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오지의 아이들 등굣길을 돕는 비영리단체 ‘쉬르르슈맹드레콜협회’에서 만들어 개봉한 영화 ‘학교 가는 길’

[에듀인뉴스] 세계오지의 아이들 등굣길을 돕는 비영리단체 ‘쉬르르슈맹드레콜협회’에서 만들어 개봉한 영화 ‘학교 가는 길’은 시청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케냐에서 미얀마, 마다가스카르에 이르기까지 26개의 다큐시리즈로 구성된 이 영상에는 며칠을 걸려서라도 목숨을 걸고 등교하는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히말라야의 학교 가는 길은 영하 20도로 얼어붙고, 기어이 생명을 담보로 일주일을 걸려 얼음 강을 건너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물겹다. 

르노 가레타의 저서 「세상에서 가장 먼 학교 가는 길」에는 히말라야를 넘어 학교가 있는 카트만두까지 초등학생 다섯명이 걸어가는 9일간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1년에 단 한 번 얼음길이 열리는 때를 기다려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의미일까? 

학교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학부모 세대에게 학교는 흑백사진처럼 머물러 있는 추억의 방이고, 유년의 삶을 온전히 지배한 땅이었다. 학교 가는 길은, 온통 세상으로 가는 길이었고 방과 후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오는 길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동무들이 있는 곳이고 경쟁은 싫지만 함께 웃음을 웃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빛보다 빠른 IT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은 게임 속으로 뛰어들고 보습학원은 학교에 우선하는 학교가 되었다. 부모는 학교 가는 길과 학원 가는 길을 등가 가치로 여긴다. 부모는 학교를 쉬는 날보다 학원을 쉬는 날을 불안해한다. 

코로나19로 학원 가는 길이 막힐 때 부모는 망연자실하였다. 한국의 부모에게 학교는 히말라야의 희망이 담긴 오지의 학교도 아니고 목숨 걸고 가야 할 목적지도 아니다. 그냥 학교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는 학교 가는 길을 막았다. 0세에서 29세까지 코로나 사망률 제로인 한국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고 해서 죽을 일은 없을진대, 아이들의 죽음과 거리가 먼 정부의 학교폐쇄령은 분명 아이들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어른들을 보호하자는 것이리라. 

초중고의 개학은 자주 미루어지고 겨우 등교했다가 다시 부등교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K방역의 우수성을 세계에 빛내기 위해 감염율이 오를 때마다 학교 가는 길은 막혔고, 집에서도 온라인 학습이 잘되고 있다는 교육부의 홍보가 메아리쳤다.

(사진=ytn 캡처)

그러나 컴퓨터가 하나밖에 없는 집들의 두 아이가 실시간 온라인 학습에서 소외될 때 부모들은 가난을 탓했고, 맞벌이하는 젊은 부모의 외동아들은 게임의 왕국으로 불려갔으며,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한 번도 집밖으로 놀러가지 못한 중딩들은 우울증 증세가 심화되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아이들로부터 어른을 지키자’는 질본의 의심스런 방향성에 가장 먼저 화답한 것은 ‘교육감님들’이었다. 사망률이 제로인 학생들을 학교에 오게 하지 말자고 교육감들은 호응했다. 

코로나 초기에 등교를 고수했던 어느 지역의 교육감은 언론의 뭇매를 맞은 후 입에 재갈이 물려졌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은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일이니 등교를 강행하자는 일각의 주장은 마스크로 입이 봉해졌다. 아이들 학교 가는 길에 아이들은 없고 교육감님들만 있었다. 

선진국들의 고민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등교 여부를 놓고 고민이 깊어졌고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떻든 결론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등교 길을 막는 것이 코로나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등교해서 코로나 확진률이 증가하더라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자고 결심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면적으로 학교 가는 길을 열고자 하고, 중국과 싱가포르 역시 개학을 결정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개학을 허용했다.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로부터 감염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꼭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들 등교 문제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못한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을까? 한국사에 새로운 인류기를 써야 할 정도로 아이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많은 초딩과 중딩은 게임으로 연결되어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은밀히 구축하였고, 고립된 고딩들은 턱에 마스크를 걸친 채 삼삼오오 떼지어 동네 카페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상점보다 먼저 문을 닫았고 아이들은 어른보다 먼저 학습활동을 봉쇄당했다. 학교 가는 길이 막힌 골방에서 그네들은 어떤 인간이 되어가고 있을까? 이걸 묻는 교육감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조사를 하는 학자들이 없으며, 실태를 파헤치는 언론이 없다. 

아이들은 어딘가에 있는데 보이지 않고 무슨 일을 하는데 뭐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한국사에서 신인류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19의 시기를 지나도 곧 코로나20,21이 언제 올지 모른다. 그 때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학교 가는 길을 또 막을 것인가? 모범적인 K방역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을 집에 묶어놓는 일을 반복할 수는 없다. 

학교는 상점이나 공공기관보다 더 중요한 기관이다. 우리의 미래가 담겨있는 곳이다. 교육감들은 학교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의사들이 학교폐쇄를 거론해도 ‘학교 가는 길’은 가장 마지막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학교 가는 길은 열려야 한다. K방역이 손상되어도 확진자 비율이 높아져도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한다. 

아이들을 어른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도 학교 가는 길은 열려야 한다. 학교 가는 길을 막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