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에 한 획 그은 르코르뷔제의 빌라 사보아, 왜 사람은 거주하지 못했나
건축가가 좋아하는, 건축주가 좋아하는 건축가의 간극, 어떻게 줄일 수 있나

[에듀인뉴스] 우화(寓話)는 장르적으로 보면 서사적인 것과 교훈적인 것이 절충된 단순 형식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교적 저차원적인 사리 분별을 위한 것이나 우리 삶에 알아두면 좋은 실용주의적인 것입니다. 같은 형식으로 우리의 삶에서 뗄 수 없는 도시와 환경, 그를 이루는 많은 건물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와 일상에서 놓치고 살았던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사는 도시와 건축에 관한 진솔한 물음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누구…? 아! 그 건물 지은 사람??

[에듀인뉴스] 어느 분야나 최고가 있듯이 ‘현재 제일 잘나가는 건축가는 누구일까?’ 하고 생각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나도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가끔 있다. 잘나가는 건축가를 답할 때는 참 난감하다. 왜냐면 누구다 하고 대답하면 마치 난 못나가는 건축가가 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잘나간다고 하기엔 아무도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질문이 들어올 땐 그냥 좋아하는 건축가를 대곤 하는데 듣는 사람이 한번에 ‘아! 그 사람!’ 하고 알지 못하고 ‘음...그렇구나’ 하며 갸우뚱거릴 때가 더 많다.

대답한 나도 묻는 그도 서로 눈치를 보며 뻘쭘해지는 시간. 설령 축구를 싫어해도 호날두나 메시는 알던데, 쩝.

여튼 내가 열광하는 건축가를 말하면 반응은 ‘그게 누구?’이다. 그래서 “왜 그 건물 만든 사람 있잖아” 하면 “아, 나 거기 가봤는데, 그랬구나!” 한다.

우리는 건물 안에 살고 건물 밖을 돌아다니며 건물이 주인공인 세계적 명소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만 누가 그 건물을 지었고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는 안 궁금하다는 건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건축주를 섬기다 가는 인생이다.

그렇다. 잘 모른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일단 관심이 없어서다.

관심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재미다. 드라마, 예능 스토리는 잘 알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자학적 슬로건을 내걸며 정체성 알기엔 힘쓰면서, 내가 사는 공간에 담긴 우리 삶의 이야기와 도시에 담긴 이웃의 이야기엔 도무지 관심이 없다.

바로 옆에 어떤 건물이 들어서도 그러려니 한다. 그러다 보니 도시의 형태가 뒤엉키고, 건물이 뒤엉키면 삶이 뒤엉키게 되는 줄도 모른 채 “왜 우리 동네엔 이게 없지? 저게 없지?” 하며 다른 동네, 다른 도시와 비교하기에만 급급하다.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프리츠커 상.(출처=The Hyatt Foundation)
루이스 설리번이 디자인한 프리츠커 상.(출처=The Hyatt Foundation)

건축, 그들만의 리그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이 있다.

매년 건축 예술을 통해 재능과 비전, 책임의 뛰어난 결합을 보여주며 사람들과 건축 환경에 일관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한 생존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이 상의 특징은 잘나가는 건축가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오랫동안 지켜오며(비록 그 신념이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지라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건축가에게 주어지는, 건축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예로운 상이다.

재미있는 건 프리츠커 상을 타는 건축가라고 모두가 다 아는 유명 건축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건축을 하는 이들도 처음 듣는 건축가가 선정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미국의 스티븐 홀이나 덴마크의 비야케 잉겔스 같은 스타건축가도 올해는 타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도 지명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보면 재밌다. 역대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잘나가는 건축가들만 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업의 크기를 떠나 불타는 집념과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철학으로 똘똘 뭉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그야말로 선구자 같은 이들. 물론 지금은 큰 프로젝트를 다루고 있지만 상을 받을 당시 이들이 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그 규모가 주택이나 별장, 좀 커 봤자 집합주거 정도로 작았던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아까 상을 못 받았다는 스티븐 홀이나 비야케 잉겔스는 건축계의 듣보잡이라 상을 못 탔나? 그건 결코 아니다.

이들 또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으며 파격적인 형태와 눈에 띄고 젊은 감각의 간결하지만 이해하기 쉬운 다이어그램과 프리젠테이션으로 명쾌함과 대담한 형태를 좋아하는 건축주들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건축가다.

말을 이렇게 하니 마치 건축가가 좋아하는 건축가는 신념과 철학을 위해 타협하지 않는 훌륭한 사람이고, 건축주가 좋아하는 건축가는 자신의 과시욕에 맞춰주는 천박한 사람으로 보이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프랑스에 위치한 르코르뷔제의 빌라 사보아 보습.(사진=https://blog.naver.com/mosys/221647167574)
프랑스에 위치한 르코르뷔제의 빌라 사보아 보습.(사진=https://blog.naver.com/mosys/221647167574)

르코르뷔제의 빌라 사보아...건축인에겐 영감을, 실거주인에겐 불편함을?

건축인과 일반인 누구나 인정하는 르코르뷔제 얘기를 잠깐 하자.

이 불세출의 건축가는 빌라 사보아라는 희대의 건축을 세워 아직도 많은 건축인들에게 귀한 영감을 주고 있다.

웃기는 건 사보아 주택이라 불리는 이 건물에 사보아 사람이 산 날이 별로 없다. 왜냐면 살기가 너무 불편해서 떠났기 때문이다.

애초 건축주의 요구는 지금의 빌라 사보아와 근본부터 다른 요구들이 많았다. 따뜻한 형태의 아늑한 거실과 큰 벽난로를 원했지만 정말 제 기능도 못할 벽난로와 추위와 더위가 그대로 들어오는 커다란 창, 차가운 타일바닥 정말이지 건축주의 상상과는 정 반대의 집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기술력을 고려하더라도 건축주가 불쌍할 정도로 파격에 가까운, 그러나 후에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무책임한 건축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건물은 당시 사람들에게 혁신이라 불리었다. 근대건축의 5원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건축을 통해 건축은 단순구조에서 탈피하여 정말 새로운 건축을 향해 무궁히 발전해 나갔다.

또한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많은 건축인들과 관심 있는 일반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게 되었다.

어쩜 여기서부터 차이가 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건축을 향한 신념이 한 가정의 행복과 삶을 망가뜨릴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 이 건축을 통해 얻게 된 바는 건축사에선 상당히 크다.

건축인들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만약 건축주였다면, 그래도 내 건물인데 마음대로 짓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게 된 상황에 분개했을 것이고, 만약 르코르뷔제 입장이라면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에 자신의 철학을 건물을 통해 알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 일어났을 것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두 간극을 메우기 위해 건축가가 많이 언급하는 건축의 성질이 있으니 지난 시간에 언급한 공공성이다.

건물은 우리가 사는 도시에 지어지므로 공공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로 건축이 공공재임을 주장하지만, 건축은 건물주의 사유재산이다.

물질적 가치로 여기는걸 천하다고 하지만, 건물을 지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일생에 한번 짓는 건물 돈도 잘 벌어다 주면 좋은 것이다.

공공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건축가와 반대로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건축철학인 건축가도 있지 않을까?

건축의 공공성은 건축주의 허락아래서 실현해야 한다. 공공성의 실현을 위한 건축가의 선택은 그 가치를 어떻게든 공유하거나 공유가 안되면 프로젝트를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건축주의 꿈이 건축가의 철학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축에 대해 뭘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건축가 양반 당신이 날 얼마나 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 모든 건축이 공공재가 아니니 제발 공공성은 공공건축에서 실현하시길.

르코르뷔제와 건축주 모두가 행복했던 결과는 그의 종교시설 건축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건축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닌 반대로 이타적이고 다른 이를 생각하며 모두에게 열린 공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뚜레뜨 수도원이나 롱샹교회, 말년에 지은 피르미니 성당 같은 건물들은 그의 건축어휘를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어 건축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의뢰한 건축주 모두가 행복했다는 차원에서 그야말로 걸작이다.

따라서 르코르뷔제의 모든 건축이 절대적으로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쩜 그는 주택 같은 개인 시설보다는 공공시설을 짓는데 더 탁월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공유하기에 힘을 쓰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왼쪽부터) 빌라사보아와 라뚜레뜨 수도원. 둘 다 건축인들에게 귀한 영감을 주었지만 건축주에게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사진=유무종 건축가)
(왼쪽부터) 빌라 사보아와 라뚜레뜨 수도원. 둘 다 건축인들에게 귀한 영감을 주었지만 건축주에게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사진=유무종 건축가)

건축가는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 나와야 한다. 나와 다른 가치와 철학으로 건축을 하는 이들을 쉽게 폄하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축주에게 “이 철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당신은 정말 깨어있고 멋진 사람이요” 하고 부추겨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건축 철학이 모든 종류의 건축물에 적용될 것이라는 환상도 버리면 좋겠다. 각 건물마다 요구되는 가치는 건축주마다, 또 그 쓰임에 따라 다르기에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건축가가 좋아하는 건축가, 건축주가 좋아하는 건축가 이 둘의 차이는 한국에서 정말 심하다.

자신의 철학이 절대적이라 믿고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타일에 따라, 철학에 따라 극명하게 나뉘게 되는 분위기에서 우리에게 건축가와 건축주 모두에게 사랑 받는 건축가는 나오기가 힘들다.

이제 우리는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에 접어들며 이전과는 다른 건축과 도시 유형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로부터 안전과 예방을 우리가 사는 환경과 사회에서 새롭게 시도해야 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건축주와 건축가 모두가 서로의 가치와 철학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모두가 살기 좋은 건축과 도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유무종 프랑스 유학생/ 건축가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도시설계사, 건축도시정책연구소(AUPL) 공동대표.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건축학 전공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 Université Grenoble Alpes에서 도시학 석사졸업, 파리고등건축학교 Ecole spéciale d’architecture (그랑제꼴)에서 만장일치 합격과 félicitation으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파리 건축설계회사 AREP Group에서 실무 후 현재 파리 건축사무소 Ateilier Patrick Coda에서 근무 중이며 건축도시정책연구소(AUPL)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건물과 도시, 사람을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건축가입니다. 우리의 삶의 배경이 되는 건축과 도시의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유용하게 나누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