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9) 김해김씨(우록김씨)의 원조 사야가 김충선

2019년 다문화 학생 수는 12만2212명. 학생 수가 줄고 있는 반면 다문화 학생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문화 교육의 정의 및 내용에 대한 구체적 합의와 법령체계는 미흡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가 공존할 때 창의적 문명의 꽃이 피어나고, 문화 인류학과 다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갖춘 사람이 미래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BTS) 노래에 민속춤이 어우러지듯 다문화는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짐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밑바탕이 된다. <에듀인뉴스>는 우리가 지나쳤던 다양한 문화를 다문화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의 글을 통해 폭넓은 다문화 인식은 물론 다문화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콘텐츠도 제공하고자 한다​.

(사진=ebs 캡처)

[에듀인뉴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사람들에 대해 배웠었다. 주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간 '도래인'들의 이야기와 가야,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문화전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륙의 문화를 일본에 전달했던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고구려의 담징,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 심지어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일본으로 넘어간 세력까지, 어찌보면 현재 일본인의 주류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로 진출할 때는 그리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백제 멸망이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수만의 군사와 수백척의 전함이 백강(지금의 군산 앞바다)에 진출했지만,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종식되고 말았다. 그 이후 한반도 해안가는 중국과 일본의 해상무역로로 활용되었으며, 끊임없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왜구의 침범은 고려후반기에 극심했는데, 최무선과 이성계 등이 활약한 진포해전과 황산대첩에서는 왜구의 전함수만 500척이 넘을 정도로 거의 전면적인 전쟁수준이었다. 또 조선에 와서도 왜구의 박멸을 위해 태종과 세종 때 이종무를 앞세워 직접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다. 그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암울한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역사시대 초기 한일관계는 주로 한반도를 통해 대륙의 문물이 전달되는 교량역할이었다. 일본 전통문화의 근간은 대부분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흘러들어간 것들이었다. 일본의 전통의상 기모노뿐 아니라 각종 식생활과 종교, 등이 그렇다. 하지만, 점차 해양문명이 발달하면서 그 역류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문제는 그 역류현상이 그다지 좋은 기억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로 전쟁과 침략 등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에서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넘어온 인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때로는 설화로 때로는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역사상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박혁거세와 석탈해 시대 살았던 '호공'이라는 인물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석탈해 설화에 등장하는 호공이라는 인물은 석탈해에게 집을 빼앗긴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석탈해가 즉위한 후에 곧바로 대보(국정총괄직책)라는 벼슬을 하사받은 사람으로 나온다. 호공이 살았던 집은 신라의 궁궐이 세워진 월성이었고, 그는 일본에서 바다건너 온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 석탈해의 출신국이 용성국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일본의 한 부족국가가 아닐까 하는 주장을 하는 이도 존재한다. 그리고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서도 인도의 아요디아, 베트남 참파, 중국 양자강 하류, 또는 하북성 등이 등장하고 있지만, 출신지가 일본일 것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백제의 무령왕도 일본에서 거주한 백제왕가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백제로 건너와 왕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문물교류가 빈번했던 고려시대엔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인물이 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주로 고려시대 일본은 해적질을 하는 왜구의 나라로 인식되었을 뿐이고,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군이 몽골군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연합군대를 형성해서 대마도를 비롯해 일본 본토에 상륙하고 파죽지세로 휩쓸고 전진했지만, 커다란 태풍을 연거푸 만나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귀화한 인물들은 간간히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오키나와 류쿠국 산남왕 온사도, 선박기술자 등구랑, 그리고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가 김충선이다. 온사도와 등구랑의 후손에 대해선 사료가 없지만, 사야가 김충선은 조정에서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사성 김해김씨, 또는 우록김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사진=ebs)

우선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표류해온 산남왕 온사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시 류쿠국은 산북왕, 중산왕, 그리고 산남왕이 다스리는 3개의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세력을 확장한 중산왕에게 축출당하고 표류하다 조선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유구국의 산남왕 온사도가 그 소속 15인을 거느리고 왔다. 사도가 그 나라의 중산왕에게 축출당하여 우리나라의 진양(거제도)에 와서 우거하고 있으므로 국가에서 해마다 의식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유리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의복과 쌀, 콩을 주어 존휼하였다."

이에 앞선 태조 3년의 기록에는 류쿠국의 중산왕이 피납된 12명을 되돌려 보내고, 특산물을 받치며 조선에 도망쳐온 산남왕 태자 승찰도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에 대한 태조의 답변 기록은 없다.

그후 3년이 지난 뒤 산남왕 온사도가 중산왕에게 축출되고 수하 15인과 표류하다 거제도에 표착해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를 불쌍히 여겨 음식물과 옷을 제공했다고 나온다. 그뒤 태조 7년에 온사도가 죽었다는 기록만 있고, 함께 온 15인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키나와인 류구국과의 교류는 고려시대부터 류구국이 일본 사쓰마번의 휘하로 들어가는 조선시대 후기까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앞서 조선에 귀의한 산남왕 온사도에 대해서도 정만 베풀었을뿐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은 류구국을 통일한 중산왕과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조선과 섬라(대만)국, 그리고 류구국과 함께 일본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키나와와 한반도 남해안 섬지역에는 유사한 풍습이 많다. 특히 장례풍습으로 동일한 '초분'이 시행되고 있다. 이 '초분'은 호남의 섬지방에서 전해지고 있는 장례풍습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풀섶으로 임시무덤을 만들었다가, 시체가 다 썩고 백골이 드러나면 백골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다.

이러한 '초분'의 장례풍습이 우리나라 남해안과 오키나와 등 섬에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일찌감치부터 동남해안으로 올라온 남방 아시아계 주민들의 풍습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대마도 출신 선박기술자 등구랑에 대해 살펴보자. 등구랑은 세종과 성종의 실록에서 보인다. 그는 대마도출신으로 선박기술자인데, 조선의 배가 중국과 일본의 배에 못미친다고 보고한 뒤, 세종이 그를 불러 새로운 배를 제조토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 그와 관련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투화한 왜인 등구랑에게 명하여 마포에서 왜선의 체제를 모방하여 조선하게 하였는데, 배가 완성되자 여러진의 배를 양화도에 모으고 새로 만든 배로 적선을 삼고, 풀을 묶어 사람을 만들어 배 가운데에 늘어놓고 여러 화로를 어지럽게 발사하여 서로 싸우는 모양을 하고, 의정부와 육조에 명하여 가서 보도록 하였다."

또 성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왜 향화 등안길, 등구랑은 모두 국가에서 후대하는 자입니다. 등안길 아우는 부사(벼슬)직입니다. 삼보라는 일찌기 대마도에 사신을 보냈을 때 호행하였으므로 공로가 있고, 왜어를 번역하였으므로 다른 향화인과 같지 않은데, 서로 교체하여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불편하니 청컨데 그대로 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출신이었던 등구랑과 등안길 등에게 벼슬을 주고 일본어 번역을 맡기고 배 제조를 맡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등구랑은 일본식 배를 제조하였으나, 얇은 판자에 쇠못을 써서 배를 제조하는 일본식 배가 쉽게 부서지고, 물에 닿으면 쇠못과 나무판자 사이가 벌어져 물이 새는 단점이 드러났고, 조선의 배는 나무못을 써서 제조했기에 물에 닿으면 나무가 불어나 틈새가 없어져 물이 새지 않고 부서지지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식 배 제조가 실패하고, 조선의 배를 개량하는 방법을 사용한 결과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선의 "판옥선"이 제조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판옥선은 밑바닥이 널찍해서 빠르진 않지만 튼튼했으며, 화포 등을 사용하기에 용이했다고 전하고 있다. 즉, 속도에서는 일본식 배에 뒤쳐졌지만,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어 이순신 장군 등이 화포 중심의 해전을 치르는데 유리했던 것이다. 

다음은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들어온 가토기요마사(가등청정)의 선봉장이었던 사야기 김충선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김충선(일본명 사야가)은 제2 일본군 사령관 가토기요마사(병력 2만2800명)의 우 선봉장으로 휘하에 병력 3000명을 거느린 22살의 장수였다. 그는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북상 중에 곧바로 경상병마절도사였던 박진에게 서한을 보내 투항의사를 밝혔다.

그가 밝힌 투항의 서는 다음과 같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개하고 머리숙여 조선국 절도사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 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 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이겨서 화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이렇게 상륙하자마자 사야가는 휘하 병력 500명과 함께 조선에 투항하였다. 귀순이후 사야가는 조선에 조총제작 기술을 전해주는 한편, 곽재우 등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김충선 등에 의해 제조기술이 전수되어 광해군 때 실전에 배치된 조총. 하지만, 이조차 조선후기에 들어오며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사진=kbs)

또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울산성 전투에서 김응서와 함께 자신의 친정 군대인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임진왜란 당시에 치른 전투만해도 모두 78회나 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공으로 정2품 자헌대부에 올랐다. 

임진왜란 후에는 급속히 성장하는 여진족 세력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게 되자 자청해서 10년간 북방 국경 수비를 맡았다. 또 돌아오는 길에 이괄의 난을 맞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관군에 참여하여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잡아죽이는 공을 세웠다.

또 병자호란 때는 쌍령전투에서 청군 500기를 무찔렀으며, 조선이 항복하자 통곡한 뒤 국경수비를 맡았다. 하지만, 청나라측의 항의로 강제 해직되어 대구 우록동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사야가에게 김해김씨라는 성을 하사하였으며, 김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사성 김해김씨(우록김씨)'로 불리고 있다.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 김충선은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병조참판, 이조참판, 상호군, 부호군 등의 벼슬을 하였고, 이후 수많은 자녀들이 조정에 출사함으로써 명문가의 길을 걸었다. 또 김충선이 전해준 조총기술과 화포기술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박연), 하멜 등과 함께 조선의 무기제조 기술을 한단계 높여놓았으나, 숙종 이후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사상되고 만다.   

이러한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는 일제시대에는 조선이 조작해낸 이야기로 취급되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 취급을 받았고, 지금은 평화주의자로 한-일 양국으로부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일본 NHK와 한국의 KBS 등에게 사야가의 일대기가 조명된 다큐멘타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사야가 김충선도 말년에는 대구 우륵동에 있는 집에 칩거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것이 그의 문집 '모하당집'에 전하고 있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 친척과 이별하며 일곱형제와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 슬픈마음 설운 뜻이 없다하면 빈말이라"(술회가)

"남풍이 건듯 불어/ 행여 고향소식을 가져온가/급히 일어나니 어인 광풍인가/홀연히 바람소리만 날뿐 볼 수가 없네/ 허탈히 탄식하고 앉았으니/ 이 내 생전에 골육지친 소식 알길이 없어/ 글로 서러워하노라"(남풍유감)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nbsp;<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