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우리는 이따금씩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말을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이 말은 임은정 검사가 자신의 2009년 참회록에서 ‘나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었다’라고 고백하면서 더욱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다. 그는 광주를 지나다가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며,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고 사죄를 하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께 약속 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평생 간직하며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요즘은 대국민 서비스를 하는 공무원들의 복무 자세를 비유하여 널리 사용하는 이 말은 ‘복지부동’의 자세로 바짝 엎드려 자신을 보신하거나 업무에 지극히 소극적이고 안정적인 월급만을 받으면서 그저 월급쟁이로 전락한 채 살아가는 공무원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엔 이런 사실이 교직에 종사하는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철밥통’이란 말처럼 일단 그 어렵다는 임용고사를 통과해 교직에 들어선 유능한 교사가 자신의 교육철학이나 가치관을 실행하기 위한 진정한 교육자의 길을 등한시 한 채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로 전락하여 보장된 만 62세 임기를 마칠 때까지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아니 오히려 교육혁신에 걸림돌이 될 정도로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더 나아가 경력이 쌓이면 익숙한 과거에만 매달려 안정과 편의만을 추구하면서 무색무취의 존재감 없는 인물로 살아가는 현실을 지적하는데 더 적합한 표현으로 안성맞춤이 되고 있다.

여기서 직장인과 직업인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우리말 사전에 직장인(職場人)은 ‘규칙적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는 사람’, 직업인(職業人)은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실제로 똑 같은 일을 하는 두 사람이 있지만 이들을 정의하는 이름표가 이처럼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똑 같은 일을 하지만 이 둘의 목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일하는 공간인 장(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직업인은 업(業)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모든 직장인은 직업인으로서의 필요조건을 갖추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직장에서 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천차만별로 드러나는 게 현실이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직장이란 공간에서 그저 시간을 때우고 있는 직장인이 많다. 물론 겉으론 그렇지 않다고 저항하듯이 행동하지만 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인 파스칼(1623~1662)은 “농부가 거두는 수확은 그의 권한 밖에 있는 강수량과 토지의 비옥한 정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의 노동에 따라서도 결정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말에도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말한다. 그만큼 농부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노력의 대가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은 일과 삶의 분리를 지나칠 정도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 예찬론자들이 많다. 이들에겐 직장은 단지 일하는 시간을 채우면 급여가 나오는 공간일 뿐인지 묻고 싶다. 물론 이 사상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삶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삶이 그들을 행복의 길로 안내한다면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

하지만 일과 삶을 굳이 그렇게 분리해서 이분법적인 관념의 사고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것도 어쩌면 삶의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업인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이들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일의 명분을 찾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신이 하고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좀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관문만 무사히 통과하면 직업인이 명예롭게 생각하는 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기에 직업인에게 출퇴근 시간이란 개념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생각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하는 시간만 고려하는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다. 

일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일을 했다면 반드시 목적과 목표에 부합하는 성과를 내야 한다. 그저 ‘9 to 5 hours’의 시간은 버티고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직장이 아닌 동호회에서나 통용되는 미덕이다. 목표에 부합하는 탁월한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일에 몰입한다.

몰입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표를 세운다. 하지만 낮은 목표를 가지고는 몰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몰입은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성과와 결과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이 일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이유와 필요를 스스로 납득할 때 나타나는 특별한 업무 방식이다. 바로 교직이 그렇다.

교직은 극도의 몰입을 추구해야 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생이 배울 준비가 되면 언제나 스승으로 다가가야 하는 게 교사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무수히 많은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고 막연히 미루고 유예시켜 왔을까? 그래서 “교사는 않으나 진정한 스승은 없다“고 푸념을 해왔다.

진정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도록 하고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하게 하는 등 그들의 고민과 생각의 방향을 교육이라는 주파수에 맞추고 몰입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특별한 소명의식을 갖춘 직업인 교사만이 제공하는 열정과 책임 있는 교육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교사에겐 특별한 소명의식이 존재해야 한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사도(師道)라고 부른다. 교사가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서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위치가 정확히 자신이 있기로 선택하고 결정한 그 장소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현재의 우리 교육이 답이 없고, 철학과 개념이 없어 보여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결정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우리의 교육이 불만과 의심이 가득한데도 왜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반대로 역량 있는 인재가 점차 명퇴를 빌미로 교직을 벗어나는 요즘, 교육환경이 그들에게 더 이상 배우고 성장할 여건을 제공하지 못해 골육지책으로 선택한 결과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이 소명의식을 잃고 성장과 발전을 게을리 함으로써 부끄러움과 죄의식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도 깊이 성찰할 문제이다.

그래서 교사는 개인의 성장이 먼저다. 개인이 성장하면 교육도 반드시 동반 성장하게 된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온라인 수업이 이제는 본격적인 발전과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초창기 시행착오와 어설픈 수업 방식을 돌아보아 이제는 교사의 연구와 수업에 대한 열정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그리고 특별실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노트북을 내놓고 보다 나은 수업을 하기 위해 연구하고 집단지성을 모아 연습하는 교사들을 목격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의 표출이다. 교사로 성장하지 못하면 학교라는 조직에서 기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학교는 고민하고 있다. 성장에 대한 의지가 없는 교사,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없는 교사를 조직에서 빨리 내보내거나 개선하지 않으면 마치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듯 성장과 배움을 추구하는 학생들에게 무능한 학교의 문화를 퍼뜨리게 된다. 안타깝지만 이들과 함께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 교육에 최소한의 애정을 가진 교사라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후배 교사들을 끌어주고 전문적인 조언을 해주어야 하는 자리에서 때로는 악몽을 꾼다.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무엇을 지시해야 할지 모르는 역량과 경험이 부족한 관리자로 무한 책임을 느낀다. 교직에서의 삶이 도전과 고통, 실패와 성취 같은 경험을 이야기할 수 없이 어제와 같은 오늘만 반복한다면 내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교직이 직장인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설 자리를 다시금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교사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은 이미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동료 교사, 관리자에게 바짝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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