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음식 열전(4) 다국적 융합전시장이 된 과자

(사진=픽사베이)

[에듀인뉴스] 빵과 달리, 과자는 서양과 동양에서 동시에 발전해왔다. 특히 서양에서는 소화를 시키기 위한 후식과 담소를 위한 식재료로 발전해왔고, 동양에서는 불교나 유교, 제례의식을 위한 차문화와 함께 발전하였다.

재료에 있어서는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이 빵과 함께 밀가루를 가지고 과자를 만들어왔다면,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양은 떡과 과자를 발전시켜 온 것이다. 

사실 과자(菓子)라는 한자 이름에서 드러나듯 과자는 과일이나 과즙의 형태에서 발전하였다. 즉, 초기 인류가 간식형태로 먹었던 과일이나, 말린 과일에서 그 시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본격적인 과자의 기원은 인류의 주요한 식재료인 밀과 쌀에 꿀이나 과즙, 사탕수수즙을 곁들이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해 채집이나 농경사회에서 수확한 밀과 쌀을 가지고 밀가루, 쌀가루 반죽을 해서 익히면서 꿀이나 과즙을 곁들이면서 과자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에서 과자가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에 대해선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으로 밀가루 반죽을 해서 구워먹은 또르티야(넌, 또띠야, 난) 형태를 과자로 볼 것인지, 아니면 빵으로 볼 것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효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빵이 아니라고 하면 과자가 되는 것이고, 발효빵 이전의 빵이라고 주장하면 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구워 먹으면서 맛을 위해 꿀이나 과즙, 사탕수수 등을 곁들여 먹게 되면서 과자가 탄생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탄생한 과자는 밀의 재배가 용이한 중동과 서양에서 밀가루를 이용하여 다양한 과자를 생산했다면, 밀의 재배가 용이하지 않은 동양에서는 쌀을 비롯해 다양한 잡곡이나 과일들이 과자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각각의 식생활 조건에 따라 발전해온 과자는 신대륙의 발견 등으로 설탕, 초코렛 등이 결합되면서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또 근·현대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밀과 쌀, 잡곡뿐 아니라 다양한 과일을 재료로 하는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과자가 발전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 서양의 과자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서양 과자의 시원은 페르시아 지방에서 나는 소맥을 가루로 빻아, 반죽을 만들어 구워먹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과자의 시원과 빵의 시원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식감을 돋우기 위해 벌꿀 등을 채집하여 곁들여 먹기 시작하면서 과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류가 벌꿀 등을 채집한 것은 농경사회 이전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만년전 동굴벽화에서도 벌과 같은 그림이 있으며, 이집트왕의 인장에서 벌꿀 모양을 조각한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밀가루 반죽을 구워 먹으며, 식감을 돋우기 위해 꿀이나 과즙을 발라벅기 시작하면서 과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바빌로니아 시대에 들어 빵이 분화되고, 이집트와 그리스 등을 거치며 빵과 함께 인류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시대에 빵과 과자에 곁들여먹는 과즙이나 꿀의 존재는 매우 귀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때, 인도를 침략했던 휘하 장군은 "인도에서는 큰 갈대에서 꿀을 채취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때의 큰 갈대는 사탕수수였다.

로마에서도 주식인 빵 외에 다양한 간식을 먹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귀족들 사이에서 과자 종류는 대단히 인기있었다. 심지어 카이사르 같은 경우 알프스에서 눈과 얼음을 가져와 우유와 술, 꿀을 섞어 먹었다고 하니, 오늘날 아이스크림의 원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과자는 교회와 수도원 등에서 종교 제례행사를 진행하면서 더욱 더 발전하였다. 그때 만들어진 과자가 갈레트, 고프르 등이다. 

​이렇듯 산업혁명 이전의 과자는 귀족들의 애용품이거나 교회, 수도원 등 종교집단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서민들은 크리스마스 등의 명절이 아니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과자를 만들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 값비싼 재료들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오븐 등 과자를 굽는 기기를 수도원에서 독점하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과자 산업이 발전한 것은 합스부르크왕가의 본거지이자 수도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고, 특히 귀족 문화가 발전한 파리 등에서 빵의 제조와 함께 과자 산업이 하나의 직업으로 분리되기에 이른다. 더구나 산업혁명이후 제분산업이 발달하면서 빵과 함께 제과점이 들어서게 되어 서민들도 과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거기에 신대륙의 발견으로 과자에 필요한 코코아, 커피, 설탕 등이 공급되면서 여러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선보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양의 과자는 그 재료나 종류로 볼 때, 동양의 과자보다는 훨씬 더 단조로웠다. 기껏해야 밀가루와 여러가지 잡곡을 섞은 것이고, 주 종은 여전히 밀가루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밀 재배가 원할 치 않았던 동양은 쌀을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잡곡이 과자를 제조하는데 사용되어,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특히 동양은 사찰이나 교회의 제례의식뿐 아니라, 각 가정에서의 제례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가정에서 과자를 직접 만들어먹는 일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

◆ 동양의 과자

​동양의 과자는 간식보다는 종교나 제례의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발전해왔다. 그것은 과자(菓子)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제례 때 과일이나 과실모양의 제례용품을 사용한데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동양의 과자는 불교, 또는 유교와 같은 종교, 또는 제례의식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과정을 거쳐왔다. 또한 사용되는 재료도 서양의 밀가루에 비해 쌀가루나 각종 잡곡이나 과일 등이 사용되어 그 종류도 훨씬 다양했다. 

​특히 인도에서 동양으로 전파된 불교나,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유교, 그리고 동양권의 다양한 제천행사는 과자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중 당나라 때 불교행사에서 더운 날씨 탓에 과일을 올릴 수 없었던 제삿상에 과일 모양의 과자를 얹어놓게 되면서 "당과자"라는 말이 생겼고, 이것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 전통의 "화과자"가 되었다. 이렇듯 동양의 과자 발달에서 불교는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차와 함께 먹는 간식이라는 이름의 '다식'이라는 과자가 생길 정도였다.  

​또한 동양의 과자는 재료와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에 '과자'라는 말로 통칭되기 보다는 '약과', '다식', '강정', '빙사과' 등의 개별적인 이름으로 불렸다.

다식은 녹말, 콩, 송화, 승검초, 밤, 검은깨, 밀, 찹쌀 등을 맷돌 등에 곱게 갈아서 체로 치고 꿀과 조청 등으로 잘 반죽하여 다식판에 박아내는 것을 말하며, 약과는 절에서 부처에게 공양하는 고급 과자의 일종으로 제사상에 육류나 어류를 금하면서 크게 성행하였다. 심지어 조선조 성종 때에는 약과(유밀과)가 서민들에게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할 뿐 아니라, 제조해서 먹다가 들키면 곤장을 맞기도 했다. 

이렇듯 불교와 함께 발달한 과자가 한국의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것은 삼국유사 김유신 전이다. 김유신이 백석이라는 사람의 꾐에 빠져 고구려로 납치될 뻔 했는데,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호국신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김유신에게 맛있는 과자(美菓)를 대접하며, 백석이 첩자라는 것을 알려줘 위기를 모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신문왕이 신부를 맞이하며 신부댁으로 보내는 폐백품목에 다식 등의 과자종류가 있어, 불교가 들어온 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전후로  과자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지만, 과자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애용되었는지에 대해선 사료가 엇갈린다. 일본의 나라시대에 펴낸 사료에는 "맥병(貊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때 맥병이 "맥 종족이 먹는 떡"이라는 것으로 삼국시대 초부터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추정이 있고,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이 가져온 물품에 "병(餠)"이 있어, 가락국기 초기부터 과자가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5세기 경에 만들어진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를 보면 불교 스님과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의 그림이 나오는데, 그곳엔 '차'나 '다식'이 그려져있지 않다. 

​그것으로 볼 때, 제천행사 등에 쓰이던 우리  민족 전래의 떡과 과자는 존재했지만, 이것이 불교 전래 초기에는 불교와 결합되지 않다가, 점차 불교와 결합되어 '차'와 '다식'의 문화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불교가 융성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사찰의 제례행사에서 차와 과자는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 되었고, 이로 인해 '차'와 '다식'의 문화가 크게 유행하여 민간에도 성행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고려의 유밀과는 그 맛과 영양이 일품이어서 왕의 행차시에 고을에서 올리는 빠지지 않는 진상품이 되었으며, 혼례식에 주로 등장했다. 더구나 원나라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한 충렬왕이 고려의 유밀과를 내놓자, 원나라 사람들이 그 맛을 보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며 극찬을 하고, 이를 "고려병(餠)"이라 이름붙였다는 기록도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 유행이 너무 지나쳐 19대 임금인 명종 22년에 유밀과에 대한 사용금지 명령이 내려지고, 유밀과 대신 나무열매를 쓰라고 지시했다는 것과 공민왕 2년에 유밀과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고 고려사에서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령을 내린 이유에 대해 유밀과를 만드느라 그 재료인 곡물과 꿀, 기름 등이 허비되고 물가가 올라 민생에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왕실의 잔치를 소연, 중연, 대연으로 나누고, 그 잔치에 따라 유밀과를 3기, 5기, 7기로 제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유밀과(약과)나 다식은 여전히 유행하였고, 그로 인해 왕실에서 또다시 금지령을 내려야 했다. 성종 때 지어진 '대전회통'에 의하면, 성종은 유밀과가 서민들의 사치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백성들은 물론 나라의 행사에도 금하고 어기는 자는 곤장을 맞는다는 법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과자는 종교나 황실의 제례행사에 쓰이던 것이 점차 일반 가정의 제례행사에 사용되어지며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서양과자와 동양과자의 만남

​우리나라에 서양 과자가 소개된 것은 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정동구락부에서 서양음식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 때 소개된 서양과자들은 북미대륙의 발달로 들어온 코코아, 커피, 설탕 등이 가미되어 우리나라 전통의 한과(유밀과, 다식 등)보다 자극적이었기 때문에 상류층에서부터 연말연시 선물로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다 1920년 처음으로 양과자점이 생겨났고, 45년 해방되기까지 약 140개의 양과자점이 있었과 10여개의 제과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시대 제과점은 모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것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 시작한 제과점은 1945년에 설립된 해태제과였다. 그후 동양제과가 설립되고, 제과업의 양대산맥을 이루다가 롯데제과까지 설립되어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양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어 해태제과 등에서 빙과류로 생산되고, 다른 기업체들도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제과업계의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최근에는 우리 전통의 한과류가 가미되어 동서양의 다양한 제과가 소비자들에게 각광받고 있으며, 각종 한국의 과자제품이 러시아 등지로 수출되는 효자상품이 되고 있다.

이는 동양의 과자와 서양의 과자가 만나, 새로운 과자들이 창조되면서 서양식 케익이나 비스킷, 쿠키 등보다 한단계 더 발전한 과자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국수에서 동서양의 국수와 쌀국수 등 각종 국수의 종합전시장이 된 것처럼, 한국의 과자시장도 동서양의 각종 과자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종합 전시장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라면이나 초코파이뿐만 아니라, 과자제품도 일본과 한국이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분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것이 공존하고 융합하면, 더 나은 것이 창조되어왔던 것을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국수의 라면이나, 빵의 초코파이와 같이 과자제품도 동서양 제품이 모두 망라된 한국, 일본, 중국의 경쟁력이 서양 전통의 파리, 이태리 제품을 능가할 날이 오고 있는 것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nbsp;<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