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에 담을 ‘인권 감수성’이 없다① 자기 학교에서 유배당한 아이들

[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에듀인뉴스] 수업을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하나둘 책상에 엎드려 자기 시작한다. 심지어 어떤 녀석은 자다가 코를 골기도 한다. 녀석을 흔들어 코골이를 멈추게 한 짝꿍은 교사를 보며 계면쩍게 웃는다.

예전에는 몇몇 과목만 그랬는데, 이제는 거의 모든 과목이 그런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늘 보는 풍경이다.

교칙 위반이라며 벌점을 준다고 해도 “줘요” 하고 그냥 자는 아이들,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면 눈을 반쯤 뜨고 “왜요” 하고 오만상을 찡그리는 아이들, 뒤에 나가서 잠 깨고 들어오라고 하면 “아이씨” 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아이들….

본체만체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하고 나섰다가 마음을 다치는 교사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을 하고 오더니 ‘잠자는 아이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같이 학년을 올라가며 3년 동안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1학년 때는 한 반에 한두 명 자더니, 2학년이 되어 대여섯 명 잤는데, 코로나19로 두 달 정도 집에 있다가 오더니, 3학년 교실인데도 어떤 학급은 한 반에서 열 명 넘게 잔다.

더욱 놀란 것은 수능 모의 평가를 치르는 날이다.

1교시 국어 영역 시험을 감독하러 들어갔다. 오엠아르 카드(OMR card)에 한 줄로 죽 답안 표기를 하고 냅다 자는 녀석들이 10명이 넘었다.

수학 시간도 아닌데, 영어 시간도 아니고 그래도 국어 시간인데, 단 한 문제도 풀지 않고 찍고 쓰러지다니, 감독을 하며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왜 그리됐냐?” 하고 청소시간에 스스럼없이 지내는 아이들을 불러 물었다.

스스로를 공포자(공부 포기자)라고 부르지만, 무섭기는커녕 싹싹하기까지 한 녀석들이다.

공고 떨어지고 온 학교라 “처음부터 공부하고는 남남이었다”는 아이도 있었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고 너스레를 떠는 아이도 있었고, “한다고는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2학년 때는 상태가 이러지는 않았는데 하는 타박에, 아이들이 맞받았다.

코로나로 집에서 몇 달 냅다 놀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온라인수업이라고 하긴 했지만 클릭하고 자도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집에 프린터기가 없는데 어떻게 공부해요? 피시방 가서 프린트하는 것이 장당 얼만 줄 아세요?”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대학별 본고사가 우리를 옥죄던 시절, 그때도 수학은 장벽이었다.

일본 대학 시험을 번역해 놓았다는 그 참고서를 푸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끙끙대다 결국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시원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고서 머리를 한 대 쥐어박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음부터는 질문하러 오지 마.”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던 내게, 다시 그분은 툭 던지셨다.

“모르는 것 있으면 과외받으러 오라고.”

그때는 선생님들이 당신 집으로 학생을 불러들여 개인과외를 하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수업료나 내고 근근이 학교 다니던 나에게 언감생심 과외라니, 교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미분 책을 찢었다.

그런 내가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덧 나도 “모르는 것 있으면 과외 받으러 오라고” 하는 공교육 시스템에 익숙해졌다.

교육이 사고파는 상품이 된 지 오랜 세상에서, 나도 교육 인적 자원을 생산하는 질 낮은 교육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저잣거리 학교에서는 값싼 상품을 팔고, 그럴듯한 상품은 좀 그럴듯한 곳에서 더 많은 돈을 내야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학교의 목적은 그냥 다니는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졸업장을 주는 그런 곳이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공부 잘하는 놈들이 온순하고 착실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본새도 의젓하고, 거기다가 가끔 인사 차릴 줄도 안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놈들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가며 한다. 담배 피우다 걸리고, 하루가 멀다고 유리창을 깨뜨리고, 툭하면 친구 코뼈를 무너뜨린다.

체벌이 금지된 요즘은 말로 때리지만, 그때는 그놈들을 그냥 팼다.

그러던 내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건 학교를 그만두고서였다. 교육을 조금이라도 바꾸자고 하였더니 국가가 나서서 나를 거리로 내동댕이쳤다. 거리의 교사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무슨 교사,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들 우리를 밟았고 버렸고 내팽개쳤다. 담당 형사란 자가 주변을 맴도는데, 누가 얼씬거리겠는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공부 잘하던 놈들은 공부하느라 몹시 바빠서인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런데 공부 못한다고 내가 밟았던 놈이, 사고 쳤다고 내가 버렸던 놈이, 너는 사람도 아니라고 내가 내팽개쳤던 놈이 나를 찾았다. 아니 내가 아예 포기했던 놈이 “선생님” 하고 나를 찾아왔다.

으슥한 뒷골목 술집으로 나를 끌고 가 금풍쉥이 뼈를 발라 주며 막걸릿잔을 채워 주었다. 그렇게 그놈들과 거리에서 5년을 견뎠다.

다시는 너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나는 그때 결심했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모든 재앙의 일차적 피해자는 항상 사회적 약자다. 실감이 나지 않으면, 자동차 매연 가득한 네거리에 나가 어린아이 키 높이가 되어 5분만 앉아 있어 보라. 키 큰 어른이 느끼지 못한 매캐한 검은 연기가 코로 훅훅 들어온다.

큰비가 와도 가장 낮은 곳이 먼저 침수되고, 세찬 바람이 쳐도 가장 약한 집이 먼저 무너진다. 가진 자는 늘 안전하지만, 없는 자는 불안으로부터의 공포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 채 산다.

코로나19가 습격한 학교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교육 격차가 심각하다”고 떠들었다. 정말이지 가진 아이들은 더 가진 채 등교하였고, 가지지 못한 아이들은 가진 그것마저 잃어버린 채 나타났다.

탓해 보아야 입만 아프다는 사실이 내면화되어서일까. 그들은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그냥 잤다.

그놈들을 보고 있노라니, 프란츠 파농이 살아온다면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마다 자고 있는 그들이 바로 ‘자기 학교에서 유배당한 자들’이었다.

일본이 우리를 밟았을 때 그놈들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짓을 했는가.

제국주의 일본은 원주민인 조선 민족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고문하고, 살해하고, 결국 타자화하였다. 우리 땅인데 우리는 우리 땅에서 버려졌고, 주인인데 주인 노릇을 못 하도록 우리는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도 스스로를 ‘조센징’으로 낙인찍었고, 조선인으로 사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조선의 짱짱한 목소리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내면화된 식민지의 유령들은 지금도 우리 강토 곳곳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일본군이 퇴각하고 미군이 진주했다. 하지만 폭력의 양태만 부드러워졌을 뿐, 착취를 통한 제국의 자본 축적 과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놀라운 건, 승자 독식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우리가 재빠르게 내면화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가진 자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축복을 주지만, 경쟁에서 탈락한 패자나 상대적 약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배제와 소외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야수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면 또 다른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수 집단에 대한 배제와 소외라는 내부 식민지화 과정을 착착 진행하였다.

놀랍게도 그러한 시스템의 중심에 학교가 있었다. 자유의 최고치가 평등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알지 못하도록, 무한 경쟁을 통한 배제와 소외를 교육 과정화했다.

4%만을 1등급으로 규정하는 수학 능력 시험으로 한 줄 세우기를 하며, 학생이라고 모두 같은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규정이라고 가르쳤다.

1등급을 위해서 96%의 아이들은 당연히 바짝 엎드려 온순하게 깔려야 한다며, 인간이라고 모두 같은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법도라고 가르쳤다.

그러고 다시 2등급은 3등급을, 3등급은 4등급을 짓밟게 가르쳤으며, 결국 저 아래에 7, 8, 9등급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서로 아귀다툼하며 주워 먹게 했다. 교과서에서는 그것을 공정이라고 말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정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능 올 1등급이 학교가 전력 추구해야 할 ‘교육의 이데아’라면, 수능 9등급은 버려야 할 ‘교육의 그림자’였다.

괴물 같은 플라톤주의가 교육의 이름으로, 철학의 이름으로, 학교를 포박했다. 0.1이라는 미세한 점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능 등급인데, 그 등급을 근거로 아랫것들을 밟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불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같은 노동자라 할지라도 ‘숙련, 정규직, 내국인’ 노동자가 다시 ‘미숙련, 비정규직, 외국인 이주’ 노동자에게 다수자 그룹의 자세를 취하도록, 사회는 층층시하의 내부 식민지를 정교하게 구축하였다.

점차 아이들은 이상한 나라의 괴물이 되었다. 모든 것을 몰아준 슈퍼 1등급들은 더욱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 되어, 지난여름 진료를 거부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하여 야수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늘 앞장선 곳은 학교였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존재를 부정해도 좋다는 폭력을 학교가 가르쳤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제도권 교육을 받은 이가 대안 학교 학생을, 일반계 고교 출신이 전문계 고교 출신을 상대로 다수자 그룹처럼 행동하도록, 대학은 선발 시스템을 통해 모든 학생을 순치하였다.

잠자는 아이들의 문제를 ‘교육 격차’니 ‘정보 격차’니 규정하는 것은 본질을 덮어 버리는 행위다. 그것은 ‘인권 문제’다.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채 자기 땅에서 유배된 자들의 문제다.

길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며 생활하는 사람을 노숙자라고 부르는데, 그렇다. 그들이 바로 제도권 교육의 노숙자다.

잠은 학교에서, 책상에서, 자는 것이 아니다. 잠은 앉아서, 엎드려서, 고개 처박고 자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자고 있다면 그건 ‘인간의 잠’이 아니다.

#2편에 계속됩니다.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