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영국 교육정책 변화에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교육서라는 찬사를 받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이 국내에 출판되면서 지식 교육과 역량 교육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5개정 교육과정에 창의융합형 인재가 갖추어야 할 6대 핵심역량을 제시하며 역량 교육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황이라 이러한 논쟁은 더욱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지식 교육과 역량 교육은 무엇이며, 양분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 현장에서는 어떠한 상황인 지 등에 관한 교육 전문가의 의견을 담고자 한다.

정나나 수원 연무중 교사
정나나 수원 연무중 교사

학생1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모둠활동을 한 적은 처음이죠. 당연히 중간 중간 다툼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수업이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교과서’라는 이름의 길을 저를 포함한 모든 학생이 따로따로 서서 억지로 순서대로 걷게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친구들과 함께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길을 개척하며 만들고 다 같이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학생2 저 혼자만의 생각은 ‘그냥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제 생각을 모둠원들과 공유하고 논의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로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도 제 주변에 개선할 점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찾아내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쳐라 프로젝트’를 마친 후 소감문 중에서

'미쳐라' 프로젝트로 다섯 가지 역량 함양하라

필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초학문적 융합 수업’ 워킹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약 9주 동안 15차시에 걸쳐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초학문적 융합 수업이란 새로운 지식과 더 깊은 이해를 삶의 경험에 연결시키기 위해 여러 학문의 관점을 통합하는 이슈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식의 축적, 결과와 양적 평가를 강조하던 기존의 지식 중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실제 삶의 맥락에서 지식을 활용하고 특정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지식, 기능, 태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역량 중심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초학문적 융합 수업은 요구탐색→문제 선정→문제 구체화→실행 계획→실행→발표 및 평가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필자는 도덕 교사이기 때문에 평소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학습한 내용이 단순히 지식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행동 및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하고 조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나와 너와 우리의 Doing(행동)을 통해 타인의 인식이나 가치관을 개선하고 더 나은 공동체 형성을 위해 선한 영향력을 미쳐보라는 의미와, 이 프로젝트에 빠져들어 미쳐보라는 의미를 모두 포괄하도록 ‘나do 너do 우리do 영향을 미쳐라(이하 ‘미쳐라’ 프로젝트)’라는 수업명을 정했다. 프로젝트로 학생들이 ‘문제 해결력’, ‘창의성’, ‘협업’, ‘의사소통’, ‘시민의식’ 등 다섯 가지 역량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쳐라’ 프로젝트 과정 소개 

1.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모둠을 구성한다. 그리고 모둠별로 타인의 생각, 인식, 가치관이나 공동체 제도나 시설 등에 개선할 점, 즉 선한 영향을 미쳐야 할 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싶은 점은 무엇인지 탐구한다. 이를 통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주제를 선정하여 이를 핵심 질문과 세부 질문으로 나누어 표현한다. 필자가 수업하는 중학교 1학년 총 5학급의 학생들은(약 150명) 모두 34개의 모둠을 구성하고 자율적으로 탐구 주제를 선정하였다.

2. 모둠별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상황, 문제가 발생한 원인, 관련된 사람들의 입장 등에 대해 탐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한 계획(설문, 인터뷰, 조사)을 수립한다.

3. 설문, 인터뷰, 조사 등을 실시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 홍보물을 제작하거나, 학교 내·외 시설을 재디자인 하거나, 제도 개선을 위해 관련 기관에 제출한 건의서를 작성하거나 연락하기 위한 방법을 탐색한다.

4. 모둠별로 영향을 미친 결과를 PPT로 작성하여 학급 내에서 서로 공유하여 새로운 탐구 주제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또한 자기성찰평가, 상호평가, 모둠의 탐구 과정 평가, 다른 모둠의 탐구 과정 평가를 통해 자신 및 모둠 활동을 성찰한다.

역량중심수업, 반드시 탐구 과정 거쳐야...지식 도외시 수업 아냐

먼저, 필자는 ‘미쳐라’ 프로젝트를 통해 역량중심수업이라고 하여 기존 학교에서 강조한 지식 습득을 도외시하는 수업이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프로젝트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자율적으로 주제를 선정한 뒤에는, 반드시 그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를 들어 ‘왜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로 변질되었을까?’를 주제로 결정한 모둠은, ‘페미니즘의 정의’, ‘여성 우월주의의 정의’, ‘대표적인 여성 우월주의 사이트’, ‘사람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에 대해 학습하지 않고서는, 결코 영향을 미치기 위한 실행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학생들은 대표적인 여성 우월주의 사이트, 남성 우월주의 사이트 등의 관리자 및 회원들과 온라인으로 소통하며 인터뷰를 하였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한지 설문지를 배부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탐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주제로 하여 오랜 시간 논의한 끝에, 효과적인 홍보지를 만들어 학교 내부 곳곳에 부착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 ‘효과적인 홍보지 제작’을 위해 ‘효과적인 광고 문구 작성 방법’,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색 배열’ 등에 대해 학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학생이 수업의 주체 '역량중심수업'

다음으로 역량중심수업이야말로 학생이 수업의 주체가 되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수업임을 목도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쳐라’ 프로젝트 후반에는 탐구 및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참신한 내용의 홍보지를 제작하여 홍보 효과가 가장 뛰어날 것이라 생각되는 적절한 곳을 찾아내어 부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언가를 그리기도 하고, 문구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학교 내부(또는 외부)를 이리 저리 열심히 탐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단 한 명의 학생도 딴 짓을 할 수 없다. 졸수도 없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필자가 학생들로부터 들었던 말 중 인상 깊었던 것은 “하루 종일 도덕 수업만 하면 안돼요? 왜 일주일에 두 시간밖에 안 들었어요?”, “다른 수업은 학원에서 미리 배운 내용이라 대충 듣게 되기도 하는데, 이 시간은 제가 탐구하고 싶은 내용을 골라서 친구들이랑 같이 하니까 진짜 재밌어요” 등이다. 교사로서 이보다 뿌듯하고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역량 중심 수업은 학생들이 성취감을 느끼고 자기 효능감을 증진하는 데 이르도록 기여할 수 있는 수업이기도 하다. 

강의식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허용된 활동은 ‘필기’나 ‘발표’에 머무른다. 그렇지만 ‘미쳐라’ 프로젝트를 포함한 역량 중심 수업 시간의 주인공은 학생이다. 교사가 아닌 학생이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목표한 바에 도달하는 데는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모든 단기 과제 수행을 모조리 실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미쳐라’에 참여한 34개 팀 모두가 타인이나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어떤 모둠은 홍보지를 만들었지만 부착하지는 못했다. 또 다른 모둠은 버스 정류장에 쓰레기통을 설치해달라고 시청에 건의하였지만 승낙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고, 탐구 과정을 공유하는 시간에 학생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수업시간에 뭔가 해봤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또 앞으로 살아나가면서 수많은 실패를 겪을 텐데, 미리 겪은 셈 치겠다. 다음에 또 하게 된다면 그 때는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행동으로 옮겨 보니 생각보다 쉬웠다. 무엇이든 고민만 하지 말고 일단 부딪혀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친 학생들 역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내 작은 힘으로 우리 공동체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에 내가 정말 자랑스럽다.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이제 알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에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르쳐야" 

학생들이 성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하다. 교육의 목적 중 한 가지가 학생들로 하여금 미래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라는 점에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이 어떠하다’는 선언적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는 삶과 분리된 파편화한 지식으로 남아있기 쉽고 바람직한 행동으로의 추진 요인이 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선언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절차적 지식을 숙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역량중심수업이야말로 학생들이 자신의 삶에 통합되어 살아있는 앎이 되도록 하고 지식을 지혜로 승화할 수 있도록 하는 왕도가 될 수 있다. 

교사 대상 홍보 전략 필요 

다만, 역량중심수업의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 교사에게 역량중심수업의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게 하고 이러한 수업의 필요성을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원해야 한다. 교사는 교육과정의 최종 실천자이자 교육과정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최일선(最一線)에 서 있다. 역량 중심 수업이 효과적이며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교사들이 활용하지 않으려 하고 활용할 줄 모른다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시범 적용해 보았던 ‘미쳐라’ 프로젝트와 같이, 학교 현장에서 실행된 수업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나 방법이 현장 교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제공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