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경기대학교 초빙교수

(사진=유튜브 캡처)

[에듀인뉴스] 대부분 1월 중순에 짧은 방학을 했던 학교들은 설 연휴가 지나면 잠깐 등교하고 2월 한달 긴 겨울방학에 들어간다.

방학은 본래의 뜻이 방학(放學 ; 공부를 손에서 놓다)이지만 부모와 아이들에게는 긴장의 연속이 될 수 있다. 초등학생에게는 체험학습과 학원수강이 기다리고 있고 중고생에게는 학년을 앞당겨 선수학습을 준비하는 과외 등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만 내 자녀를 학습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할까? 엄마 걱정은 끝이 없다.

이 근심거리는 사교육 여부와 관계없이 공통으로 형성되는 엄마의 가슴앓이다. 한국에 태어난 교육형벌이다. 부모 탓이 아니다. 교육제도와 교육정책이 근본부터 썩어 문드러진 탓이다.

그렇지 않다면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 말해보라. 하기야 이런 푸념도 하세월이지 다 부질없다. 잠시 타임머신이라도 타보자.    

세종 때 정원 200명으로 운영된 성균관은 양반 자제라 하더라도 생원·진사의 자격을 가진 자라야 입학할 수 있고, 정원이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생도(四學生徒) 등 기타 지원자를 입학시켰다.

유생은 문과(文科) 및 생원·진사의 초시(初試)인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에 합격한 자와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로 한정했으니 성균관은 명실공히 조선시대 최고의 인재 양성기관이었다.

충신과 간신이 모두 성균관에서 배출되었고 어제의 동무가 내일의 적으로 맞서는 숙명의 요람이기도 했다. 수양대군 세조에 저항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한 성삼문과 사육신, 그 반대편에 섰던 신숙주는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한 친구들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공부생활은 고단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암기식 공부와 토론식 수업을 병행하였다. 때로 임금님이 밤늦게 방문하여 그들과 터놓고 학문을 논하기도 했으니 자연 유생들의 자부심은 높기만 했다.

드라마 육륭이 나르샤(사진=SBS 캡처)

성균관 학생들은 공부만 한 것이 아니다. 데모도 열심히 했다. 권당(捲堂) 즉 성균관 기숙사 방을 비운다고 하여 유생들이 임금에게 저항할 때는 손에서 책을 내려놓고 우르르 뛰쳐나가 집단시위를 했다. 때로 대전 앞에 몰려가 상소문을 올리고 주야로 농성했다.

주자학을 이념으로 삼은 유생들이니 시위의 내용은 대체로 충의를 지키자는 것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당파의 사주를 받아 시대에 역행하여 수구 꼴통보수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사면(赦免)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기묘사화(1519년) 때는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충신 조광조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집단시위를 했고, 1902년에는 성균관 유생 신채호 등이 이하영 등의 매국적 음모를 규탄하며 처벌을 상소했다.

그러나 동학 교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교주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펼칠 때는 유생들이 민중을 등지고 동학 탄압을 주장하는 집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고귀한 전통과 자가당착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역사는 눈물을 흘렸다. 

성균관 유생들이 관 내외 문제로 불만이 있을 때 시위를 하느라고 관에서 모두 물러가는 것을 권당(捲堂)이라 했고, 권(捲)은 ‘거두다’는 뜻이니, 오늘날의 방학(放學)과 그 뜻이 비슷하다.

데모하려고 쉬는 것은 아니지만 지루한 일상의 공부를 떠나 잠시 ‘손에서 학문을 놓다’는 뜻이 방학이니 방학(放學)은 학생들에게 천국의 시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위와 방학은 청년학생들의 오랜 전유물이다.

생각해보면 3.1 만세독립운동과 4.19 의거는 청소년들의 집단시위로 촉발되었다. 방학은 유익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한 임시방학은 위대하다.

(사진=유튜브 캡처)

우스개 얘기이지만 필자가 조치원고등학교(지금의 세종고등학교)에 재학하던 학창시절 우리 학생들은 두발을 바리깡으로 깨끗하게 밀어대는 선생님들에게 대항하여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 담장을 넘어 미호천 쪽의 제방 길로 말들처럼 뛰어 도망갔었다.

시위는 하루 만에 진압되었고 이튿날 우리는 운동장에서 선생님들에게 전교생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두들겨 맞았다. 엉덩이가 터지도록 매를 맞으면서도 의연하고 씩씩했던 학생회장 선배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2005년에 고교생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두발자유화를 외치며 촛불시위를 하는 장면이 9시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 지방의 작은 학교인 조고(조치원고) 두발자유화 촉구 집단 탈출 시위야말로 촛불시위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내 모교가 자랑스런 단 하나의 이유다. 

내 어릴 때는 방학 때마다 지금의 대청댐에 잠긴 충북 문의면 외가를 찾았다. 금강은 늘 햇빛 속에서 빛났고 물자라와 어른 팔뚝만한 물고기가 언제든 불쑥 고개를 내밀었으며, 전설 속의 물뱀은 저편 강둑 끝까지 헤엄쳐갔다.

종업식이 끝나자마자 내 살던 연기군 서면 청라리를 등지고 외가로 달려가 개학 전날까지 머물렀다. 물살이 급하고 풍경이 아우라진 금강에서 하루종일 감시하는 외할머니를 따돌리고 외사촌들과 물놀이를 하던 추억은 동화 속 이야기만 같다.

그 추억 때문에 필자는 평생 ‘강변살고’ 있다. 강변에 살지는 못하지만 가슴 속에 늘 강변을 들여놓고 사는 기쁨을 누리니, 이것이 바로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다.

자, 겨울방학이다. 학원수업과 과외로 벌써부터 방학을 반납한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아이들로 하여금 캠프와 자연, 영화와 연극, 여행과 놀이를 누리도록 그 가슴들에 한가득 모험심을 살게 하자. 엄마야 누나야 방학 살자. 제발.

김대유 경기대학교 초빙교수
김대유 경기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