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원 전주 완산고 교사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상당수 교육청에서 '미래 학력'을 추진하고 있다. 미래 학력은 교육과정·수업·평가와 관련한 학력관으로 우리나라 교육은 기존의 학력관이 교육의 본질(학생의 성장)을 침해한다는 문제의식에 대응해 등장한 개념이다. 전통적 학력관과 대립하는 미래 학력관을 비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국민과 더불어 공감하는 민주적 시민사회의 바람직한 교육관을 성찰하고자 '박제원의 미래 학력이란'을 연재한다.

박제원 전주 완산고 교사는 고려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을 나와 전북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예탁결제원을 거쳐 2003년부터 전북 완산고에서 사회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전북교육청 사회문화 교재 집필위원, 대입 사회문화 문제출제위원, KDI 경제교과서 집필위원, 중앙일보 공교육논술자문단 등을 역임했으며 학생 및 교사 대상 글쓰기·논술·토론 등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박제원 전주 완산고 교사는 고려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을 나와 전북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예탁결제원을 거쳐 2003년부터 전북 완산고에서 사회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전북교육청 사회문화 교재 집필위원, 대입 사회문화 문제출제위원, KDI 경제교과서 집필위원, 중앙일보 공교육논술자문단 등을 역임했으며 학생 및 교사 대상 글쓰기·논술·토론 등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참' 이란 단어..."공적 기관 교육청에서 쓰면 안돼"

경기·충남·전북교육청이 새로운 학력관을 ‘참된 학력’, ‘참 학력’으로 지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적 관심사가 매우 큰 한국 교육에서 공적기관이 새로운 학력관을 ‘참’이라고 이름 지으려면 기존 학력관과의 차이를 쉽게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거나 ‘참’이 되어야만 하는 논리적 타당성과 사회적 정당성을 갖춰야 한다.

참은 누구나 인정하는 상식이다. 그렇기에 특정한 지식이나 접근방향을 ‘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으로 수용되려면 갖춰야 할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학력관이 자연과학적인 기존의 법칙을 뒤집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논리적인 체계를 갖춘 연구방법론(Methodology)을 쓰고 다수의 경험적 사례를 뒷받침했어도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언술(Statement)이든지 ‘반증가능성’은 열려있는 까닭이다.

언어는 권력적이다. 푸코도 지적했듯이 언어적인 담론(Discourse)이나 언술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지배계급은 특정한 언어적 행위를 ‘진리’로 정하고 사회구성원에게 조직과 제도로써 강제하고, 그들의 권력을 옳다고 말한다. 더구나 ‘진리’로 정한 이외의 언술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분류·배분·순서를 정해 만들어진 언술체계(Structure of Statement)는 개인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순응시키는 데 동원된다. 진리는 항상 권력적이며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언어 속에 숨어 있다.

국민이 주인이며 ‘참’의 속성이 이런 것이라면 공적기관인 교육청이 새로운 학력관을 ‘참’이라고 지칭한 것에 공감할 수 없다. 권력적인 언어인 ‘참’을 보통교육에 쓰려고 했으면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절차적 정의를 따라야 한다.

'참'은 이데올로기적 언어..."사용하기 위한 절차 부재 문제"

교육청은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맥락이나 학생의 배움과 성장에 대한 강한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부조직법 및 지방자치법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이데올로기적인 언어인 ‘참’을 수용하기를 원했다면 더욱 더 국민에게 물어봤어야 했다. 최소한 밀접성이 큰 교사와 학생, 학부모에게 설명하고 반증하는 절차적 타당성이 따랐어야 했다.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이다.

갈등이 깊을수록 세세하게 듣고, 많이 물어봐야 합의는 못하지만 조정할 수 있으며 그런 집단과 사회일수록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간다. 그런데 정말 그런 절차적 정의가 있었나? 그러한 절차도 없이 참 학력(참된 학력)이라고 지칭하는 행위가 교육청만의 권한이라고 말할 수 있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참 개념이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의 형식을 따르고, 그 취지가 ‘더 좋은 교육 및 학교의 지향’ 이라는 맥락(Context)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점이 많다. 국민 하나하나가 교육전문가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교육문제는 민감한데 ‘단 한명의 학생이라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소통가능성이 큰 상식적인 용어를 배제하고 굳이 참이라고 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은 '참'이어도 언젠가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리 정치사를 보면 권력기관이 ‘참’을 강조할 때마다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보듯이 선거로 선출된 권력이라는 이유로 국민을 조작하고 세뇌시키기 위해서 그들만의 참인,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참 교과서’라고 부르고 학교에 채택하도록 강제했다. 그것이 왜 참 교과서인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못하게 했고, 오직 참이니까 따르도록 했다. 그것을 상식이라고 할 수 있나? 그처럼 설득적인 정의를 제대로 된 정의(Definition)라고 할 수 있나? ‘유신’, ‘정의사회’, ‘창조경제’, ‘문화융성’이라는 말은 모두 참을 강조했지만 실상은 거짓이었다.

새로운 학력관이 기존에 참이라고 당연하게 수용했던 초중등교육 학력관을 의심해서 망치를 들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그 계보를 찾아 하나하나 가치를 따져보려고 했다면 더욱 새로운 학력관에 ‘참’이라는 명칭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전통적 학력관의 개념이나 가치에 근본적인 질문을 하려고 했다면 모든 학력관의 상대성을 고려했어야 했다. 즉 새로운 학력관이 지금 참이라고 해도 언젠가 비판적 사고의 대상으로 거짓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청이 국민들에게 그 학력관을 절대적인 진리라는 신화(神話)로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면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언어구조학적으로도 잘못되었다. 지금은 학교에서 수행평가(Performance Assessment)를 공식적인 용어로 쓰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지필평가에 대한 대안평가로서 ‘참 평가(Authentic Assessment)’와 수행평가(Performance Assessment)가 혼용되었다가 ‘참’의 애매 모호성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있자 교육부는 수행평가로 정리했다. 그 용어가 수행평가를 시행하려는 취지를 언어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민주주의 지향 교육용어로 '부적절'

언어의 근본적 기능은 의사소통이다. 어떤 공동체든 새로운 개념을 만들 경우에 가급적이면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익숙한 언어를 선택한다. 그렇기에 수행평가는 새로운 교육활동이었지만 처음 듣는 교사, 학생, 학부모라 할지라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고 수행평가는 보편적인 국민의 언어로서 쓰여 졌다.

그런데도 새로운 학력관에 애매모호한 ‘참’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국민이 새로운 학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 속에 담긴 여러 문제점을 은폐하거나 미화하지 않느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학력관이 비과학적인 종교나 필연적인 자연법칙이 아니라면 그 어떤 목적성을 부각시켜도 ‘참’으로 정해 부르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인 상징성은 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교육용어로는 정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