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역사교과서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취재노트] 역사교과서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 한치원 기자
  • 승인 2015.10.23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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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한치원 기자]

역사교과서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22일 오후 3시, 전국의 중·고등학교 교실과 학생들 가방 속에 있던 역사교과서가 청와대를 방문했다.

역사교과서가 청와대를 방문한 건 처음이다. 그런 만큼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언론도 주목했다. 국민과 언론은 역사교과서가 청와대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꽤나 궁금했다.

이날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매우 지체 높은 분들의 영접을 받았다. 청와대에선 역사를 매우 중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를 맞이했다.

여야 대표들도 청와대에서 역사교과서를 맞이했다. 김무성 새누리당·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원유철 새누리당·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함께 했다.

대한민국은 역시 대단한 나라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 말처럼 대한민국은 분명 역사를 매우 중시하는 나라였다. 헌법 전문에 명시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사실 이날 청와대 방문은 역사교과서 홀로는 아니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수많은 청년들, 먹고살기 힘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풀어야 할 경제 살리기 법안들도 청와대를 찾았다.

역사교과서가 드디어 청와대에 도착했다. 먼저 박근혜 대통령이 “안녕하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박 대통령은 미소를 머금으며 접견실로 들어섰다.

박 대통령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박 대통령은 최근 세계 최강대국인 중국, 미국 정상들과 연이어 정상회담을 한 터였다. 

박 대통령과 여야의 수뇌부가 화기애애한 인사를 마친 후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역사교과서가 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사실 박 대통령이나 김 대표는 청와대에 역사교과서를 초청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들은 외교문제나 청년 일자리, 경제활성화 관련 법을 초청해 자신들이 선호하는 주제만 다루려고 했다.

그러나 야당이 역사교과서 문제도 청와대에 초청해야 한다고 맞서 그나마 역사교과서도 청와대를 방문하게 된 자리였다.

불청객이 찾아오면 그렇듯 역사교과서 문제가 나오자 청와대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엄습했다. 급기가 한 치 양보도 없는 설전이 벌어졌다. 살기마저 감돌았다.

역사를 중시하는 민족다웠다. 역사교과서의 등장에 싸움은 시작됐다.

자신들의 생각하는 역사만이 옳다고 설(說)을 풀어댔다. 자신들이 역사를 더 많이 사랑하노라고 싸우기 시작했다. 사랑에는 양보가 없다더니 그야말로 설전이 본격화했다.

먼저, 문재인 대표가 박 대통령을 향해 쨉을 날렸다. 그는 말했다. “국민들은 역사 국정교과서를 친일미화, 독재미화 교과서라고 생각합니다. 또 획일적인 역사교육을 반대합니다.” 뒤이어 이종걸 원내대표도 문 대표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야당의 주장을 사실상 뭉개버렸다. 박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역사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여야 정치권은 국회에 산적한 현안 법안들을 처리하는데 힘을 쏟자”고 받아쳤다.

설전은 계속됐다. 회동 전체 1시간 50분 중 30분 이상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1개 주제로 가장 지체 높은 분들이 30분 이상을 토론한 건 대단한 ‘사건’이었다. 

어쨌든 대통령을 비롯한 5명이 1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수업’을 했다. 주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였다. 하지만 수업은 부실했다. 각자 자기주장만 내세우니 토론이 될 수 없었다. 

이날 토론에서 한쪽은 국가가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자고 주장했다. 반면 한쪽은 그런 주장은 다양성을 해치는 독재적 발상으로 정권에 입맛에 따라 역사교육을 왜곡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이날 청와대의 ‘역사교과서 토론수업’은 아이들 눈으로 바라보면 ‘0’점이 분명했다. 역사가 비웃고 아이들의 개그 소재가 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여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들은 상대방 비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있으니 그냥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을 비롯해 참석자들이 뜻을 같이 했다”면서도 “국정화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부실수업’을 했다는 자백이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청와대를 나와 기자들에게 “일치되는 부분이 안타깝게도 하나도 없었다”면서 “거대한 절벽에 마주한 것 같은 암담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역시 ‘소득’이 없는 부실수업‘이었다고 고백했다.

문 대표는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역사인식이 상식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면서 “한마디로 왜보자고 했는지 알 수 없는 회동이었다.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이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비난 대열에 빠질 수는 없었다. 문 대표가 “암담함을 느꼈다”고 말한 것을 빗대 “저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야당의 역사교과서 인식에 대해 암담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지체 높은 어른들의 '역사교과서 초청 토론수업’은 결국 ‘부실수업’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여야 정치권 인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밥값'은 해야 했다. 

그들은 무리지어 무리(無理)한 주장을 쏟아냈다. 언제나처럼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상대방 비난에 열을 올렸다. 온갖 표현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비난했다. 이런 일에는 대단한 전문성과 열정을 갖춘 '꾼'들이었다.

사실, 이날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토론으로 결판 날 의제가 아니었다. 대통령이나 여야 대표도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걸 알면서 역사교과서에 대해서는 자신들 할 말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들 모두 이구동성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역사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정말 역사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으면 싸울 일이 없는 것처럼 그나마 봐 줄 수 있는 건 이들이 '역사에 애정이 있구나' 정도였다.  

이들이 역사를 사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싸울 명분은 충분했다. 각자의 논리도 그럴 듯 했다.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의견차를 좁히길 바라는 건 연목구어였다. 

2015년 10월 22일은 역사교과서가 교실 문을 나서 청와대를 방문한 의미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만 난무한 날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국민대통합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그런데 지금은 2개 사안 모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에 빠져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대통합도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참으로 우둔한 일이다. 우둔의 주체가 누군지는 각자 상상의 몫이다.  교과서를 국정제로 해야 역사교육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에 선뜻 동의가 안된다.  

이래저래 정쟁에 휘말리고 이념에 찢긴 역사교과서가 걱정이다. 문제는 아이들이다. 역사교과서 문제의 해법 찾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역사교과서가 교실 문을 나서 청와대를 방문한 날, 중국 발 미세먼지는 서울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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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원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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