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배낭에 담을 ‘세계 시민성’이 없다②
반말이 일상화한 학교..."학생 존중은 언어에서 나온다"

[에듀인뉴스] 나는 1980년, 그 해를 살았다. 그게 역사가 된 것은 훨씬 뒤에 알았다. 나는 2020년을 살고 있다. 올해가 새로운 역사가 되리라는 예감이 강렬하다. 시대와 교육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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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중세 농노들은 근대의 부르주아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농노들의 해방구’인 도시를 스스로 만들었다. 당시 농노(農奴)는 말 그대로 ‘농사짓는 노예’였다. 영주의 장원에 묶여서 꼼짝도 못 했다. 그러다가 상업이나 수공업을 통해 경제력을 가지게 된 농노들이 영주에게 지대(地代)를 돈으로 바치면서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성곽을 쌓고 생활하며 스스로 ‘성곽 안에 사는 사람들’, 곧 ‘부르주아지’라고 불렀다.

드디어 시민이 탄생한 것이다. 어떤 신분이라도 이 도시에서 ‘1년하고 하루’를 지내면 그 사람은 자유를 얻었다. 영주를 견제할 필요를 느낀 군주들과 영주를 벗어날 필요가 있던 농노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유명한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학교 안에서는 끙끙 앓다가도 학교 밖으로 나가면 앓던 병도 거짓말처럼 낫는 아이들이 있다.

영주의 통제 아래에 있던 농노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듯이, 학생들도 학교에서 그런 기분이었을까? 아프다고 학교 밖을 나간 그 아이는, 1천 년 전에 영주의 장원을 나서던 도망 농노가 만난 푸른 하늘을 만나지 않았을까? 학생은 공부하는 노예가 아님을, 몸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시민은 신민과 전혀 다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고, 그렇다면 그런 줄로 아는 그런 신하가 아니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상적 기만을 무너뜨리기 위해, 서로 어깨 겯고 스스로 떨쳐 일어선 역사적 존재가 바로 시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 왕국의 지배자가 되어, 스스로 입법하고 스스로 명령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존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주권재민의 나라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 자가 바로 시민이라는 말이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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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도 다를 바가 없다. 학생은 교복 입은 시민이며, 학교는 그들의 삶이 있는 시민사회이다.

그들에게는 볼 것을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것을 듣는 귀가 있으며, 말할 것을 말하는 입이 있다. 그들에게는 느낄 것을 느끼는 뜨거운 심장이 있고, 따질 것을 따지는 차가운 이성이 있으며, 보듬을 것을 보듬는 억센 두 팔이 있다.

공부하는 노예가 아니라, 공부하는 시민이다. 공부하는 자유인이다.

이런저런 데 끌려가서 개 취급당하던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일까. 세상이 민주화되면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관공서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주민센터를 한번 가보라. 들어가서 잠시라도 어리둥절하고 있으면, 어딘가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는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곳을 돌아보면 어떤 공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내 말을 정중하게 들어준다. 광장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선배들 덕분이다.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학교는 그런 관공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선배들이 흘린 피가 아직도 제대로 흘러 들어가지 않은 곳이 학교다. 그 피가, 교문에서 멈춰 엉겨 버린 듯하다.

(이미지=픽사베이)

지역주민센터를 가기 위해서 옷매무새를 만지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들어가면 되는 곳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주인이라고 하는 학생들을 한번 보라. 참 희한하다. <학생출입 시 준수사항>이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어서일까, 교무실 앞에서 다들 쭈뼛거린다.

“그냥 들어가지, 너 왜 그러고 있어?” 하고 물어보면, “잘못하면 무슨 선생님한테 혼나요” 한다.

학교 교무실에서 주민센터에서의 그 따뜻한 환대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어렵다. 언어에 온도가 있다면 아마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 아직도 교무실의 언어다.

존중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모른다. 존중받은 기억이 없는 아이들의 반격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끼리끼리 하는 뒷담화에서 교사에 대한 욕설과 막말과 비아냥은 도를 넘는다.

그래도 공부라도 좀 돼서 내일이라도 좀 보이나 싶으면 온순한 척 착실한 척이라도 하지만, 졸업장만 받으면 되는 곳이 학교이다 싶은 아이는 막 나간다.

그중에서 결석하면서 스스로 수업일수를 세는 아이는 그래도 자기 절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포기하면 정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천둥벌거숭이가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 제일 맡기 싫은 보직이 이른바 학생부다. 이름이야 학생안전부니 학생인권부니 하며 덧칠을 했지만, 그곳은 여전히 전쟁터다.

그곳에서 흡연을 지도하다가 툭 던진 한마디 욕설이 그대로 학생에게 녹음되어 무너질 데까지 무너지는 교사를 나는 보았고, 학교폭력을 지도하다가 불만을 품은 어떤 학생에게 거칠게 밀침을 당하고서도 끙끙 앓던 기막힌 참상을 나는 목격해야 했다.

교사를 우군으로 보지 않고 적으로 보는 듯한 아이들 앞에 방패막이가 되는 분이 학생부 선생님들이다.

왜 이리되었는지 우리는 이제 조금 안다. 자유니 인권이니 평등이니 하는 근대적 정신이 숨죽이고 있는 공간인 학교에서, 학생이 공부하는 농노라면 교사는 공부시키는 농노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코로나 시대에, 저 위에서 3분의 1이라고 지침을 내리면 3분의 1을 등교시키고, 3분의 2라는 지침을 내리면 3분의 2를 등교시키는 일만 기계적으로 하면 된다.

그러면서 교사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로 아이들을 겁박하며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박탈하는 공간에 던져진 채 엉거주춤 살고 있다.

이런 학교 시스템이 얼마나 학생을 무너뜨리고, 이런 교육 시스템이 교사의 진을 빼 왔는지는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를 갖겠다. 여기에서는 학생들이 무너지면서 가장 크게 무너지는 것이 교사고, 학생들이 망가지면서 가장 많이 망가지는 것이 교사라는 점만 말하고 싶다.

나는 교사가 진짜 병들고 죽고 무너지는 모습을 뼈아프게 겪었다. 그래서 학생도 살고 교사도 사는 방법이 없을까 오래 고민했다.

근본적 방법이야 있겠지만,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분명해, ‘아주 작은 일’ 하나만 제안한다. “학생들의 존중을 받으려면 먼저 학생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다 함께 찾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학생들이 교사들로부터 진심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면, 학생들도 교사를 지금처럼 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나는 교단에서 여러 차례 그 사실을 경험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대하는 ‘공적 언어’를 전부 높임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는 ‘매우 작은 제안’을 한다.

진심으로 학생들을 존중하는 그런 언어 표현을 사용하자는 소박한 제안이다. 한마디로 학교에서 아주낮춤의 ‘해라’체, 두루낮춤의 ‘해’체가 사라지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말은 말하는 대상이나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말하는 방법이 다르다. 특정 대상에 대하여 말하는 이가 존대 의향을 가질 때 사용하는 게 높임말이고, 하대 의향을 가질 때 사용하는 말이 낮춤말이다.

그런데 잠깐!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하대’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학생이 하대해야 할 사람인가. 나이가 적다는 그 이유만으로 공대의 언어가 아니라 하대의 언어를 사용해도 되는 대상인가.

우리말 높임 표현에서도 가장 발달해 있는 게, 대화 상대인 듣는 이(청자)를 높이거나 낮추는 ‘상대 높임’인데, 이게 아주 문제다. 이 문제, 복잡하기까지 하다. 학창 시절 <문법> 시간이라 치고 다음 표를 들여다보시라.

언어적 위상으로 볼 때 학생은 최하위 계층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것이다. 아이들 말을 빌리자면, 막 까도 되는 존재가 바로 학생 신분이다.

상하 위계로 절어 있던 조선 시대에도 요즘 같지는 않았다. 부모도 자식이 나이 들면 자식에게 하게체를 썼고, 스승도 어느 정도 학문이 되면 제자에게 하게체를 썼으며, 친구 사이에도 철이 들면 서로 하게체나 하오체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해라체나 해체는 아랫것들에게 집중적으로 썼던 표현이다. ‘아랫것’을 사전에서는 뭐라고 규정하는지 아는가. ‘예전에, 지체가 낮은 사람이나 하인 등을 이르던 말’이 아랫것이다. ‘예전’에 있던 말이다.

‘지체가 낮은 사람이나 하인’이 있던, 아주 아주 예전에 있었던 말이다. 지금은 없어진 말이다. 아니, 없어져야 할 말이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은 ‘아주낮춤’이나 ‘두루낮춤’의 대상이 아니라, ‘아주높임’이나 ‘두루높임’의 대상이다.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낮춤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맞다. <화법>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외 중의 예외, 매우 사적인 공간에서 아무도 안 들을 때, 둘이 있을 때, 흉허물없이 속마음을 나눌 때나 그리하시라. 교실에서 막말의 폐단은 너무 크고, 그 상처는 너무 깊다. 말하는 쪽은 친근하다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정말 아닌 경우가 너무 많다.

낮춤말을 ‘반말’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공식적인 수업에서조차 반말을 사용하는 교사가 있다.

가끔 공개수업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반말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런 수업이 너무 싫다. 수업이 끝나고 수업참관록을 적으라고 하면, 나는 그런 수업에 대한 평가를 거부한다.

그건 수업이 아니니까. “아무 때나 반말 찍찍 하는 게 너무 싫어요.” 아이들도 그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언제까지 그런 반말을 더 들어야 하는지 답답하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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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덧붙인다. 전체 아이들을 모아 놓고 훈화를 할 수 있는 것은 ‘교장’에게 특권이라면 특권이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전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하는 분을 뵌 적이 있다.

“너희들은 다 내 새끼다. 학생들도 다 내 새끼고, 선생님들도 다 내 새끼다.”

아이들도 어리둥절했고, 그분보다 나이 드신 선생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새끼’라는 말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짐승’을 가리키거나 ‘자식’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경악할 만한 언어폭력이다.

이런 세상은 이제 끝냈으면 좋겠다. 법을 바꾸자고 하고, 제도를 바꾸자고 하면, 다들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말을 바꾸자고 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대한민국 교육부에서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으면 좋겠다. 아니 어디 시도교육청에서라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시범적으로 실시했으면 좋겠다.

학교 현장에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교육감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때로는 교육부장관보다 더 거대한 존재로 다가온다. 아직도 학교 현장은 교장이 움직이면 움직인다.

그렇다고 전투를 하듯이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고, 검토하고, 토론하고, 합의하고, 그렇게 예쁘게 순리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학생은 언어로 존중받아야 하는 시민입니다” 등의 예쁜 슬로건도 만들면서, 학생들과 함께 추진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결국, 대한민국 모든 교실에서 반말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21세기의 우리 아이들은, 유치원생이건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고등학생이건, 그 누구도 아랫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육적으로 선언했으면 좋겠다.

코로나 시대, 기후 위기 시대. 학생들의 생존배낭에 ‘세계 시민성’을 넣어 줄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밑 작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계속)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
박용성/시대와 교육 연구소 대표. 책을 쓰며 우리 시대의 교육을 다시 디자인하고 싶어서 시대와 교육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스토리텔링, 스토리두잉으로 피어나다’ 등 열 몇 권의 책을 썼다. 티스쿨원격교육연수원에 ‘학교생활기록부를 디자인하라’라는 영상강의를 올려놓았고, 브런치에 ‘시대와 교육’이라는 작가명으로 ‘시에서 꺼낸 토론주제 30’과 ‘생각을 이끄는 120가지 이야기’ 등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탑재를 위하여 ‘한국어 수업’이라는 큰 제목으로 ‘한국어 문법’, ‘한국어 문학’, ‘한국어 독서’ 등 또 다른 책을 쓰고 있다.eraedu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