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정체성의 심리학' 저자인 박선웅 고려대 교수는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정체성 연구의 전문가이자 심리학과 교수다. 

그는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오랜 시간 자신의 길을 찾아 좌충우돌하였다. 공군 학사장교로서 군 생활을 마치고 대학교 교직원, 국회이원 보좌관, 다시 대학교 교직원으로 살다가 서른이 되기 직전 심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자신의 길,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했던 시간은 자연스럽게 정체성 연구로 이어졌다. 그의 글에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이젠 한평생 살면서 써나가고 싶은 나의 인생의 줄거리는 무엇인지, 나의 삶을 통해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세상에 말하고 싶은 나의 인생은 무엇인지 묻고 싶어졌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사람이 죽어 남기고 싶은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에게 회자될 이야기가 없는 이름은 허망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 이는 언제 어디서든 지키고자 하는 삶의 원칙일 수도 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추구하고 싶은 가치일 수도 있다.

정체성이 잘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자신이 행복한 순간은 언제이고, 자신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공통으로 하는 말이 사회나 부모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에 뛰어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공부만 하느라 자신의 영혼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둘째, 자신의 목적지가 찍힌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상당 부분 내렸다는 것이다. 가야 할 도착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기만 하다면 결국 가기로 한 곳에 도착할 수 있다. 

셋째, 삶에 대한 지침,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알고, 가야 할 곳을 알면 어떤 일에 집중하고 어떤 일은 거절하고 어떤 일은 미뤄둘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심리학자 제임스 마샤(James Marcia)는 누군가의 정체성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탐색했는가. 둘째,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는가이다.

이 두 요소에, 즉 탐색과 신념의 여부에 따라 네 가지 정체성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정체성의 획득, 유예, 폐쇄, 혼미이다. 

정체성 형성이 큰 이슈가 되는 이십대를 상대로 정체성 상태를 연구한 결과(사회정신건강연구소 2007)에 의하면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는 정체성 획득 상태에 있는 사람이 현저히 적고 반면에 정체성 폐쇄 상태에 있는 사람은 현저히 많다는 것이다. 

무려 91%에 해당하는 한국의 이십대들이 정체성 폐쇄(66%)나 혼미(25%) 상태에 있음이 드러났다. 이에 비해 획득(7%), 유예(2%)상태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다행이도 요즘 한국사회는 정체성이라는 화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출판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무려 200쇄를 훌쩍 넘기며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는 책이 김수현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이다. 이에 앞서서는 역사상 최장 기간 1위였던 책은 일본 작가인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였다. 

이보다 앞서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통해선 일제강점기와 6.25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루면서 달려온 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니 왜 우리의 영혼이 말라비틀어졌는지를 성찰하게 해 주었다. 

성찰의 결과는 ‘헬조선’이란 끔찍한 진단서였다. 결국 이런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용기 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것은 하완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이다. 이후엔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 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항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고 있다. 

꽃집 ‘수다 F.A.T’를 열고 플로리스트로 살아가는 손은정, 44개국 세계일주를 다녀 온 ‘꼬맹이 여행자’ 장영은, 여행작가, 소설가, 인생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전직 KBS 아나운서 손미나 등이 대표적인 정체성 탐구의 주인공이다.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자. 누군가 항아리에 큰 돌을 하나씩 넣어 항아리를 가득 채운 후 “항아리가 가득 찼는가?”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을 했는데 그가 또 다시 조그만 자갈을 꺼내 항아리에 채워 넣기 시작한다면? 큰 돌들 사이에 조그만 자갈이 가득 차니 다시 항아리가 가득 찼다고 할 것인가? 여기에 이젠 모래로 가득 채우고 또 그 다음엔 물을 가득 부으면 항아리엔 물이 가득 차게 된다. 

이 실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노력을 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이 실험이 주는 의미는 만약 큰 돌을 넣지 않으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 왜 중요한 가를 정확하게 짚은 것이다. 인간은 죽지 않고 영원히 건강하게 살 수 없다.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특히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더욱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해야만,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만 우리 삶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겐 하루 24시간의 공정한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죽는다. 따라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만 한다. 즉 인생의 큰 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큰 돌을 찾아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정체성은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조화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정체성이 있다는 것은 곧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 그동안 우리는 이를 잊고 단지 타인이 정해 놓은 성공의 길만을 따라 인생길을 그렇게 소모적인 경쟁에 매달려 험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 속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다시금 외친다. 옛것을 통해 새롭게 배우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정체성이란 위에 제시한 모든 사실과 과정을 인지하고 자신의 삶에 심어 놓음으로써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지금 이 시대의 <미움받을 용기>의 후속편이 아닌가 한다. 내 안에 숨겨진 진짜 나를 찾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정체성임을 잊지 말자.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