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 VS 지식교육] 역량중심 수업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역량 VS 지식교육] 역량중심 수업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지준호 기자
  • 승인 2018.10.30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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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 "완전 새로운 것을 의미하지 않아"
참여형 수업과 강의식 수업 "어느 것이 낫다 말할 수 없어"
참여형 수업의 딜레마 "경쟁사회와 결과의 불확실성"

지난 9월 영국 교육정책 변화에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교육서라는 찬사를 받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이 국내에 출판되면서 지식 교육과 역량 교육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5개정 교육과정에 창의융합형 인재가 갖추어야 할 6대 핵심역량을 제시하며 역량 교육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황이라 이러한 논쟁은 더욱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에 지식 교육과 역량 교육은 무엇이며, 양분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지, 현장에서는 어떠한 상황인 지 등에 관한 교육 전문가의 의견을 담고자 한다.

참여형 수업 "학습 목표 도달 보증하지 않아"

전국 연수원이라는 연수원에서 한 번 씩은 다 틀어준 영상이 있습니다. 바로 아래의 ‘근대교육을 재판합니다’라는 영상입니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역량 중심의 교육이 미래 교육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그 기능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한다며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렸습니다. 지금 말하는 역량 중심의 교육이 기존의 학교를 뒤엎는 새로운 교육철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하면 2002년 월드컵 당시 제가 실습했던 학교는 열린교육 시범연구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실에는 신기하게도 벽이 없어 누구나 지나가며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아이들의 책상은 둥근 원형으로 모둠 구성원이 자유롭게 앉아 수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실습과정에서 많은 수업은 협동학습의 방식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전미수학협의회(NCTM)가 주창한 구성주의적 수업과 지식 기반 수업을 바탕으로 한 수업 철학의 토론은 수학전쟁(Math Wars)이라고 불릴 정도로 심화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구성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비고츠키는 1934년에 ‘사고와 언어’를, 존듀이는 1916년에 ‘민주주의와 교육’을 출판하였습니다.

대화와 문답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산파술은 2300여 년 전 소크라테스가 주창한 말이고 요즘 한참 뜨고 있는 하브루타의 기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라고 합니다. 요컨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교육은 결국 언젠가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기존에 있지 않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형 수업 “왜 현장에 안착하지 못했나”

참여형 수업 vs 강의식 수업...뭣이 중헌디?

100명의 사람들에게 ‘1+1=2라는 것을 외우는 것과 이해하게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하나요?’라고 묻는다면 100명 모두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래의 그림처럼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경험, 선험지식 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해를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친다 vs 학생이 선생님에게 배운다

이 말은 같지만 다른 말입니다. 전자는 주체가 교사이지만, 후자는 주체가 학생입니다. 학생이 주체가 되어 배우는 교실이 더 좋은 교실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게 된 새로운 개념을 새로운 경험과 연결하기 위한 학생 참여형 수업이 강의식 수업보다 더 좋은 수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울까요? 저는 20여 년 전 열린교실운동이 전국에 유행처럼 번져갈 때 정말 교육 자체를 모조리 바꿔버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군대 전역을 한 뒤 그 학교로 다시 찾아갔을 때 열린 교육의 선두에 있던 그 학교마저도 허물었던 벽을 다시 만들고, 예전에 공부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강의식으로 진행하는 교사가 뒤쳐졌거나 바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의 영상처럼 학교가 학생들을 기계로 만들기 위함 또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여형 수업은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여형 수업, ‘효율성, 학생 수준차, 결과의 불확실성’을 넘어야

참여형 수업만으로 수업 구성...교육과정을 완전히 재구성해야 가능

위의 영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영상은 근대 교육이 문제이며, 창의성을 높이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강의(講義) -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침

내 생각을 정리하여 서술하는 것은 모두 강의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글로 정리하고 있는 것 또한 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왜 저는 직접적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다른 방법보다 직접적으로 정리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1+1=2라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 진행하는 시간과 말로 정리해 주는 시간은 수 십 배나 차이가 납니다. 참여형 수업으로만 수업을 구성하는 교실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초등기준으로 일주일에 20~30시간가량 수업을 합니다. 실제로 1시간은 40분이므로 실제 시간은 위의 시간에서 2/3정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다른 아홉 가지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여형 수업만으로 수업을 구성한다는 것은 주어진 교육과정을 완전히 재구성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는 교사의 어깨가 너무 무겁습니다.

수업의 이해 차이, 점차 더 큰 수준차이 불러와

흔히 강의식 수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학생의 수준차라고 이야기 합니다. 강의식 수업은 상위 몇 %만이 이해할 수 있고, 나머지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업포기자들을 양성하고, 잠자는 학생들을 낳는 원인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학생 참여형 수업은 강의식 수업보다 수준차가 훨씬 더 크게 벌어집니다. 수업을 다 듣는 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강의식 수업은 선생님의 강의를 받아 적고 외우면 끝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잘 하느냐 못하느냐로 수준의 차이가 결정됩니다. 이해라는 것을 새로운 지식과 선험 지식의 연결이라고 볼 때 기본 지식이 많은 학생은 점점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기본 지식이 없는 학생은 이해하기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점을 잇는 것은 하나의 선이지만, 세 점은 세 개의 선을 연결 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점은 무려 10개의 선을 연결 할 수 있습니다. 한번만 연결해서 10개이지 이것을 무작위로 연결한다면 5!(5 팩토리얼)이 됩니다. 즉 5*4*3*2*1 = 120가지의 연결이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여형 수업은 처음부터 학생들의 이해 정도의 차이가 속도와 깊이의 차이를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여형 수업은 수준차가 제곱 이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속도*깊이).

처음부터 이해한 학생들은 시작과 동시에 막 달려갈 수 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은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조차 하지 못한 학생들은 결국 수업 무기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모든 프리라이더가 수업 무기력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수업에 무기력한 학생들은 모두 프리라이더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쌓여가면서 더 큰 수준차이를 보이게 됨으로써 악순환이 이어지게 됩니다.

참여형 수업의 딜레마 “노력이 항상 결과 보장하지 않아”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할 때 그것이 학습목표의 도달을 보장할 수 있는가?

강의식 교육은 최소한 그것을 외운다는 것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여형 수업은 노력이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것을 하고 났을 때 얻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수업을 하고 나서 학생들이 받는 느낌 또한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여형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배움을 얻었다’라는 말은 불확실합니다. 정확하게는 ‘그 배움이 학습목표에 닿았다’라는 것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방향이 잘못된 화살표는 목표지점에 닿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학습목표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줄 객관적 지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양적 근거보다 질적 근거 위주의 연구 결과를 더욱 많이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참여형 수업은 강의식 수업보다 불확실합니다. 혁신학교가 좋은 학교이기 때문에 근처 땅값이 올라간다고 하지만 많은 학부모님이 혁신학교를 불안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점에 있습니다.

존듀이의 ‘민주주의와 교육’은 1900년대 전기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구성주의 교육철학은 미국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많은 학교가 이 철학을 기조로 수업을 운용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된 계기는 스푸트닉 쇼크(소련의 로켓 발사)였습니다. 소련이 로켓을 발사했을 때 이런 인재를 발굴해 내지 못한 교육이 문제라며 진보주의 교육에서 기초·기본 지식을 중요시하는 교육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열린 교실이 공감 받지 못하고 다시 전통적인 수업방식으로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이 방식이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공감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 - 이해찬 1세대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람들에게 먹혔던 것은 진짜로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참여형 수업의 가장 큰 장애물을 ‘입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입시가 없어지면 참여형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입시가 바뀌어도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회구조가 경쟁이 아닌 상호 협력의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는 수많은 진열대에 정리된 물건들 중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내가 고른 것은 팔린 것이지만 고르지 않은 것은 도태됩니다. 경쟁의 사회 구조는 바꿀 수 없습니다. 진짜로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죄수의 딜레마처럼 이 점을 노려 이익을 취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온실 밖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때의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참여형 수업의 가장 큰 딜레마입니다.

참여형 수업의 3가지 목표

그러므로 참여형 수업은 다음의 목표를 지향해야 합니다.

1. 최소한의 노력으로 교사와 학생 모두가 쉽게 접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모든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3. 강의식 수업보다 더 낫다고 말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를 위해 어떤 노력과 시도들이 있었는지, 그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백균 태백 황지초 교사
김백균 태백 황지초 교사

 

지준호 기자  casaji97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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