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점차 내 편 아니면 네 편으로 갈라지고 사람들 사이에 다양한 생각을 통한 공감과 소통은 소원(疎遠)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는 격리, 봉쇄, 사회적 거리 두기 등으로 사람 사이의 신체적, 심리적 교류를 더욱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국가에 따라서는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편 가르기에 의존하여 유권자를 관리하며 궁극적으로는 권력 유지에만 집중하는 정치 행태를 펼치고 있다. 이로써 공동체의 결속과 나눔, 배려, 연대 같은 정치 철학이나 대의(大意)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는 피폐해졌고 이를 부추기는 막말이나 편견은 난무함으로써 사람 상호 간에 혐오감만이 고조되어 갈 뿐이다. 그뿐이랴. 어디든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속성상 거짓말도 수없이 반복되면 진리처럼 굳어지는 현상이 세상의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이나 전문가 집단은 이런 거칠고 험한 세상에 눈과 귀를 막을 수 없기에 최선의 비판과 평가를 주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빈도가 지나쳐 거의 일상이 되다 보니 이젠 아예 욕하면서 닮아가는 최악의 현실로 치닫게 된다. 평소 자신이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 그를 자주 언급하다 보면 점점 그와 닮아가는 것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괴물은 또 다른 괴물을 낳는다’고 했으며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지 않는가. 실생활에선 마치 고된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나중엔 더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엔 온통 혐오를 유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과 소속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책 없는 편향된 사상의 노예가 되어 막말, 불법, 탈법, 폭력 행위로 혐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일상의 삶 자체가 정치와 깊숙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의 정치에 대한 기대엔 늘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명분 없는 정쟁에만 빠져 있고 좁쌀 정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파업은 무노동 무임금의 경제원리를 농락하고 공공성을 파괴하고 민폐를 끼침으로써 국민의 무수한 원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망적이다. ‘되’로 주면 ‘말’로 받는 게 세상의 이치라 하지만 ‘말’로 주고 ‘되’로 받거나 ‘쪽박’을 차는 작금의 정치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행위가 무한 반복되기에 분노와 적개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한 정치인들에게 온통 실망이고 답이 없다. 이런 상황을 두고 성인군자라도 어찌 감정을 삭일 수만 있겠는가. 이제는 국가정책에 직접 참여로 국민의 목소리를 높이고 연대 행위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자제하고 심지어 포기한 채 마음을 쓸어내리기 일쑤다.

세상이 그렇게 어둠에 물들어 버리고 이에 공모하는 철저한 기득권자와 옹호 세력으로부터 하루하루 위태위태한 국민의 삶은 무한 반복되고 있다. 앞으로도 결코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어디 정치뿐인가? 가정이 폭력으로 얼룩진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일찍이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이다”라고 피력했다. 가족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는 가장은 슬하의 자식들이 그를 혐오하면서 그대로 닮아간다. 그래서 가문의 역사를 세습하듯이 살아간다. 

학교는 어떤가? ‘스쿨 미투’ 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지며 교육계를 오염시키는 막말의 현장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언어 또는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 밑에서는 학생들도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간다. 결국 학생들이 폭력교육을 받으며 인생의 청춘기를 보내는 꼴이 된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일부 성직자는 일치와 화합, 평화라는 종교의 역할과는 정반대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편향된 사상으로  극한 막말을 쏟아내 혐오를 유발하고 있다. 또 금전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 자녀에게 종교 권력을 승계하는 세태는 신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로 인해서 국민은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숙고하게 된다. 

문제는 신도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직자를 닮아 신앙심마저 오염된다는 것이다. 기업인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엔 인도네시아에서 봉제업체를 운영하는 한국인 대표가 현지인 직원 3,000여명의 임금 4억8000만원 등 70여억원을 떼먹고 야반도주한 사건의 후유증이 2년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현지에 진출한 2,000여개 한국기업까지 덩달아 이미지를 훼손하고 현지인의 혐오감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실망과 분노의 인물들이 어느덧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삶은 다양한 영역에서 연결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히 초연결사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혐오 유발자들의 막말과 편법, 불법,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인해서 이젠 우리의 마음속에 혐오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자신도 모르게 입에 달라붙고 마음까지 오염시켜 간다. 그래서 선량한 다수의 국민이 그들처럼 될까 극히 우려하게 된다. 

일찍이 니체가 말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주목하게 되는 까닭이다.

세상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플루엔서(Influencer)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좋은 세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더욱 좋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큰 바위 얼굴을 보라. 존경과 경외의 인물은 그를 닮은 사람을 배출하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언론이나 학교 교육, 도서 출판을 통해서 사람들의 악행보다는 선행을 세상에 더 많이 드러내자.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청소년들이 혐오 유발자들로부터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혐오는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주의를 유발하게 된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매사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또 존경하는 인물, 자신의 롤 모델이나 큰 바위 얼굴을 가슴 속에 품고 닮아가도록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혐오 유발자를 극복하는 삶과 교육은 이제 새로운 민주시민교육으로 자리를 잡아 온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얻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역사 창조이다. 이것이 코로나19 시대 이후 혁신을 요구하는 미래에 우리 사회가 가져야 할 과업으로 한민족의 정신혁명이 될 수 있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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