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거침없이 교육’은 ‘나’의 입장에서 본 ‘교육’을 ‘거침없이’ 쓸 예정이다. 글은 자기중심적이고 편파적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글 중에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편파적이지 않은 글이 얼마나 될까? 객관적인 척 포장할 뿐이다. 차라리 나의 편파성을 공개하고,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 잘 될까 모르겠다. 다루는 내용은, 교육과 관련된 거라면 가리지 않을 생각이다. 비판적 시각에서 쓴 교육 제도, 교육 정책, 교육 담론, 교실 이야기 등에 나의 편파성을 실어 나르리라.

(이미지=https://blog.naver.com/jcs203/221741611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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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그 폭력성에 대하여

[에듀인뉴스] 나 어릴 적에도 꼰대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쓰이진 않았다. ‘라떼’(“라떼는 말이야”)와 결합하면서 그 단어의 폭발력은 더 커졌다. 꼰대가 뭐길래 그러는 걸까.

꼰대란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다. 최근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되었다.

여기서 꼰대의 핵심 특징은 ‘권위적인 사고’를 가졌다는 것과,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꼰대의 특징은 이렇다.

꼰대는 권위적이다.

수직적 계급이 잡혀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 중에서 위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위에 있는 자신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걸 지시하고 강요해야만 하는 것이다.

꼰대는 자기중심적이다.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라떼는 말이야”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라떼’, 즉 나 때만 중요하다. 상대방 얘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 시절 얘기만 중요해서, 상대방 얘기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것들의 처지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나 때는 그것보다 훨씬 힘들었다면서, 요새 것들은 배가 너무 불렀다면서, 자기 얘기만 하기 바쁘다.

꼰대는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자기들이 겪고 아는 것들만이 진실이고 옳다. 내가 여태껏 지내왔던 생활 방식에 어긋나는 것들, 내가 가져왔던 생각에 위배되는 생각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보통 그들은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강간을 당하는 건 여자의 행실이 정숙하지 못해서고, 동성애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돌연변이들이다. 꼰대들의 언어는 폭력적이다.

내 주변은 언제나 꼰대들의 천국이었다. 내 부모님들도 애석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것과 별개로, 꼰대다. 학교 선생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육체적인 폭력도 함께 더해졌었다. 주변 어른들도 대부분 꼰대였다.

꼰대 아닌 어른을 찾기 어려웠다. 20살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은 대부분 똑같이 그랬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대게 기성세대들은 꼰대이기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다양성을 물리력으로 억압했던 독재의 영향 때문인지, 충분히 사유할 시간을 갖지 않고 빨리 발전하기 바빴던 산업화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어른들은 꼰대 아닌 이를 찾기 어려웠다.

나는 그런 꼰대가 싫었고,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들어서도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꼰대는 근사하지 않다.

교사의 꼰대 문화는?

그렇다면 교사들의 꼰대 지수(이 ‘지수’는 지극히 내 주관이 반영돼 있다)는 어떨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의 꼰대 지수, 다른 하나는 동료 교사들을 대할 때의 꼰대 지수다.

먼저 교사가 학생을 대할 때의 꼰대 지수는 어떨까?

일단 과거만 본다면, 교사들의 꼰대 지수는 당연히 상위권일 것이다. 과거 횡행했던 체벌문화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꼰대가 아니라면 그러지 못한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강압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 상황이 일부 있었고 훌륭한 교사도 있었으나, 많은 교사들의 꼰대질은 도가 넘었었다.

현재는 어떨까? 과거와 비교하면 꼰대 문화는 현격히 줄어들었다.

일단 체벌이 사라졌다. 아직도 물론, 체벌이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소수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학생들의 선택을 수용해주려 노력하고 인권을 존중하려는 문화가 미약하나마 생겼다. 학생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모든 걸 정해왔던 과거의 학교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학생들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아이들을 존중해주려 부단히 노력하지만, 한 번씩은 꼭 화를 내야 말을 듣는 아이들을 보며, 내 자신의 미성숙함을 깨닫는다. 내 주변 선생님들도, 너무 뛰어나고 존경할 부분들이 많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미성숙하다.

여전히 많은 학급당 학생 수, 필요 이상으로 예의가 없는 아이들이 많아진 사회적 현상 등이 교사를 꼰대질 하게 만드는 이유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걸로 위안 삼거나, 변명하고 싶지 않다.

아직 학생에 대한 교사의 꼰대 문화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꽤 남아 있다.

동료 교사를 대할 때의 꼰대 지수는 어떨까?

젊은 교사에 대한 나이 많은 교사의 꼰대질이 대상이 될 텐데,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 많은 교사라 해도 젊은 교사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거나, 막내인 신규 교사에게 친근감의 표현으로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말을 놓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젊은 교사들에게-당연한 일이지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불러 주며 존대해 준다.

평교사끼리는 나이가 많다고 젊은 교사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뭘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생각보다 수평적인 문화다.

물론 관리자들의 꼰대 지수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높다. 권위적인 분들도 많고, 아랫사람들에게 티내며 대우받으려고 하는 분들도 많다. 민주적인 감성의 관리자 또한 점점 많아지고 있으나,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다.

그리고 남자 교사들끼리는 형님아우하며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간혹 ‘형님’ 교사가 ‘아우’ 교사에게 꼰대질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그 수위가 높지는 않다.

(출처=YTN)
(출처=YTN)

"젊어도 꼰대다"

내가 꼰대를 워낙 싫어하기는 하지만, 뭐만 하면 꼰대, 꼰대 하니까 그것도 뭔가 거부감이 든다.

나이 든 사람이 말하는 모든 것을 꼰대 취급하며 거부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그저 나이 든 사람이, 담담히 자기의 경험을 말하는 것도 쉽게 ‘라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의 꼰대질이 얼마나 싫고 거부감이 들었으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배울 점과 아닌 점은 면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적인 거부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젊은 세대들이라고 꼰대가 아닌 것도 아니다. 꼰대를 공격하는 사람이라고, 꼰대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더 젊은 세대에게 꼰대질을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젊은이 집단인 대학생들만 봐도, 2학년은 1학년에게 꼰대질을 하고, 3학년은 1,2학년에게 꼰대질을 하고, 4학년은 1,2,3학년에게 꼰대질을 한다.

몇 살 먹지도 않았으면서 훨씬 어른인 척, 후배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가장 밑에 있는 1학년은 꼰대질을 안 하는가? 아니다. 2학년 되면 똑같이 아래학년 후배들에게 꼰대질을 한다.

그럼 더 젊은 세대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 세대로 내려가면 뭐가 다를까?

꼰대인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일진들은, 그래서 꼰대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그들은, 훨씬 위계질서에 집착하고 폭력적이다. 동급생들에게 대놓고 폭력을 행사한다. 초등학생들도 나보다 힘이 약하고 어린 친구들에게는 함부로 대한다.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초등학생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총체적인 문제인가?

자기들도 어딘가 에선 분명 꼰대면서, 마치 자기들은 전혀 아닌 양, 기성세대들을 향해 꼰대질 한다고 맹렬히 비난하는 모습이 그래서 나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일부 저경력 교사들의 방어벽

내가 접했던 일부 저경력 혹은 신규 교사들은 무언가 알지 못할 방어벽 같은 게 있다.

사실 학교에 처음 왔거나 경험이 얼마 없으면 모르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 알지 못할 자신감 같은 것에 차 있고, 혼자 해결하려 한다. 도와주려 다가가도, 방어벽 같은 것에 튕겨져 나온다.

내가 꼰대처럼 다가갔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도움을 억지로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다. 도움의 손길을 잡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는다. 도움의 손길을 잡는 건 상대방이 결정할 일이다.

다만 도움의 손길을 대하는 그들의 분위기, 태도 같은 것들에서 느껴지는, 필요이상으로 넘치는 당당함 같은 것이 아쉽다.

혹시 그건 젊은 세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꼰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의 발현은 아닐까? 선배 교사들의 때론 할 수도 있는 정당한 조언과 도움도 꼰대질이라 여겨 거부하는 건 아닐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높은 수능 점수를 받고 교대에 입학하거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임용에 합격한 신규 교사들의 엘리트 의식도 한몫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일반화 할 수 없다. 일부일 것이다. 세대론은 조심스럽다. 많은 신규 및 저경력 교사들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배 교사들과 소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지극히 나의 편협한, 주관적 경험과 느낌임을 다시 한 번 밝혀 둔다. 이미 꼰대가 되어 버린(경력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한 교사의 말도 안 되는 푸념이라고 치부해 버려도 좋다.

경력 교사들에게 배우고 나눌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앞에서도 얘기했듯, 새내기 교사에게 선생님 칭호를 생략하고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각 학교마다, 상황마다 그런 것들이 허용되는 정도가 다 다르고, 내포 형성의 정도에 따라 큰 문제가 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사실 다른 직종에서 신입사원이나 막내에게 대하는 수준과 비교하면, 굉장히 양호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선생님’으로서의 존대와 대우는 해주는 것이 맞다.

어느 한쪽이 높고 낮음을 상정하는 것을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없애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형식은 의외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기도 해,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모두가 ‘선생님’으로서 존중받는 학교의 문화는 생각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다.

적어도 평교사 집단에 한해서는, 고경력 교사가 저경력 교사를 억지로 가르치고 계도하려는 꼰대 문화가 들어설 틈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는 해도, 고경력 교사와 저경력 교사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사라지게 해서도 안 된다.

어떤 직업군이라도 다 마찬가지지만, 경험과 경력이 주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고경력 교사의 경험과 경력을 우리는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고경력 교사의 경험과 경력을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기에 고경력 교사는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소외되는 경우가 많고, 소외되는 만큼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낮추어 보기도 하며, 더 이상 성장하고픈 욕구를 가지지 않는다.

성장의 욕구를 멈추어 버린 고경력 교사들은 다시 학교에서 소외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한다.

고경력 교사의 경험과 경력을 쉽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경험과 경력을 들어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라떼’로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력 교사들의 경험을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건 행운이다. 그런 행운이 일상이 되는 날이 오기를.

곽노근 경기 파주 적암초등학교 교사. "파주 깊은 산골 적암초에서 근무하고 있고, 초등토론교육연구회,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좇아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잘 되지 않음을 느낀다. 삶과 계급과 교육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되,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
곽노근 경기 파주 적암초등학교 교사. "파주 깊은 산골 적암초에서 근무하고 있고, 초등토론교육연구회,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이오덕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좇아 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잘 되지 않음을 느낀다. 삶과 계급과 교육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되,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