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교육 에피소드

글. 유종도 전 언주중학교 교장

새해가 되면 전 국민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를 나눈다. 양력설과 음력 설 두 차례에 걸쳐 새해 인사를 하다 보니 1월, 2월 두 달 내내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서로 축원해주는 셈이다. 그러는 데에도 정작 복을 받았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복이란 것은 누가 받으라고 해서 받는 게 아닐 터이니 어찌 보면 당연할 것도 같다.

어느 해인가 나이 지긋한 여자 연기자 한 분이 TV에 나와서 했던 새해 인사가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새해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복을 많이 지어 놓았다가 필요한 사람을 보면 나눠주라는 것이다. 내 나름으로는 무척 신선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에게 나눠주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기의 복만큼은 자기가 지어서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로또 복권이 발매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무렵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깊은 탄식의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이번에도 꽝이잖아!!”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얼마 전에 샀던 복권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인터넷 사이트에서 숫자를 하나씩 확인하다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야! 3등 됐다!!”

큰 소리를 냈던 게 화근이 되어 그날은 동료들과 함께 술집으로 퇴근하게 되었고,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이 되어서야 집사람 얼굴을 보았는지 어땠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이실직고하고 당첨금 전부를 상납하고 나서야 아내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손익 계산을 해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첨금은 30만 원쯤이었는데, 술값으로 그 이상이 나갔고, 아내에게는 사죄의 의미로 당첨금 전액을 자진해 냈으니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적자만 났다.

그 무렵 나는 장학사 시험을 준비하던 때라 그 후로는 복권 사는 것을 잊고 지냈고, 장학사 발령 이후에는 또 너무 바빠서 복권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ㄱ 고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났는데, 학교 근처에 꽤 유명한 복권 명당(?)이 있었다. 오래전의 추억도 있고 해서 생각나면 가끔 그 명당 터에 들렀으나 결과는 언제나 빈손이었다.

한참 후에 깨달은 사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좋은 일은 우연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인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잡지를 보면, 그들은 대개가 적어도 몇년간 꾸준히 공(?)을 들인 사람들이었다. 어찌 그것이 복권뿐이겠는가?

어느 가을날이었다. 자율학습 지도를 마치고 퇴근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김 선생을 만났다. 사는 곳이 서로 가까워서 그의 집 근처 포장마차에 들렀다. 즉석 우동으로 허기를 달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중에 땅 얘기가 나왔다. 충청남도의 태안반도 연해에 어느 섬이 있는데, 김 선생이 이곳에 꽤 넓은 평수의 밭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퇴직하면 시골에 내려가 농사짓고 나무 키우는 것이 꿈인 나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그처럼 좋은 위치에 있는 땅을 언제 마련했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여 김 선생을 졸라 다음과 같은 자초지종을 들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가까운 친구 사이라서 수천만 원의 돈을 차용증도 안 받고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아무 때든 돈이 생기면 그때 갚으라는 단 한마디만 하고서······.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찾아왔다. 사업도 접었고 돈도 없고 해서 도저히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면서, 염치없지만 OO도(島)에 땅이 조금 있는데 그것을 빚 대신 받아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김 선생은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땅을 빼앗는 것 같아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김 선생은 오히려 친구에게 그 땅을 팔아서 사업 자금으로 쓰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땅을 받아주지 않으면 더 못 볼 것이라는 친구의 협박(?)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받은 땅이 지금은 유명 관광지로 이름난 서해안 어느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금싸라기 땅이 된 것이다.

김 선생은 ㄱ 고등학교에서 근무를 마친 이후 두 학교에서 연속 초빙 교사로 근무하였다. 김 선생의 열정과 생활지도 방식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여러 학교에서 모셔가고 싶어하였다. 그런 학교 중의 하나가 ㅅ 고등학교이다.

얼마 전 김 선생이 서울 북부에 있는 ㅅ 고등학교에서 생활지도부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수능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밤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는 학생들의 안전 지도를 위해 학교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밤 10시도 훌쩍 넘은 시간이었는데 사복 차림의 한 남학생이 ㅅ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의 손을 잡아끌어 공원의 정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순찰하고 있던 김 선생이 이 광경을 발견하였다. 걱정되어 달려 가보니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여학생의 어머니와 통화하여 확인해보니 둘은 서로 사귀는 사이였고 부모님들도 이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음을 확인하고서 두 학생을 설득하여 귀가하도록 하였다.

그 뒤로 며칠 후 김 선생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10여 명의 학부모가 손뼉을 치면서 맞아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학부모가 감사하다는 말을 특별히 더 여러 번 하였다. 알고 보니 얼마 전 밤길에 공원에서 구해준(?) 여학생의 어머니였는데, 그분이 바로 학교운영위원장이었다.

김 선생은 학년 초부터 거의 매일 밤 심야 자율학습 후 귀가하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생활지도 순찰을 해오고 있던 터였다. 이런 일이 있는 이후로 김 선생의 이야기는 학교 전체에 알려졌고,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타고 온 동네에 퍼지게 되었으며, 멀리에 있는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복을 짓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덕을 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 선생이 갖게 된 OO도(島)의 땅 역시 덕이 되는 일을 많이 해서 받게 된 복이라 할 수 있다.

김 선생이 쌓은 여러 가지 덕 중에서도 으뜸인 것은 생활지도라고 생각한다. 그의 머릿속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얼굴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나지막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학생들을 대했다.

앞에서 소개한 ㄱ 고등학교와 ㅅ 고등학교에서의 사례 이외에도 김 선생은 귀감이 되는 여러 가지 일을 묵묵히 실천해오고 있다. 한편으로 김 선생에게는 남이 부러워할 만한 좋은 일이 생기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승진하여 교감 선생님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회초리를 들지 않고, 큰소리를 지르지 않고’ 학생을 지도한다. 이러한 생활지도 방식은 페스탈로치의 교육방법과 일치하였다. 그래서 나는 김 선생을 이 시대의 페스탈로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가 받은 복들은 많은 덕을 쌓은 데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