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교육청이 충북형 원격교육 시범학교로 청주내곡초, 율량중, 봉명고, 충북공고를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사진=충북교육청)<br>
충북교육청이 충북형 원격교육 시범학교로 청주내곡초, 율량중, 봉명고, 충북공고를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사진=충북교육청)

[에듀인뉴스] 2학기 들어 실시간 쌍방향 수업에 대한 요구가 뜨겁다. 어느 교육청은 모든 원격수업을 실시간 쌍방향으로 하라고 사실상 강요하는가 하면,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지 않는 교사의 월급을 삭감하라는 청와대 청원까지 올라왔다. 

도대체 실시간 쌍방향 수업이 무엇이길래 이거 아니면 아예 원격수업이 아니고, 이거 안하면 교사 자격이 없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일까?

그런데 이들이 요구하는 수업은 실시간 쌍방향 수업이 아니다. 실시간 쌍방향 수업의 여러 방법들 중 줌, 웹엑스, 구글미트 같은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을 말하는 것 뿐이다. 

실시간의 쌍방향 수업은 원화상회의 방식 말고도 다양하다. 가령 교사가 오픈 채팅방을 이용하여 학생과 대화한다면 이 역시 실시간이며 또한 쌍방향이다. 교사가 구글 드라이브나 팀스 같은 협업 도구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과제를 공유한 뒤, 공동 작성하는 문서상에 코멘트를 주고 받는 것 역시 실시간이며 또한 쌍방향이다.

일부 관리자들과 언론에서는 ‘쌍방향’이라는 말을 쓰면서 마치 ‘콘텐츠+과제’ 수업이 일방적인 수업인 것 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는 언어도단이다. ‘콘텐츠+과제’형 수업도 쌍방향이다. 콘텐츠는 교사 – 학생 방향으로 제공되며, 과제는 학생-교사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방식이 실시간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보다 더 대칭적인 쌍방향 수업을 구현할 수 있다. 오히려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은 교사에서 학생으로 가는 방향의 정보량과 활동량이 많은 비대칭적 쌍방향이 되기 쉽다.

음성통화와 카톡 등의 메신저를 비교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음성통화는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 반면 메신저는 메시지를 읽기 편할 때 읽은 뒤 충분히 답변을 생각해 답장을 보낼 수 있다. 둘 다 쌍방향이다. 

그렇다면 음성통화와 메신저 중 어느 쪽이 더 대칭적일까? 기성세대와 젊은이 사이에서 기성세대가 음성통화를 한다면 아무래도 젊은이가 듣는 쪽이 되기 쉽다. 하지만 메신저라면 사정이 다르다. 대면해서 또 실제 목소리를 들으면서는 못할 말을 메신저로는 과감하게 할 수 있다.

또 학습 내용에 따라 생각거리, 공부거리를 던져 주고 충분한 시간 뒤에 답을 받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쌍방향’이라는 용어로 ‘콘텐츠+과제형’ 수업보다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이 더 좋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나는 수업 해 본적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쌍방향이 반드시 실시간이라야 하는가는 교육의 목표, 소재, 상황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할 일이다. 교사로부터 주어진 자극에 대해 학생의 반응이 즉시 확인되어야 하는 수업이라면 실시간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숙고와 창의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시차를 둔 쌍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실시간 쌍방향’은 교육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격수업에 대한 불만은 온통 “어째서 실시간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을 하지 않느냐?”로 몰리고 있다. 정말 그렇게 몰리고 있는지, 언론과 교육 관료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런 논란에서 수업의 당사자인 학생과 교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과연 실시간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을 원하는가? 교사는 그것을 원하는가? 어떨 때 화상회의가 필요하고 어떨 때 이게 걸림돌이 되는가? 또 이를 위해 학생과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많은 물음들이 필요한데 거의 묻지 않는다.

전장에 나가 있는 장수들 대신 조정의 대신들이 전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던 조선시대를 연상케 한다. 남해바다 한번 안 나가본 문신들이 수군으로 부산을 쳐야한다 말아야 한다 그러다 이순신을 해고하고 칠천량의 참패를 초래했던 그 작태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전통이라면 전통인가?

“담임이 전화 한 통 안하고 카톡만 보낸다.” “하다못해 의무적으로 전화라도 걸게 하라.”는 볼멘소리가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러자 일부 몰지각한 교장은 이런 청원글 등을 무비판적으로 복사하여 교사들에게 교내 메신저로 뿌리면서 스트레스를 주고 사기를 떨어뜨렸다. 

마침내 교육부가 매주 1회 이상 통화라는 해괴망측한 방침까지 발표했다. 물론 ‘SNS 활용’ 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아 반대로 “학교에서 자꾸 전화와서 못살겠다.”는 민원을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 놓고 말이다.

그런데 전화 안하고 카톡 보내는 것을 무성의하다고 느끼는 것이 과연 학생의 마음일까 아니면 그것을 보는 어른의 마음일까? 적어도 요즘 학생들은 전화 거는 것과 문자나 카톡 날리는 것 사이에서 정성과 예의의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시간을 함부로 치고 들어오는 음성통화를 카톡보다 더 무례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일단 받아놓고 시간될때 읽고 답하면 되는 문자나 메신저가 상대 입장을 더 배려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떤 수업이 좋다 나쁘다를 교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론을박 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의 목소리다. 자기보다 몇십년 어린 학생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역지사지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학생들과 일상을 함께하는 교사들도 쉽지 않은데 그걸 학교 밖에서 학생 접한지 매우 오랜 시간 지난 사람들이 “학생 중심”을 운운하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본인은 진실이라고 믿는 거짓말.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원격화상회의’ 방식의 실시간 수업의 장단점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이 왜 마이크와 카메라를 끄고 접속하는지, 혹은 마이크와 카메라가 없는 시스템으로 접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학생들의 심정이 어떤지. 말이 좋아 실시간이지 네트워크 상태에 따라 실제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심하면 5초 가까이 시차가 발생할 수 있고, 때로는 한 시간 내내 튕겨 나갔다 들어왔다만 반복하다 끝나는 촌극 같은 상황 말이다.

장관이나 교육감이 시범 운영교에서 볼 때 설치되어 있는 그런 근사한 디스플레이와 빵빵한 네트워크는 다만 의전용에 불과하다. 실제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은 그렇게 환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장관과 교육감은 40%의 학생들이 손바닥 만한 스마트 폰으로 원격수업에 임하는 현실을 감안하고, 스마트 폰으로 하루 여섯시간씩 화상회의 체험을 해 보기 바란다.

더구나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이 ‘미래지향적’인가 역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지식정보사회, 4차산업혁명 등을 논하는 미래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지식과 정보를 특정한 사람,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서나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교육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낼 수 있고 동료를 찾아 협업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사가 “바로 지금 이 시간, 나를 통해서만 공부할 것”을 요구하는 화상회의 방식의 수업은 얼마나 미래지향적일까? 어쩌면 최대한 교실수업을 흉내 내는 모사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디지털네트워크에서는 거기 맞는 새로운 수업이 고민되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무한한 창조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이러한 창조성은 특정한 방법을 금과옥조처럼 기준으로 제시하는 경직된 마음으로는, 더구나 그 동기마저 교육이 아니라 ‘민원예방’인 관료적 마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세계의 역사는 증명한다. 모든 창조적 혁신은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필드에서 시작되었다. 저 멀리 떨어진 고위직들의 탁상공론이 세상을 바꾼 적은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볼셰비키들뿐이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소련의 몰락을 통해 생생하게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