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사진=픽사베이

경험이란 무엇인가?

‘경험’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겪는 과정 혹은 결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17세기경부터 서양의 근대철학사에서 ‘경험’은 사물을 인식하고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경험의 개념은 대체로 우리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지식의 잠정적 대상인 자료를 감각기관을 통하여 감지하여 받아들이고, 마음의 내면기관에서 반성적으로 조직하여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 혹은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즉 감각기관(혹은 외관, External Sense)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들을 우리 마음속의 내관(Internal Sense)에서 반성적 작용을 통해서 다시 조직하고 구조화하여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개념은 서양의 17~8세기에 영국 철학계의 베이콘, 로크, 흄 등이 전개한 인식론적 주류의 하나였던 경험론(Empiricism)의 기본 개념이었다. 이러한 경험론은 당시 유럽 대륙 철학계의 데까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확실한 지식의 체계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온 표상(관념, Ideas)에서 추론된다고 주장하는 합리론(Rationalism)에 대립한 것이다.

물론 경험의 개념은 그 이전의 철학에서도 사용해 오던 것이다. 인식론적 대립이 본격화된 근대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체계화되면서 그 의미가 매우 제한되기는 하였다. 당시의 경험론적 개념의 경험은 인간의 마음 밖에서 감각적 자료를 수용하여 마음 안에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인 지식을 만들어 간다고 하여, 인간의 마음을 피동적 기관으로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론적 개념의 경험은 자연적-사회적 현상에 대한 탐구행위를 관찰에 의해 획득한 자료에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왔다.

듀이, 경험론에서 '상황'을 이야기하다

그러나 듀이의 경험은 마음 밖의 외계로부터 감각적 자료가 수용되는 피동적 과정이 아니라, 마음이 오히려 외계에 대하여 작용하여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능동적 기능이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경험은 인간이 외계와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과정 혹은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외계는 자연적-물리적 환경과 인간적-사회적 환경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듀이는 상호작용의 장은 맥락에 따라서는 ‘상황’(Situation)의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상황의 개념은 인간의 마음과 상호작용하는 대상인 환경의 의미를 맥락에 따라서 명료하게 규정하며, 그 과정에서 질성(적)의 개념이 지니는 의미론적 역할을 더욱 확실하게 밝힐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간혹 듀이를 검토하거나 비판하는 철학자 중에는 바로 이 ‘상황’의 개념이 지니는 모호성에 대하여 불만스러움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분석철학적 시각에서 보면 그러한 불만은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는 듀이의 Situation이라는 말을 접할 때 마다 얼른 우리말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흔히 우리가 ‘상황 판단을 잘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러한 말의 맥락에서 ‘상황’이라는 말의 뜻이 듀이의 Situation을 상당히 비슷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나의 의식적 관심에 따라 상황의 내용은 달라진다

내가 어떤 물리적-사회적 환경 속에 있을 때, 내가 위치해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이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이며 또한 환경이지만, 현재 내게 유의미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혹은 내가 하고 있는 신체적-심리적 행위 혹은 활동에 관련된 것이고 그것만이 내가 의식하고 있는 대상이다. 그 밖의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상황은 나의 의식적 관심의 내용을 뜻하는 것이고, 순간순간마다 무엇을 의식적 관심에 두느냐에 따라서 실제 직접적 상황의 내용은 달라진다.

내가 예컨대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의 현장에서 관람하고 있다고 하면, 그 교향악의 연주가 전체로서 나에게 하나의 상황으로 다가 온다. 나는 그 상황에 몰두하고 있고, 그것과 교감하고 있는,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내가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 한순간 첼로 파트의 연주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 순간의 상황(Situation)은 첼로 파트의 연주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은 나의 관심으로 구획을 짓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구획은 그 자체를 독특하게 하는 ‘질성’이 있기 때문에 구획된 것이며 하나의 상황이 되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지각한다.

연주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는 오보에의 멜로디에 특별한 관심을 두게 된다. 신세계의 2장에서 나오는 (우리가 흔히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하는)‘우리 집 가려네 우리집으로 ...’의 선율이 이어지면 거기에 집중한다. 나는 오보에의 선율에 따라 하나의 상황을 즐기게 된다.

교향악이 연주될 때에는 수십 개의 악기가 각기의 소리를 내면서 각각 자체의 독특한 질성으로 전체의 음악을 만드는 데 참여한다. 교향악은 신세계의 경우와 비슷하게 많은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적 형식이며, 그러한 형식이 지니는 음악적 질성으로 인하여 교향악이 만들어지고, 그 형식은 다른 형식의 연주와는 구별된다.

베토벤의 것도 있고 하이든의 것도, 그리고 많은 교향곡이 있다. 베토벤의 것이 하이든의 것과 다른 것은 각기의 질성이 다르기 때문이고, 베토벤의 것이라고 해도 ‘영웅교향곡’과 ‘운명교향곡’이 다른 작품으로 구별되는 것은 각기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질성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휘자에 따라서 식별가능한 또 다른 개성을 지닌 연주가 된다면 그것 또한 독특한 질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성으로 인하여 통일되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지각하고 사고하는 내용이 되는 것이 바로 상황(Situation)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냥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체(Objects)가 아니다. 교향악에는 많은 악기의 소리가 연주되듯이 하나의 상황 속에 온갖 대상체들이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상황인 것은 아니다. 상황 밖의 온갖 것들과 구별하고 상황 안에 있는 대상체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질성, 즉 ‘편재적 질성’이 그 상황을 성립시킨다. 그 질성, 즉 편재적 질성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고 그냥 그 자체가 상징적 특징을 지니도록 둘 수도 있다.

'경험'은 '상황'과 '상호작용'하는 것

듀이가 인간의 ‘경험’을 자연적-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 혹은 그 결과로 언급하지만, 더욱 엄격히 말하면 상황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순간의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기억되고 습관이 되면, 그것은 바로 나의 경험이다. 지금의 경험은 먼저의 경험과 상호작용하는, 즉 서로의 교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교환하면서 거래현상이 있기도 하다.

집단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공유되는 집단적, 사회적 수준의 경험이 형성된 것을 말한다. 한국인의 문화는 한국인의 역사적인 경험으로써 응결된 구성체이다. 언어도 관습도 전통도 그렇게 만들어진 경험의 통합적 구성체이며, 거기에는 다른 인류의 문화와 공유하는 부분도 있지만 독특한 체제의 경험적 내용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문화적 특성 거기에도 독특한 경험적 내용을 성립시키는 편재적 질성이 있으므로 다른 문화권과 구별된다.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경험이 형성되는 것은, 인간이 알게 모르게, 구체적으로 의식하든지 않든지 간에,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바가 자연스럽게 충족되면 해결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없는 상태이며, 따라서 체계적이거나 집요한 사고도 요청되지 않으며 지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안전을 위하여, 생존을 위하여,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어떤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추구하는 가치가 충족되면서 경험이 형성되고 축적되고 교환되면서 더욱더 다듬어진 가치를 지닌 목적을 추구한다. 추구하는 가치로는 일상적으로 사소한 것도 있지만 매우 고답적이거나 획기적이거나 심각한 것이거나 때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추구하는 바가 반드시 자연스럽게 충족되는 것은 아니므로 수단을 동원하고 방법을 구상하며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경험이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경험들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다시 어떤 가치(목적)를 추구하는 삶을 계속하면, 자신이 지닌 지력을 다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적 원리들이 축적되고 재구성된다. 그러한 과정이 바로 인간의 지력에 의한 성장의 과정이다.

지금은 듀이가 주장한 '경험의 재구성'을 검토해 볼 단계

우리는 지금 듀이가 교육의 과정을 ‘경험의 재구성’ 혹은 ‘경험의 성장’이라고 설명한 것을 한번 검토해 볼 단계에 있다. 이 말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흔히 ‘경험에 의한 학습’(Learning by Experience)을 지식을 암기하여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보고, 관찰하고, 겪어보고, 다루어봄으로써 배운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성장이나 경험에 의한 학습은, 물론 그러한 단순한 활동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지만, 학습의 과정과 성장의 과정을 경험의 근원적이고 포괄인 의미로 언급한 것이다. 단편적인 지식이나 습관화된 기술이나 세련된 감정, 그 자체의 개별적 가치가 중요하거나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지식이나 기술이나 정서가 학습자의 개성과 인성을 결정하는

경험의 내용으로 얼마나 유의미하게 통합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교사는 지식이나 기능이나 정서에 관한 학습을 지도할 때, 그러한 내용을 학습해야 한다면, 학습자가 추구할 만한 가치로써 동기를 유발해야 하고, 학습자가 스스로 동원하는 지력에 호소하여 해결가능한 수준의 문제의식을 고취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경험체제 속에 통합되도록 할 때 유의미한 학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되는 것은 자신이 직접 학습한 결과의 경험일 수도 있고, 동료 학습자나, 가정이나, 교사나, 사회와의 관계에서 교합된 경험인 정보, 기능, 지식, 규범, 이론, 사상, 이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