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에듀인뉴스] 코로나 19는 ‘세상은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박쥐에서 천산갑으로 이동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점프했다는 사실은, 박쥐 요리를 즐기고 천산갑을 밀매하는 인간의 탐욕이 결국 신종코로나바이러스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더 질긴 끈은 다른 데 있었다. 무엇이나 깔아뭉개는 자본주의의 폭주가 삼림을 파괴하고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허물더니, 급기야 호모사피엔스의 생존 토대까지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들이 반복적으로 저지른 잘못으로 이미 생태계는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이를 견디다 못한 지구가 꺼내든 레드카드가 코로나 19라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틀거리는 지구촌에 다시 폭우와 폭염, 홍수와 산불 등의 온갖 기상이변이 찾아왔다.

2020년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긴 장마가 왔고, 폭우가 왔고, 폭염이 왔고, 공포가 왔다. 사람들은 비로소 비의 이름이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일구어 온 근대 문명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코로나 팬데믹보다 더 큰 공포와 불안을 가져왔다.

22세기는 오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기후학자들만의 담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지난여름 우리 모두는 ‘지옥을 여행하고 온 단테’가 되었다.

제정신을 차렸을까. 사람들은 2018년 우리나라 인천에서 열린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총회를 기억해 냈다.

(출처=https://blog.naver.com/cpa54/222049835691)
(출처=https://blog.naver.com/cpa54/222049835691)

땅속에 묻힌 석유나 석탄 등을 태우면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데, 이로 인해 지구 온도가 지난 100년 동안 무려 1도나 높아졌다는 것이 당시의 진단이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2도 상승하면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면서, 1.5도 이하로 기온 상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응급처방이었다.

0.5! 이 숫자 앞에서 지구인들은 결연했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한 문명 자체를 뒤집어엎는 수준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의로 이어졌다.

이를 위해 모든 나라가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로 줄이자며, 지구 생태계의 치료와 복원을 약속했다.

2018년 당시에 10년에 남았다고 했으니, 2020년인 올해로 치면 8년이 채 못 남은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면서 할 일을 철저히 외면했다. 당시에 종이에 사인은 했지만 딱 거기까지, 석탄 함정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7위, 대기 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35위, 기후변화대응지수는 61개국 가운데 58위.

세계인들은 그런 우리나라를 사우디아라비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더불어 세계 4대 기후 악당(climate villain)으로 조롱했다.

기후 악당이 내거는 슬로건은 “소비가 미덕”이다.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는 주문을 외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 19가 급습하였다.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집안으로 격리하였다. 그러면서 소비 억제를 강제하였다.

그래도 ‘변환의 정치’는 시작되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며 표를 계산할 뿐, 지구를 생각하고 탄소 배출량은 계산하지 않았다. 문명사적 근본 성찰은 어디에도 없었다. ‘위대한 자기 경멸’은 우리 정치에 아예 없었다.

적게 쓰고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전혀 새로운 사회’, 있는 것을 아끼고 가진 것을 나누며 ‘전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옷장에 가득 찬 옷을 보며 입을 옷이 없다고 말하게 만드는 허위욕망에, 사람들을 그대로 처박아 두었다.

소비가 그치면 생산이 그치고 생산이 그치면 자본주의가 정지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같은 주문을 외었다.

종교는 더욱 탐욕스럽게 민낯을 드러냈다. 교육이라고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수능 1등급들이, 남을 위해서는 단 1도 내어 주지 않겠다며 진료를 거부하고 있었다.

(사진=게티이미지)
그레타 툰베리.(사진=게티이미지)

그때 저 멀리 스웨덴에서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녀는 자폐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었지만, 자기보다 더 중병에 든 지구를 살리자며 외치고 있었다.

2003년 1월 3일생,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 3학년. 그레타 툰베리.

그제야 우리는 수능 1등급을 길러내려고 애를 쓴 ‘대한민국 교육’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부끄럽게 확인하였다.

수능 점수를 위해 단 1시간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영악함보다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금요일마다 거리에서 피켓을 든 툰베리의 우직함에서 ‘변환의 교육’은 출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툰베리는 말한다.

지금 당장 기후위기에 대응하라. 그러지 않으면, 지금은 인류의 가장 큰 실패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그것은 바로 지금 어린이들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이렇게 절박한데도 정책을 결정하는 어른들은 지금 상황을 무시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린 세대가 스스로 나서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기존 시스템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그의 호소에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전 세계 110개국에서 약 150만명의 학생이 등교 거부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는 너무 먼 나라의 낯선 풍경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네모 난 교실에 갇혀 네모 난 책을 들여다보며 공부만 죽어라 했다. 아니, 어른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번갈아 가며, 죽어라 죽어라 공부만 시켰다.

‘성장’을 지표로 삼아 새로운 인재상을 선발하는 것, 이것이 학생부종합전형의 요체다. 그러면서 대학에서는 학업역량과 전공적합성, 인성과 발전가능성을 평가요소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요소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코로나 이전, 아니 기후위기 이전의 근대 교육의 좌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존이 전제되지 않은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존이 전제되지 않은 ‘학업역량’이 무슨 의미가 있고, 생존이 전제되지 않은 ‘인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생존이 전제되지 않은 ‘발전가능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교육은 생존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생태교육’이 시작되어야 한다.

미세먼지는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지만, 이산화탄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배출되면 수백 년 동안 대기 중에 남아 있다.

이전 세대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로 인한 기후변화(Climate Change)로 우리 세대가 고통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 세대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로 인한 기후위기(Climate Crisis)로 미래 세대는 사경을 헤맬지도 모른다.

(출처=방위사업청)
(출처=방위사업청)

인터넷에서는 재난 상황에 필수품이라며 ‘생존배낭’을 팔고 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배낭에 미리 싸 놓으라는 것이다. 재난 대응을 위해서는 최소 3일 생존에 필요한 생존 물품을 담아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삿속이지만 섬뜩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도 우리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생존배낭’을 꾸리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의 교사는, 기후위기 시대의 교사는, 아이들의 생존배낭에 필수적인 물품을 담을 수 있도록 긴급행동에 나서야 한다.

생존배낭에 담을 첫 번째 생존 물품이 뭘까? 그것은 바로 ‘생태적 감수성’이다.

코로나 19의 습격과 기후위기의 징후를 통해, 우리는 코로나와 기후위기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대오각성이 생태적 감수성의 출발이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지구적 재앙을 인과의 관점에서 성찰하여 긴급행동에 나서는 것, 그러한 자기결단이 생태적 감수성의 지향점이다.

녹색평론을 발행하던 김종철 선생은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생태학적 관심을 중심에 두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창조적인 사상이나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나는 믿는다.”

선생의 그 목소리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 그러한 상호공감이 생태적 감수성의 전제이다.

생태공원, 생태하천, 생태연못, 생태도시 등 ‘생태’라는 이름을 앞에 걸고 수행되어 온 생태적 상상력에 ‘생태교육’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교사와 학생들의 힘으로 추가하는 것, 그러한 ‘전환의 교육’이 생태적 감수성의 총화이다.

대낮인데도 교실 복도에 켜져 있는 불을 끄는 손길이 생태발전이라고 여기는 마음, 휴지 한 장 툭 뽑아 쓰는 것도 도끼를 든 나무꾼의 손길일 수도 있다며 삼가는 마음, 일회용 컵을 쓰는 것이 부끄러워 목마름을 예쁘게 견디는 마음, 소고기를 앞에 두고 지구에 미안하다며 젓가락질을 망설이는 마음, ‘일상적 감각의 틀’을 깨는 이런 고운 마음에서 생태교육은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 감수성을 키우는 이러한 생태교육만으로 기후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만한 것이라면 기후위기는 위기가 아니다.

여전히 자본은 화석연료를 태우며 과잉 생산할 것이고, 여전히 사람들은 허위욕망에 사로잡혀 과잉 소비할 것이며, 여전히 정치는 소비가 미덕이라며 기후위기를 나 몰라라 할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가 불러일으킨 ‘청소년의 생태반란’이 생태교육의 지표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19년 9월 23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정상회의에서 그는 말한다.

“생태계 전체가 붕괴하고 있다. 그런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돈과 영구적인 경제 성장에 관한 동화 같은 이야기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사진=MBC 뉴스 캡처)
(사진=MBC 뉴스 캡처)

우리 정부는 얼마 전 ‘한국판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했다.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탈탄소 사회를 향한 목표와 로드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린’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면, ‘2050년 탄소 배출 제로’라는 목표 달성 연도를 당연히 제시하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명시했어야 했다. 탄소 제로를 지향한다고 한 것은 말뿐, 가장 중요한 ‘시점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

답답해하던 기자가, ‘그린뉴딜’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명박 정부 때 한 ‘녹색성장’과 비슷하다고.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녹색성장’을 한다고 해놓고 온실가스 배출을 더욱 늘린 그때, 그 시절, 그 공무원들이 다시 만든 게 ‘그린뉴딜’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지구촌에는 100만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나왔다. 더욱이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라는 파국이 우리를 덮칠 것이라는 징후를, 지난여름 우리는 함께 보았다. 그러면서도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깨닫지 못한다면, 호모사피엔스에게 미래는 없다.

유럽연합은 ‘그린딜 계획’을 통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현재의 40%에서 50~55%로 상향 조정하여 2050년에는 탄소 배출 제로를 이루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에는 절박함이 없어 보인다. ‘탄소 배출 제로 국가’에 대한 비전은 아예 없어 보인다. 오로지 성장이다.

생존이 전제되지 않은 성장은 국가도 무의미하지만, 학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제는 대한민국 학생들이 나서서, ‘탄소 배출 제로 학교’를 스스로 추진해야 한다. “돈이냐? 삶이냐? 선택하라”를 외쳐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이게 생태반란이고 생태교육이다.

될까?

시시포스(Sisyphos)가 대답한다.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다시 꼭대기에 올려놓는 일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야. 하지만 이처럼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아야 참다운 ‘인간’이지. 아무 의미 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반복된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교육’이고.”

생태적 감수성 없이는 생존도 없다. 생존이 없으면 성장도 무의미하다. 코로나 시대이자 기후위기 시대, 지금 당장 생태교육은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