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효 만료 ‘교원능력개발평가’, 폐지가 답

(사진=전교조)

[에듀인뉴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교원능력개발평가’의 시효가 다 되었다. 그런데 교육부는 이 제도를 일몰 시키는 대신 더 강화하려는 기색이다. 물론 이 제도가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었고, 더 큰 효과가 기대된다면 강화가 답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효과 없이 부작용만 드러나고, 그 과정에서 행정력 낭비까지 상당했다면, 일단 폐지하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 답이다. 이 이름만 그럴듯한 교원능력개발평가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이 제도의 부작용은 언론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긴 목록이 만들어질 정도다. 일부 사학에서 재단 눈 밖에 난 교사를 골탕먹이는 수단으로 남용된 사례, 학생 생활지도 담당 교사 혹은 엄격한 교사에게 이른바 ‘노는’ 학생이 보복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부 몰지각한 학생과 학부모가 익명을 방패 삼아 특정 교사에게 묻지마 식의 보복성 응답이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악플이나 욕설을 적어 넣는 사례는 너무 흔해 기사 거리도 안 될 정도다. 반면 그 이름이 무색하게 이 평가를 통해 교원의 능력이 계발되었다는 미담 사례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여론이나 언론은 교사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조차 이런 부정적인 사례들이 자주 노출되며, 이를 상쇄할만한 긍정적인 사례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음에 유념해야 한다. 한 마디로 득은 없고 실만 많았던 것이다.

이는 애초에 이 제도가 충분한 고민과 설계 없이 여론에 떠밀리듯 들어왔기 때문이다. ‘능력개발평가’라는 이름만 해도 능력, 개발, 평가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개념이 셋이나 붙어 있다. 하지만 이 제도를 도입한 교육부, 이 평가에 응답한 학생, 학부모 중 그 누구도 이 세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적어도 다음의 세 물음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개발해야 할 교원의 능력은 무엇일까?”

“이 능력을 개발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를 북돋는 방법은 무엇일까?”

“평가가 능력 개발에 적합한 도구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교원능력개발평가’라는 제도가 개발, 도입되는 과정에서도, 시행되면서 갖가지 문제점을 드러내는 과정에서도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 역사상 ‘교원의 능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와 합의를 시도한 적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싶다.

그 평가 방법이라는 것이 정량적 방법, 즉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한 사람들에게 교원의 능력에도, 능력의 계발에도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교사들에게 수치화된 점수를 매기는 것, 그리고 이 점수 매기는 과정에 학생, 학부모(특히 학부모)를 참가 시킴으로써 교육을 ‘백년지 대계’가 아니라 고객 만족도 조사의 대상인 ‘서비스 상품’으로 만드는 것  뿐이었다. 이 평가를 통해 교사들을 점수경쟁으로 내 몰면 훨씬 통제하기 쉬워진다는 권력 욕구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동기까지 작용했다. 당시 참여정부의 입시정책이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 불릴 정도의 실패작이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른바 사교육비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사진=동영상 '죽음의 트라이앵글' 캡처)
(사진=동영상 '죽음의 트라이앵글' 캡처)

참여정부는 “공교육 부실론”이라는 유체이탈 화법으로(공교육의 운영 주체가 정부가 아니면 누구인가?) 그 불만을 정부가 아니라 교사에게 돌렸다. 입시제도가 잘못 디자인 된 것이 아니라 교사가 무능하고 게을러 공교육이 부실하기 때문에 사교육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교육은 경쟁을 하지만 교사는 철밥통이라서” ‘부적격 교원’이 득실거린다는, 즉 “교사의 철밥통을 깨야 공교육이 정상화된다”는 논리가 이어져 나왔다.

이게 바로 ‘교원능력개발평가’ 도입의 배경이다. 애초에 이 제도는 능력계발이 아니라 교사 중 일부를 ‘부적격 교원’으로 낙인 찍어 잘라냄으로써 교직사회를 의자뺏기 싸움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정부가 잘못 짠 입시정책에 대한 불만을 교직사회에 전가할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다만 교직사회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세자 “능력개발”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일단 ‘평가’를 도입한 것이다. 즉 교사에게는 ‘능력개발’에 방점을 학부모에게는 ‘부적격 교원 퇴출’에 방점을 찍어 도입한 것이다. 물론 이 제도로는 능력개발도 퇴출도 되지 않는다. 일종의 여론 몰이용 꼼수에 불과했고, 정권이 바뀌면서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을 뿐이다.

애초에 능력개발과 부적격자 퇴출은 같이 가기 어려운 목적이다. 능력개발은 잠재성이며 미래형이지만 부적격 판정은 과거완료형이기 때문이며, 능력개발은 현재 교사의 능력이 우수하다는 전제하에 이를 더 효율적으로 극대화 할수 있는 방향을 찾는 신뢰의 과정이지만, 부적격 판정은 현재 교원의 능력이 기껏해야 보통 수준이라는 전제하에 거기에도 미치치 못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불신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개발을 위한 제도와 부적격자 퇴출을 위한 제도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는 ‘부적격’의 기준이 무엇인지 정하고 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즉 부적격의 자격을 정해야 한다. 우선 무능한 교사(탁월하지 못한 교사)와 부적격 교사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무능한 교사는 교사로서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는 담당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탁월한 성취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상위 10% 내에 드는 학생들이 치열한 경쟁 끝에 교사로 선발된 역사가 이미 20년이 넘었다.

교사에게 얼마나 탁월성을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학교에 무능한 교사는 드물 것이며, 지금 학부모 세대, 혹은 정책 입안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 무능한 교사들은 대부분 퇴직한 지 오래다.

만약 현재 재직중인 교사들이 여전히 무능하다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무능하게’ 전락시킨 구조적, 제도적 문제를 찾을 일이지, 무능하다며 퇴출시키고 새로 유능한 인재를 충원하여 다시 무능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반복할 일이 아니다.

류현진 급 선수를 스카우트 해서 운동장 줄 긋기, 유니폼 세탁, 야구 장비 구입 및 손질 따위 일을 몇년간 시킨 뒤에 경기력이 떨어진다며 방출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부적격 교사는 능력을 불문하고 정신적,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어 교사라는 책무를 맡기기 곤란한 경우다. 하지만 이미 기존 제도로도 부적격 교사의 퇴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다. 금전, 성적, 생활기록부, 성범죄 관련 비리는 엄격하게 불관용 원칙이 적용되어 사실상 즉시 퇴출이다.

더구나 성범죄의 경우는 진위여부가 가려지기도 전에 단지 고발이나 진정만으로도 직위해제이며, 징계 양형도 파면, 해임 뿐이다. 옛날처럼 여학생 어깨 슬슬 쓰다듬거나 집적거리는 교사는 발 붙이기 어렵다. 6개월 이내에 그 직은 물론 연금까지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아동보호법은 더 엄격하여 어떤 이유로든 아동학대 혐의를 받으면 파면은 물론 이후 5년간 학원 등 다른 업종에도 취업할 수 없다. 이 정도면 부적격 교사는 물론 적격 교사, 심지어 탁월한 교사조차 아차 실수로 목이 달아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평가는 상위 10% 이내에서 충원된 교사(세계적으로 이는 우리의 큰 장점이다)를 제대로 활용하고 키워나가도록 하는 진정한 능력개발 평가다.

여기서 평가의 교육학적 의미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평가는 피드백이다. 교육학에서 피드백이란 고객의 목소리를 듣는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행위, 작업의 결과를 점검하고 이를 통해 개선할 점을 찾아 발전하는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시효를 다한 교원능력개발평가를 시간에 쫓기듯 땜질하지 말자. 일단 실패한 정책임을 인정하고 완전히 그 숨을 끊어버리자. 그리고 교원의 능력, 평가의 목적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지점으로 돌아가 다시 차근차근 제대로 된 길을 밟아 보자.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