기세 있게 뻗쳐 올라가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그만큼 초하는 자신이 공생애의 출발점에서 다짐했던 초심을 끝까지 뻗쳐나갔다.

고향(충북 청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청주상고 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던 1957년부터 오늘날까지 참으로 험난했던 조국과 자신의 역사 속을 뚫고 나오면서 그는 전혀 아무런 굴절도 변절도 없이 오로지 교육자의 길에서 50년을 견뎌왔다.

32세 되던 해에 검인정 고교 교과서를 펴내더니 40세 되던 해에 다시 두 권을 더 추가하였고 끝내는 전국의 초중고교 교과서를 책임지는 교육부 장학편수실장에 올랐다. 말하자면 교과서를 쓰면서 교과서처럼 살아온 우리 시대의 가장 모범적인 진정한 선비라 하겠다.

그의 살아온 발자국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특징이 눈에 띈다. 그가 얼마나 상사로부터는 신임을, 부하로부터는 존경을 그리고 동료로부터는 사랑을 받았는지 한눈에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그의 경력이 그렇게 이어질 수 없다.

비결이 있다면 그가 자기 자신을 정확하고 견고하게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원체 그에게는 아무런 사심이나 야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는 우애와 화합이 꽃피게 되어있다. 그러니 그를 두고 어찌 군자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논어에 일렀으되 ‘군자는 남과 화합하나 똑같이 되지는 아니하고(君子和而不同) 소인은 남과 똑같으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느니라(小人同而不和)’ 하였다. 실제로 나는 한동안 그와 함께 교육부에 근무하면서 그의 그러한 성품을 자주 실감할 수 있었다. 그처럼 나는 언제나 그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