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정치가 현대사를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2020년 4월 15일, 이른바 총선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사에는 또 하나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이른바 말 많고 탈 많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여 지역의원과 비례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은 지역의원 163명+ 비례의원17명으로 총 180명,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지역의원 63명+비례의원 19명으로 총 103명, 정의당 지역의원 1명+비례의원 5명으로 총 6명, 국민의당은 지역의원 0명+비례의원 3명으로 총 3명, 열린민주당은 비례의원 3명, 무소속은 지역의원 5명이 탄생하여 정원 30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선거제도의 개선에 대한 국민의 여망, 군소정당의 힘을 살려 양당정치의 변혁을 이루려던 민의는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른바 위성 정당을 내세워 두 거대 정당이 횡포를 부림으로써 군소정당에게 돌아갈 비례대표 의원을 서로 도둑질하는 몰염치의 극치를 드러냈다. 이렇게 21대 국회에서 정치의 불평등은 시작되었다. 

정치에는 계급 정치가 있고 정체성 정치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당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성찰과 반성 가운데 하나가 21세기에 들어서 계급 정치의 의제, 즉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기보다는 피해 가면서 오히려 정체성 정치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를 표방하면 할수록 정치 전략은 실패를 거듭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이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소책이다. 

그러나 그 종착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정의당의 비례의원으로 입성한 젊은 의원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정당 득표 10%를 기록하는 가운데 기대가 크다 할 수 있다. 왜냐면 계급 정치와 정체성 정치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진보 정치를 이끌 만한 잠재력을 가진 신인 정치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비롯한 진보 정치의 새로운 리더들이 지금 한국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불평등이라는 의제로 재해석해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정책으로 연결해 실력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누적되어 왔는가? 

첫째, 세대 문제다. 한 마디로 젊은 세대가 느끼는 박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흙수저로 태어난 다수는 영원히 한국 사회에서 주류가 될 수 없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갈등 자체는 다수의 젊은 세대가 찬반을 넘어서 아예 냉소로 일관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라는 딴 세상 이야기로 인식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결코 부모 세대보다 부자로 살 수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디지털 경제 문제다. 로봇, 인공지능(AI), 빅 데이터 등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필요하다면 변화의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속도 조절이 또 사회 혁신의 역량을 갉아먹게 될 수가 있다, 결국 디지털 경제의 사회 안전망을 고안하는 새로운 과제를 풀어야 한다. 

셋째, 고령사회의 문제다.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베이비 붐 세대(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가 65세 이상 노인 인구에 편입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2025년 초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 이상을 차지)로의 진입 예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는 축복이 되어야 할 인생 100세 시대의 절망이다. 노인은 대개 가난하고 아픈 상태로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년 정도를 보내야 한다. 미래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은 참으로 커다란 문제다. 

넷째, 여성 문제다. 한국 여성의 지위가 많이 올라간 것 같지만 여전히 다수의 여성은 남성에 비해서 가난하다. 예컨대 경력단절 여성이 대표적이다. 또 여성 혐오의식은 어떤가? 한국 사회 불평등 문제의 근원적인 요소 중의 비중 있는 문제다. 

다섯째, 자영업자의 문제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2배이고, 일본의 두 배, 미국의 세 배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비율은 27%로 그리스, 터키, 멕시코에 이어 4위이다. 한 나라의 적정 자영업자의 비율은 16%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비율이 OECD 가입국(평균치 15.8~16.1%) 중에서 네 번째로 높다. 

여섯째, 지구 온난화 문제다. 요즘은 과학자 다수가 지구 과열(global heating)이라 별칭하고 있다. 기후 위기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여름 폭염이나 겨울의 한파가 발생하면 결국 소득이 적은 빈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심지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녹색 정치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6세 스웨덴의 환경운동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UN 총회에서의 세계 정상들을 향한 질타와 트럼프를 향해 부릅뜬 두 눈이 곳곳에 살아 있어야 한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제 유권자들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작은 의석의 진보 정당이라도 결코 사표가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패배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거대 정당과의 연대는 정치의 보수화를 부추기고 스스로 위성정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또 젊은 층의 인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우리가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젊은 층은 정치적 상상력이 제한되어 정의의 문제를 주로 ‘공정’의 이슈로 제기하기도 한다. 즉 젊은 세대는 불평등을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불평등을 없앤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내가 경쟁에서 졌으니 당연히 불평등한 대접을 받아도 참겠다.’는 의식이 팽배하다. 다만 그 경쟁만은 공정하게 해 달라는 요구다. 여기까지가 젊은 층의 한계다. 그러니까 과정에서의 공정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경쟁의 결과는 시장논리에 따르면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것까지 고친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쿨한 젊은이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는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자본주의적으로 제한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고통은 다가오고 희망은 없으니 기껏 제기할 수 있는 의제가 과정의 공정에 머무른다. 

현실적으로 “서울대 나왔다고 능력에 관계없이 졸업장 하나로 저렇게 대우 받고 들어가는 게 과연 정당한가?”를 따져 묻는 대신에 “아, 서울대 들어갔을 정도면, 고등학교 시절 내가 놀 때, 그들은 빡세게 공부한 거네.” 이렇게 생각하기 일쑤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에서 재벌의 자녀라도 서울대를 못 들어갔다. 그 이전에는 재벌의 총수들도 서울대를 못 갔다. 하지만 지금은 재벌뿐만 아니라 중상위층이 수시 전형 등에서 여러 가지 스펙을 만들어서 명문대를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것이고 적어도 공정성이라도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는 ‘체념’이라는 지배적인 정서가 모든 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다. 한국 사회는 어차피 불평등한 사회고 변화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노-오-력’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도 제발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 그들의 아우성이다. 

그래서 한때 비트코인에 몰빵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들은 이를 투기판이라고 규정하고 강력한 규제를 했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어떤가? 역시 투기판이다. 주식 시장도 투기적 성격이 강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자산을 축적하려면 종잣돈이 필요하고 상당한 수준의 정보력도 필요하다. 그러니 종잣돈도 정보를 공유할 네트워크도 없는 젊은 세대가 부모의 배경 없이 자산을 축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젊은 세대가 몰입한 암호화폐 시장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고 판단된다. 

현재 정치권에서 언급되는 기본소득 이슈도 원래는 유럽의 보수당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사회민주주의 체제 자체가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데 4차 산업혁명시대가 오면서 일자리는 더 이상 늘지 않고 점점 줄어드니 노동 자체의 기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으로 본다. 

이제 이는 더 이상 유럽의 문제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은 긴급재난지원금과 전국민고용보험에 대한 이야기를 젊은 세대가 더 깊이 고민하여 이슈화해야할 시기다. 또 창의적인 로봇세와 같이 자본이나 IT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노동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고민도 필요하다. 이런 고민들은 젊은 세대들이 연대를 통해서 이루는 것만이 가장 가능한 해결책이다.

이웃나라 일본을 보라. 자민당을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이나 정당이 없으니 사람들은 비판 자체를 포기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다. 비록 경제학적으로 합리적 선택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정치권력의 잘못을 보고도 회피하거나 침묵을 용인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기술은 자국이 최고라고 믿고 있다. 이른바 90년대의 기억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이 자랑하는 K-방역이 한국에는 징병제가 존재하고 인권을 무시하여 마구 사생활을 추적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권국가라서 한국식은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현재 일본은 자민당 아니고는 대안이 없다. 야당을 다 합쳐도 자민당에 맞설 대안이 되지 못한다. 이런 연유로 생각이 있는 일본 국민들은 패배 의식에 젖어 있다. 경제적으로 합리적 선택이라는 것이 정치적으로 귀결되면 바로 현재의 일본 체제가 되고 바뀌지 않는 상태로 고정되어 정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는 부패하고 진보는 도덕적이라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는 구교과서의 이론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진보, 보수의 정권이 당분간은 자주 바뀌면서 정치의 혁신을 가져올 필요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정치인이 적어도 국민의 대변인이라는 탈을 쓰고 사익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정권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무리수를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불평등을 해결함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의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 더불어 사는 자본주의, 국민이 신뢰하고 삶의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정치의 혁신에 대해서 두루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이 시대를 사는 한 지식인의 상념은 오늘도 그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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