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이는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는 역사에서 인도의 비폭력주의를 이끈 상징으로 추앙된다. 곧 ‘간디는 비폭력이다’로 동격을 이룬다. 왜 그럴까? 간디 자체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 폭정 아래서도 비폭력주의로 일관한 그의 저항의식은 인도의 정신문화를 이끈 모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흔히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은 FM이다”, “그 사람이 곧 법이다”, “그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교과서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따라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희망적인 사실은 누구나 그런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라고 가르친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코1, 1-2)”라고 설파한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완전함이란 곧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가톨릭 신자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함, 게으름을 극복하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묵상과 기도생활을 생활화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엔 교육자의 길을 곧게 내려는 의지가 신앙과 병행하여 더욱 견실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곧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참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교육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한때 다정하고 친근한 이웃이자 전문직업인이었던 어느 한의사가 사석에서 필자에 대해 내린 평가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는 지금은 고인(古人)이 되었지만 어느 날부터 필자를 만나면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필자와 아래, 위층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아파트 주민이었다. 필자가 한방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찾아 진맥을 하고 건강 상담을 했던 의료인이기도 했다. 사람의 말은 곧 그의 인품을 나타내고 행동은 의식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필자는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쉴 틈이 없다’는 『논어』의 ‘지성무식(至誠無息)’을 삶의 동반자로 삼아온 까닭에 누구에게도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몸에 밴 것일까? 고인은 틈만 나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두 자녀를 위해 필자에게 교육상담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필자와 인연을 맺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게 된 가운데 그런 평가를 내린 것으로 이해한다. 굳이 이렇게 얼굴 뜨거운 자화자찬을 하면서 개인적 사례를 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성찰의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자신도 모르게 직업적 소명의식이 몸에 배어 난다. 필자 또한 타고난 기질에다 성실한 모습과 노력하는 자세, 실천 의지, 그리고 교육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생각과 행동이 체화(體化)된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는 이를 느끼고 판단할 수 있다. 

소위 직업인의 향기가 품어져 나와 이것이 메시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미국 소설가 너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1804∼1864)의 작품 『큰 바위 얼굴』에서 마을을 구원할 사람의 형상을 닮은 바위를 보면서 언제가 그런 위인이 나타날 것을 믿고 기다리며 살아왔던 주인공 어니스트(Earnest)가 결국 스스로가 그런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변모해 갔던 사실과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간디는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스스로의 삶에 농축된 언행일치의 결정체였다. 이처럼 누군가의 삶은 곧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품게 된다. 

예컨대 예술가의 삶을 보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끄집어내면 진솔한 글이 되고, 이미지를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다. 

여기서도 창작의 기본은 기법이 아니라 창작자의 삶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해도 누가 전달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로 다가온다. 사람이 다르면 살아온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면 삶이 품고 있는 의미도 다르다. 앞서 간디의 경우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삶이 곧 메시지인 이유는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녹여내기 때문이다. 간디가 사용한 ‘비폭력’과 체 게바라가 사용한 ‘혁명’이란 단어에는 그들의 삶이 녹아있다. 그들의 열정과 혼, 인격과 철학이 스며있다.

필자는 이 시대에 특히 교사에게 주목하고자 한다. 이유는 각별하다. 온라인 수업으로 교사각자의 디테일한 ‘진실의 순간’이 비교적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요즘이다. 교사의 품위가 드러나는 교사,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교사, 가르침에 열정이 있는 교사, 바른 삶의 철학이 묻어나는 교사 등등 학생과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평가가 솔직하게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처럼 어린 청소년, 미완성의 인격체, 미래의 희망을 교육하는 교사는 곧 청소년의 모델이다. 많은 시간을 교사와 함께 보내는 그들의 눈에 비친 교사의 모습은 하나하나가 관찰의 대상이고 때론 울림의 대상이어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기 쉽다. 그래서 교사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청소년에게 다가서야 한다. 

지금은 교사는 많으나 진정한 스승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시대이다. 참스승을 그리워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영웅으로 고정된 틀은 없다. 누구나 울림을 주는 영웅이 될 수 있다. ‘화향 십리(花香 十里), 주향 백리(酒香 百里), 인향 천리(人香 千李)’라 했다. 꽃의 향기가 십 리를 가고, 술의 향기가 백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천 리를 간다고 했다. 멀리서 사람의 향기를 맡고 찾아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것을 정치의 속성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원가의 일타강사란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의 특성, 열정, 명성을 알고 학생들이 찾아가지 않는가? 지금 우리의 청소년은 장시간 온라인 수업과 등교 수업을 병행하며 코로나19와의 사투를 벌이며 위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누구인가? 눈만 뜨면 만나는 가까운 인물이 부모 다음으로 바로 교사이다. 그래서 교직은 존중을 받아야 하고 성(聖)스럽게 보호되어야 한다. 오늘도 많은 청소년은 교사로부터 인생 모델을 찾고 있다. 이는 직업 선호도 검사에서 상위권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필자는 이제 다시금 스승의 부활을 외친다. 이 땅에서 묵묵히 사도(師道)를 걷는 많은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다. 하지만 좀 더 냉철하고 엄격하자. 전국을 휩쓴 ‘스쿨 미투’의 부끄러운 굿판을 걷어치우자. 학생과 학부모가 그림자조차 밟지 않는 스승은 되지 못할망정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추한 교사는 되지 말자. 

이제는 좀 더 당당히 말하고 행동하자. 내가 걷는 사도는 곧 신앙의 길이자 삶의 향기이자 메시지다. 완전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말씀은 하루하루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내일이 더 성장하는 교사의 모습으로 어린 싹들에게 다가서라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는 다짐은 못해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는 스승이 되자. 교사로서의 삶이 곧 교육의 메시지가 되어 울림을 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되자.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바이러스로부터 청정지역이 되길 원하듯이 이 땅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삶이 참 교육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정한 영웅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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