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에세이에 투영된 교육 시각의 문제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의 한 학교에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그만 두시고 젊은 여교사가 새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녀는 원래 가르치던 대로 수업 시간마다 매일 학생을 지명하여 산수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도 칠판 앞에 나오면 우두커니 서 있을 뿐 누구 한 명 문제를 푸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낯선 교사에게 긴장하나 싶어 최대한 상냥하게 문제를 풀 것을 권했지만, 아이들은 그저 우물쭈물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혼자 공책에 문제를 풀 때는 척척 잘 맞추는 아이들조차 칠판 앞에 나와 문제를 풀게 하면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선생님이 시키는데 하지 않는 거니?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해야 선생님이 가르쳐 줄 거 아니니?"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있을 때,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용기 내어서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제가 모두 앞에서 이 문제를 풀어버리면, 이 문제를 모르는 다른 친구가 실망할 것 같아서요." 

인디언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해야 하며, 서로의 상처를 살필 수 있도록 배워온 것이었습니다.

친구 중 산수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는 것을 안 아이들은 그래서 선뜻 문제를 풀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린 마음에도 교실 안에서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를 가려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경쟁이며 이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을 아이들은 서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머릿속에 쌓는 지식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쌓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이 성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우열 경쟁을 강요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열 경쟁 속에서 가장 많이 겪을 수 있는 패배의 아픔과 열등감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우정과 화합, 배려를 먼저 가르치고, 자연스럽게 선의의 경쟁으로 이끄는 것이 나은지, 판단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세상에 어느 것도 정답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것이냐 아니면 최선을 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분명 그 안에 아이들을 위한 답은 있습니다. 

- ‘따뜻한 하루’(외교통상부 비영리법인)의 ‘따뜻한 감성편지’ 중에서 

[에듀인뉴스] 위의 글은 인문학적으로 좋은 글일 지는 모르겠지만 사회과학적 학습과 성찰은 부족한 글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등학교 교사로서 나의 의견을 말해보고자 한다. 

일단 예시 상황에서 그려진, 교실에서 산수나 수학 문제를 칠판에 나와서 풀게 하는 모습은 비교육적이다. 

인디언 부족과 상관 없이 이것은 보편적인 도덕의 문제이며,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결여된 교사의 행위일 뿐이다. 

30명 가까이 학생이 함께 공부하는 교실에서 못 풀면 창피를 당하게 되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이러한 비교육적 행실을 모델로 해 교육철학을 논하는 것 자체가 위의 글이 시작부터 제대로 된 교육철학과는 거리가 먼 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실 안에서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를 가려낸다는 것'은 경쟁 혹은 정시, 수시 등 입시제도와 별 관계가 없다. 누구도 교사에게 '교실에서' 잘하는 아이, 못하는 아이를 가려내라고 한 적 없다(일부 개념 없는 교사들이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하고 못하고 가려지는 것은 교실에서 수업 중에서가 아니라 시험 결과로 학생 개개인이 스스로 혼자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험 성적이나 등수는 개인별로 통보되지 전체에 공지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점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풀었던 수학 문제가 틀렸을 때, 내 논리에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반성하는 그런 태도는, 교육학적으로 고취되어야 하는 태도이지 폐기해야할 비교육적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은 그러한 자신의 논리 오류를 시험을 통해 깨달으면서 자기중심성 내지 확증편향의 사고를 극복해 나가도록 교육받는 것이며 도덕적으로는 보다 겸손하고 배움의 태도를 갖는 인격을 수양해 가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 나타나는 경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경쟁에서 이기라'거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사는 없다. 최소한의 교육철학이 탑재된 교사라면 그런 발언을 할 리는 없다. 

한국의 학생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모습은 인간 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 시장의 원리로서 이해해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고, 그 선택을 위한 가치의 상호 확인이 벌어지는 공간으로서 시장의 기본 메커니즘이 학력시장(markets for college entrance)에서 나타나는 것뿐이다.

학생 개인은 그저 자신이 '선택'하고자 하는 대학교를 가기 위해 노력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므로)할 뿐인 것이고, 그 대학교를 그 학생만 가고 싶은 게 아니기에 (대학도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을 선택하게 되므로) 당연히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는 정확하게 상품 시장에서 구매자가 가격을 보고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에서 볼 수 있는 경제학적 원리다. 구매자도, 판매자도 모두가 서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살지 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교사도 학생에게 그 학생이 가고 싶어하는 대학교에 '가야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선택의 자유에는 경쟁이라는 현상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이것이 시장의 기본 원리다. 시장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즉 모든 학생들이 국가에 의해서 지시된 대학교와 전공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학생도 대학교도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학생도 공부를 할 이유가 없고 대학교도 교육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

이런 사회가 저 위의 '좋은 글'의 저자가 꿈꾸는 사회일까? 자신이 꿈꾸는 이상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될 때 사회과학적으로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는 안중에도 없고 인문학적 공상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학생들이 경쟁적 상황에서 하는 공부보다는 지식을 탐구하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껴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 더 교육적이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겠다.

일선 교실에서 교사는 당연히 그렇게 학생들에게 말한다. 당연히 머리 속에 쌓는 지식만이 중요하다고 어떤 교사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교사도 학생들에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혹은 한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학생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 즉 가르치는 내용의 의미를 설명한다. 단지 학생들이 그런 수업을 어려워하는 것이다. 

절대 다수 고등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우는 학습 내용의 깊은 의미 보다는 단순히 시험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한다. 지식을 탐구하고 사고 능력을 배양시키려는 노력은 그러한 단순한 학생들의 희망 앞에 말그대로 소 귀에 경읽기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원하는 것을 쉽게 얻으려고 하는, 즉 최소 비용으로 얻고자 하는 (우리가 ‘이기심’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즉 학생들의 그런 경향은 당연한 상수에 가까우며 교사는 이를 감안해 수업과 평가를 설계하게 된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도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혹은 우리 사회가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사가 학생에게 대하는 태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실 수업시간에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애초부터 지식을 탐구하는 마음이 강한 학생이라기 보다 그 수업이 자신에게 '필요'하고 그래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성실히 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글처럼 인간이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글에 쉽게 감동을 느끼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이 사실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다. 단순히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최선을 다한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배민 서울 숭의여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