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적 경험 특징..."교육에서 추구하는 성장과 어떤 관계 있나"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경험'..."삶을 구성하는 요소로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고 특징지어"

듀이가 미학적 이론을 집중해서 다룬 것은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였다.1)

1) John Dewey, Art as Experience (New York: Capricorn Books, 1934)

이 책으로 말하면 자신의 철학적 관심을 특별한 영역으로 옮겨가는 변화를 보여 준 것이었다. 물론 ‘경험과 자연’에서2) 예술에 관한 약간의 언급이 있었지만 뚜렷한 윤곽을 들어내는 수준은 아니었다.

2) Dewey, Experience and Nature (Chicago: Open Court, 1925;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58)

그는 ‘질성적 즉시성’을3) 언급한 바도 있고, 경험의 발달에 관한 견해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3) 질성적 즉시성(qualitative immediacy)은, 우리가 어떤 질성을 지각할 때 복잡한 간접적 관찰이나 체계적인 추리의 과정과 같은 어떤 매개적 수단의 도움이 없이 직접 지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듀이의 경험은 전통적 인식론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을 경험한다’든가 ‘~한 경험이 있다’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과 그러한 표현들의 도구적 특징에 관한 공감적 이해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험’은 어떤 권위 있는 사전에서 제시한 정의나 엄격한 언어분석적 방법으로 명료화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이 사용되는 상황에 기능적으로 관련된 요소들과 더불어 밝혀지는 의미를 공유한 것이다.

경험은 식사를 하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일상적 활동과 구별되는 별도의 행동과 사고가 이루어지는 삶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존재하는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행하고 피동적으로 겪는 바의 모든 것이 경험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막연한 전체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으며 식별이 가능한 부분과 부분으로 나누어 언급할 수도 있는, 즉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오래토록 지속하는 것도 있고,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하며,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멸해 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경험들은 그냥 덧없이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고 지속하고 사라지면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유지하고 특징짓는다.

완성 단계에 이른 경험..."심미적 특징 지녀"

생명체인 인간은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자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과 항상 상호작용하고 있으므로 경험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많은 경우에 때때로 불완전하며 매우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일을 시작하다가도 멈춘다. 경험이 목적하는 바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외부의 장애물이나 내부의 무력감 때문에 시작하다가도 중지하는 것이다. 기억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심코 지나치거나 방심한 사이에 흘러가 버리는 것도 매우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과는 반대로 제대로 과정을 따라서 잘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은 자체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고, 생활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보면 다른 경험과는 달리 다소 특별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한 가지의 일이 만족스럽게 끝나거나, 고민스러운 문제가 해결되거나, 하나의 경기가 끝나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식사를 하든지 대화를 나누든지 책을 쓰든지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든지, 그 어떤 과정이든지 간에 잘 마무리 되는 것이 있다. 그런 경험의 끝은 단순한 정지 상태가 아니라 완성의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전체가 하나로서 통일성을 보이고 그야말로 자족성을 지닌 것이다. 듀이는 이와 같이 융합된 통일체를 일컬어 “하나의 경험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였다.4)

4)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경험을 갖는 것” (having an experience)이라고 표현하였다. Art as Experience. Chapter 3; 이돈희, 「존 듀이 교육론」(서울대학교 출판부, 1992), pp. 77-104.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심미적 특징을 지닌 것으로 규정하였다.

어떤 경험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면 여러 가지 유의미한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말하자면 경험의 주체와 환경이 다시 함께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된다. 그러나 듀이는 예술적-심미적 경험의 근원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 생활에 속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과정 어디서나 여러 가지 모습의 경험이 완성되고 있다. 얼마 전에 경험한 바라도 지금의 상황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하나의 질성적 통일체로5) 융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면, 일상적 삶에는 심미적 특징을 지닌 다양한 경험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5) '통일체' -- 우리가 경험한 하나의 사건이나 활동에는 수없이 많은 잡다한 요소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이 서로 관련하여 하나의 구체적 경험을 만들고 있는 상태는 어떤 짜임새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 특징은 통일체를 이룬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체’란, 우리가 경험한 하나의 사건이나 활동에는 수없이 많은 잡다한 요소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이 서로 관련래 하나의 구체적 경험을 만들고 있는 상태가 어떤 짜임새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내가 어제 우연히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던 옛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와 함께 보낸 지난날의 일들을 이야기로 나누었고 지금도 그 즐거움을 주변의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귀한 순간이었음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제의 만남은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다. 그 경험에는 옛날의 귀한 기억들을 담고 있고,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만남의 감격과 흥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내게는 다시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즐거운 경험이다. 만남 그 자체의 특별한 의미도 있지만 이와 더불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 귀한 내용이 하나의 융합된 통일성을 지닌 경험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수필도 쓰고 노래를 지어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심미적 경험은 그 근원으로 보면 평범한 일상적 경험이다. 바꾸어 말하면 심미적 가치란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향유하는 것이라거나 특별하게 열광적인 애호가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우리가 경험의 개념을 끝까지 분석해 보면,

경험의 구조 그 자체와 심미적인 것에는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심미적 경험이란 여러 가지 종류의 경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경험 그 자체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하였다.6)

6) Hans-Georg Gadamer, Truth and Method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75), p. 63.

듀이는 “생생한 경험 안에서는 실천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이지적인 것들을 서로 분리시킬 수가 없고, 어느 한 차원의 특성들로 하여금 다른 차원의 특징들을 압도해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서적 국면은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며, ‘이지적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그 경험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이고, ‘실천적인’이라는 말은 유기체가 그를 둘러싼 사건과 대상과 더불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7)고 하였다.

7) 이돈희, 「존 듀이 교육론」, pp. 101-102.

또한 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8)

8) 이돈희, 「존 듀이 교육론」, p. 102.

“가장 치밀한 철학적 탐구나 과학적 탐구도, 그리고 가장 야심에 찬 기업이나 정치적 활동도 각각의 과정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통합된 경험을 이룬다면, 그것은 심미적 특징을 지닌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 각각의 다양한 부분들은 단지 서로 인접해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분 부분들은 그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그냥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결성하고 종결짓는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더욱이 이와 같은 결성의 과정은 그 일이 끝나도록 의식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전체적 과정을 통하여 언제나 예측하고 되풀이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재음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경험들이 독특하게 심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지적이거나 실천적인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그 경험들이 애초에 시작할 때, 그 경험을 통제하는 세력과 추구하는 목적이 이지적이었거나 실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적 경험을 한다

예술가들은 창조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창조적 활동으로 인하여 예술가로 불린다. 예술가는 어떤 목적으로 필요한 재료를 사용하고 조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고 간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력과 상상력을 동원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는 노력의 과정은 그 자체가 창조적 활동이다.

그러나 창조적 활동과 성취한 업적(작품)은 오직 예술가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예술적’이라고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기술적 창조성, 생산적 창조성, 과학적 창조성, 인문학적 창조성 등과 같이 사회적 관심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일상의 창조적 활동은 그 자체로서 특징상 창조적인 예술적 활동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스스로 통쾌함을 느낀다든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든가, 오래 간직하고 싶다든가, 스스로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은 경우에 일종의 창조적 경험을 한 것이다.

듀이, 예술가들의 창조적 활동에 감각적 경험 한정 탈피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을 좀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일상적 경험이나, 과학적 혹은 생산적 창조성과 같이 독특한 경험을 언급하면서 예술적 경험이나 창조성을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술적 창조성 그 자체로서 과학적 혹은 생산적 창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설명력을 지닐 것이다.

예술가들이 창조적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주로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관조하고 재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차원의 온갖 질성들을 소재로 하여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반성적 사고를 자신의 본업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수준의 창조적 활동은 우리의 삶에서, 특히 전문적 활동의 어디에서나 요구되는 것이지만, 일상인과는 달리 예술가들은 질성적 복합체를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대상으로 직접 감지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욱 독특하게 그런 것에 감수성과 집념을 보인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창조적 활동 자체가 지닌 내재적, 본질적 가치를 즐기고 또한 거기에 헌신하는 생활 자체로 보상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의 삶과 의미와 가치에 관한 광범한 소재를 다루고, 추구하는 바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예술가들의 창조적 활동이나 애호가들의 감상적 태도에서 기본적 역할을 하는 것은 감각, 감정 등의 정의적(情意的) 요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듀이는 정의적 요소에 관련하여 감각적인 경험을 단지 색깔, 냄새, 감촉 등의 감각적 성질에 한정하여 해석하는 견해에는 반대하였다.

예술가가 작업의 과정에서 다듬고 아울러는 소재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매체가 지닌 감각적 질성 뿐만 아니라 그 질성이 지닌 풍부한 의미와 그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 물론 작업에서 그 의미를 집중적으로 들어내고 생기를 부여하는 기능은 ‘정서’가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거칠은 열정으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전체적 방향을 신중히 이끌어 가는 차분함이 있다.

정서가 예술적 작업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예술가의 창조적 활동 중에는 정서의 도구적 역할로 인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창조적 경험..."인간의 성장에 의미와 가치 부여해"

우리가 무엇에 종사하고 있든지 간에 그러한 창조적 집념과 그 가치의 실현에 헌신하고 있다면 창조적 삶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철학자도, 과학자도, 사업가도, 종교인도, 기술자도, 교육자도,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간에 각기의 창조적 삶을 사는 셈이다. 우리의 경험, 특히 교육에서 말하는 경험, 즉 아이들의 경험, 교사의 경험, 교육경영자의 경험도 창조적 삶의 경험일 때, 그러한 경험은 인간의 성장을 설명해 주고 그 성장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예술적(심미적) 경험의 특징이 교육에서 추구하는 성장과 창조적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좀더 체계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