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역사인물 열전(10) 중국 귀화인들과 두릉 두씨 시조 두사충

2019년 다문화 학생 수는 12만2212명. 학생 수가 줄고 있는 반면 다문화 학생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다문화 교육의 정의 및 내용에 대한 구체적 합의와 법령체계는 미흡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가 공존할 때 창의적 문명의 꽃이 피어나고, 문화 인류학과 다문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갖춘 사람이 미래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방탄소년단(BTS) 노래에 민속춤이 어우러지듯 다문화는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짐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밑바탕이 된다. <에듀인뉴스>는 우리가 지나쳤던 다양한 문화를 다문화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의 글을 통해 폭넓은 다문화 인식은 물론 다문화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콘텐츠도 제공하고자 한다​.

두사충의 사랑이야기가 그려진 뽕나무골목 벽화. (출천=두산백과)

[에듀인뉴스]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 멸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간 것을 제외하면, 중국에서는 전란과 왕조교체로 인해 한반도로 넘어온 이들이 더 많았다. 황소의 난을 피해 들어온 동방기독교와 페르시아 상인들, 발해, 거란 멸망에 따른 난민들, 그리고 금나라 멸망과 원나라 멸망에 따른 난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넘어왔다. 

​이 같은 현상은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도 나타났다. 특히 후금이 일어서서 요동지역을 공격함에 따라, 수많은 한인들이 압록강을 넘어와서 살게 되었다. 심지어 '모문룡'은 조선의 경내로 들어와 동광진이라는 진을 설치하고, 후금 배후를 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와함께 수많은 명나라 난민들이 조선으로 밀려들왔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숫자만해도 10만명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명나라에서 고관대작 벼슬을 지낸 집안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명나라로 귀환한 장수 이여송의 아들 이성충이 이자성의 난으로 죽자 그의 손자 이응인이 조선으로 건너와 살았다. 또 이여송이 임진왜란 때 조선여인 봉화 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천충은 거제도에서 피신해 살았다(농서이씨). 

​그 외 전호겸은 조부가 명나라 병부상서였던 전응양이고 아버지는 이부시랑 전윤애였으며, 아버지 강국태가 청주우후를 지낸 강세작(황해도 평산 정착), 명나라 수군제독 마귀의 후손인 마순상(전라도 광주 정착),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린의 손자인 진영소(전남 해남군 정착) 등이 그들이다. 

임진왜란때 참전한 팽우덕의 손자 팽부산(경남 창원 정착)을 비롯해 병부상서를 지낸 석성, 한종공, 선약해, 전엽, 왕즙, 정문경 등이 명나라 관료였다가 청나라 교체 이후 조선에 와서 정착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오면서 수많은 명나라 사람들이 따라들어왔다. 이들은 조선에 온 뒤 북벌계획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훈련도감에 귀속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훈련도감에 귀속된 명나라 출신 황조인(향화인)들만해도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본격적인 명나라 난민이 밀려들기 이전인 광해군 때 실록에 의하면, 광해군이 해안가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해 묻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업을 천시여겨 종사하지 않는데, 지금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듯 명청교체기에 중국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한반도로 밀려들왔는데, 평안도 이북에만 수십만명이 들어와 살았고, 안주 이북에는 전체 인구의 6-70%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피난민이라는 기록도 나온다. 그런 이유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는 이들에 대한 쇄환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을 피하고자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게 했고, 청나라 사신이 올때면 미리 연락을 줘 피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 후기 울산지역 향화인 조사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전 인구의 1.6% 이상 향화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 조정에서는 명청 교체 후,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하는 "소중화"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명나라에서 조선에 귀의한 이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만주와 일본에서 귀화한 향화인과는 다른 대접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이름도 "황조인"이라 이름 붙이고, 군역과 사역을 면제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이들 중 일부에서는 조선에 귀화되기를 거부하고, 명나라 황제국의 백성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중앙 조정에서만 군역과 사역이 면제되었을뿐, 지역에 따라서는 개별 관아나 백성들로부터 수탈과 차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 그리고 명청 교체기를 거치며 한반도의 인구는 일대 격변기를 맞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명나라의 중국에서 생계를 위해서 고기를 잡거나, 피난민들이 대거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원정온 명나라 병사들 중에서도 운명이 다해가는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조선에 머물러 사는 경우도 많았다.

두사충과 이순신의 인연을 주제로 한 뮤지컬 '달빛에 잠들다' (사진=수성아트피아)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명나라 장수출신이자 풍수지리 전문가인 두사충이다. 두사충은 중국의 두릉 사람으로 당나라 때 시인으로 유명한 두보의 21대 손이다. 명나라에서 있을 때부터 풍수지리 전문가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이여송 밑에서 지형 지물을 따져 진을 치도록 조언하는 참모역할을 하였다. 

​그가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의 산세를 살피고 "지세가 좋아 큰 인물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이여송에게 보고하여, 이여송이 조선의 맥에 혈을 자르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또 경기도 벽제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가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자 이여송이 그에게 책임을 물어 참수하려다 조선 장수 정탁과 이시발의 간언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들의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서 전하고 있다. 

​어쨌든 그는 1차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여송을 따라 명나라로 귀환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고, 국운이 쇠하는 것을 본 뒤, 2차 일본군 침입(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 산과 일건을 데리고 매부인 진린도독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왔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에는 장군의 무덤이 없다. 이순신 장군의 묘는 두사충이 점지한 아산 금성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출처=한국관광공사)

두번째 조선에 와서는 진린과 함께 전쟁을 치르는 이순신 장군 등과 깊이 친교를 맺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 아산 금성산에 묘자리를 직접 잡아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매부인 진린 등은 돌아갔지만, 그는 안주에서 발길을 멈추고 조선에 머물러 앉았다. 

​그가 조선에 머물자, 조정에서는 그가 자리잡고 살고 싶은 곳을 정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식읍을 하사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는 하루에도 금이 천량이 쏟아진다는 대구 경상감영 터(당시 경상감영은 상주에 있었다)에 자리를 잡아 거주하였다. 그리고 한 곳에 몰려살다가 참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둘째 아들 일건은 함경도 함흥으로 가서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 후 경상감영이 상주에서 대구로 이전하게 되자, "개인보다 나라가 먼저"라며 그가 잡은 터를 경상감영 터로 내놓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대구의 다른 지역에 있는 더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대구시 계산동 일대로 일명 뽕나무 골목이다.

뽕나무 골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가 조선에 정착하며 생업과 옷감 등을 만들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고치를 치도록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대구 뽕나무골목에는 두사충과 옆집 여인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그가 옷감 등을 위해 집 주변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고 살았는데, 하루는 뽕 잎을 따다가 담을 넘어 쳐다본 옆집에 아리따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 여인을 연모하게 된 두사충이 뽕잎을 따러 나무에 올라 그 여인을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두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옆집 여인에게 매파를 넣어 말을 건넸다. 그런데, 마침 그 여인도 남편이 죽고 혼자사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둘을 엮어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이외에도 두사충의 풍수지리와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이 있다. 그중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정탁과 이시발의 무덤 묘자리의 일화와 두사충 자신의 묘자리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두사충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정탁을 위해 정탁의 머슴과 함께 명당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문경의 어디에선가 머물며 데리고 온 머슴에게 연주패옥(옥관자 서말, 금관자 서말이 나오고 대대로 당상관이 나온다는 명당)의 명당자리를 가르켜 주었다. 이에 정탁이 아들을 시켜 머슴과 함께 다녀오도록 했는데, 문경 말모이 언덕 근처에서 머슴이 여기쯤이라고 손을 들어 가리키려할 때, 갑자기 말이 머슴에게 뒷발질을 해서 머슴이 죽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정탁의 아들이 끌고 온 말을 죽여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출처=조선 블로그)
두사충의 '감여요람'. 두사충이 조선 각지를 떠돌면서 지었다는 풍수지리서로 지금도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그래서 지금도 그 연주패옥의 명당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고, 말모이 언덕 근처로 수많은 풍수지리가들이 답사를 하며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두사충 묘지 관련 일화에도 전하고 있다. 즉, 두사충이 자신의 목숨이 다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 전에 보아 두었던 명당자리를 아들에게 가르켜 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가는 도중 조그만 고개를 넘어가다 너무 숨이 차고 못갈 것 같아 포기하고, 그 다음 묘자리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다음 묘자리로 가는 도중 목숨이 다해 숨이 끊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담티고개'만 전하고 있을 뿐 천하 명당의 묘자리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두사충은 처음 대구 근처인 대명동에 살다가, 계산동으로 집을 옮겨 살았다. 지금도 계산동에는 뽕나무 골목이라는 곳이 있고, 두사충을 기리는 모명재(명나라를 사모하는 집)가 남아있다. 그 후손들이 대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 두릉 두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둘째 일건의 후손들은 함경도에서 자리를 잡아 남북분단으로 생사를 알 길이 없다고 한다.

현재 한국의 두릉 두씨는 두 계통이 있는데, 하나는 고려 때 넘어온 두경녕을 시조로 하는 만경 두씨(김제 만경강 근처에서 살아서 일명 만경 두씨라고 한다)가 있고,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대구의 두릉 두씨가 있다. 대구의 두릉 두씨의 인구는 약 5700여명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nbsp;<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