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70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신 선친은 배움이 많지 않아 당신의 삶에 ‘교육자’ 외는 거의 생각이 없으셨다. 그래서 당신의 막내 동생(필자의 막내 삼촌)을 교육자로 만들려고 하셨다. 일찍이 선친은 아버지(필자의 할아버지)를 여의고 9남매의 장남으로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타계하셨을 때 막내 삼촌은 강보에 싸인 3살이었다. 그런 막내 삼촌의 실질적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당시 교육도시로 막내 삼촌을 고등학교 유학을 보내고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쌀가마니를 등에 지고 손수 자취집까지 실어 나르는 등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한 동력은 바로 막내 삼촌을 교사 양성의 산실인 국립사범대학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내 삼촌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연 2회에 걸쳐 낙방의 고비를 마셨다. 아버지의 통렬한 한(恨) 맺힘이 그대로 아들인 필자에게 전해져 필자는 어려서부터 진로가 오직 같은 대학(?) 진학을 하여 교육자가 되는 게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필자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각인을 받고 자랐으며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라 믿었다. 마침내 필자는 선친의 한을 풀어 드렸다. 

필자가 이렇게 가계(家系)의 내막을 밝힌 것은 요즘 아빠찬스, 엄마찬스라 일컫는 ‘엄빠찬스(또는 부모찬스: 부모를 통해 일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기사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식 지상주의’ ‘내 자녀 이기주의’는 거의 이 시대 문화현상으로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일각에선 애느님, 아느님, 딸느님이라는 말도 나온다. 자녀들을 하느님처럼 절대 맹신하는 ‘자식광신도’들이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때 조국 전 장관의 딸 스펙 조작 의혹으로 엄마가 구속되는 사태에 사회적 격분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편에선 “엄마가 그 정도도 안 하느냐”는 소위 ‘강남 엄마’로 통칭하는 극성 부모들의 한탄도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특히 이른바 엘리트 부모, 상위계층이라는 사람들에게는 유별나다. 문제는 그것이 불법, 탈법, 범죄로 연계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양선희 칼럼(2020.9.12.자 중일일보)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를 인용해 이야기를 풀어가 본다. 요즈음 자녀의 학업과 군대 문제에 대리전을 치르는 부모들을 보자. 비단 조국 전 장관이나 추미애 장관만의 얘기는 아니다. 

자녀를 대학이나 특수 대학원에 보내기 위해 스펙을 조작한 행위로 일에서 물러나거나 옥고를 치르는 엘리트 부모들도 수두룩하다. 우리에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으로 거의 대통령 당선 직전에 서 고배를 마셨던 대통령 후보에 대한 기억도 있다. 형사 문제까지 일으키진 않아도 지금 자녀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부모들은 여러 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대학, 대학원, 기업, 군대 등 젊은이들이 있는 조직엔 엄마·아빠 담당자를 따로 두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는 자녀를 대신해 온갖 민원을 처리한다. ‘아이가 아파서 회사에 못 나간다.’ ‘아무개가 우리 아이를 괴롭히니 잘라라.’ ‘구내식당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 ‘왜 우리 아이에게 힘든 일을 시키느냐’ 등등 고구마 줄기처럼 캐면 캘수록 끝이 없다. 이제 ‘자수성가’,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부모찬스가 아니고는 주인공이 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유튜브 캡처
유튜브 캡처

우리 사회의 민낯으로 드러나는 이런 현상은 일종의 막장드라마를 보듯이 그 결과가 부끄러운 보고서가 되고 있다. 자녀는 맹렬한 부모의 약점이 되고, 부모는 자녀의 약점이 되어버린 현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정치권에선 자녀들이 많은 문제의 주요 공격 포인트가 되었다. 실제로 상대 견제용으로 일단 자녀부터 들고 파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거의 대부분에게서 파면 나온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들 힘 있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남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사회지도층에 기대되는 절제나 자녀를 바른 사람 혹은 자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인내심은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현재 36년 동안 고등학교 교육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동안 선친의 희망대로 뜻을 이루어 이른바 효도를 실천한 것에 대해 필자를 잘 아는 친지들은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다소의 오만이랄까, 결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솔직히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여러 차례 “할 일은 많고 세계는 넓다”거나 “해보기는 했어?”라고 말하던 경영의 구루(guru)들을 떠올리며 많은 고민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결코 배부른 소리, 철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필자가 펼치는 상상의 날개, 그것이 비록 개인적 역량 밖의 일이라 할지라도 한 번 도전해 보았더라면 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개인적인 진실한 고백이다. 

고3 진급을 앞두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轉科)를 희망할 때 마감 시한에 가까울 때까지 문서에 날인을 거부하며 다른 다양하고 유망한 미래의 진로와 필자가 그토록 원하던 대학을 설명하면서 설득에 설득을 하시던 학년주임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이외에 필자에게 진로지도를 하신 유일한 분이었다. 

물론 최종 선택의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인생의 고비마다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때, 물을 흠뻑 빨아들이는 스펀지를 연상하며 아쉬움을 느꼈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부모의 뜻에 일방적으로 순종하였든 부모를 잘 만나 진로에 도움을 받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자녀의 삶이라 말할 수 없다. 

특히 잘못되는 자녀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묵과할 수 없다. 또 자신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는 부모, 심지어 법적 처벌을 받는 부모를 보아야 하는 자녀의 심정은 어떨까. 평생 부모의 권위 남용으로 득을 본 인물로 낙인찍힌 그들의 인생은 무탈하고 평안할까. 

이제 최근의 부모찬스 사태가 ‘내 자식 이기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가 공정사회로 가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게 된다.

사실 계급의 재생산은 지유민주주의의 고질적 사회현상이다. 

우월한 계급의 부모는 물질적 자산과 문화 자본을 자녀에게 투입해 출발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차이는 교육을 통해 심화되고, 사회적 지위는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굳이 스펙 조작까지 하며 업고 뛰지 않아도 엘리트 계급 부모의 자녀들은 이미 우월한 자산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캐어 나오는 잘못된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이젠 각성을 해야 할 때이다. 

여기엔 부모와 자녀, 양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계급이 고착화되지 않도록 교육을 통해 출발선의 차이를 극복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필수다. 그러나 이 과업에서 우리는 성공한 적이 없다. 여기엔 반칙을 일삼는 엘리트 부모의 존재가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이젠 각성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다며 편법을 권하거나 자녀의 인생을 좌우하려는 부모를 거부하고 자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 시대의 선의(善意)가 자녀에게 무용지물이나 걸림돌이 되는 사례는 무수하다. 자녀는 고슴도치 부모가 아닌 세상의 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왜냐면 어차피 내 인생을 사는 주체는 부모가 아닌 본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세원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