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교육적 맥락에서 성평등은 ‘교육의 권리’로 해석할 수 있다. 학교에서 모든 성별의 아이들이 동등한 성정체성 교육을 받는 일은 이들이 성장하여 직업세계의 일원이 되었을 때 남녀가 동등하게 사회를 이끌어가는 책무감과 결속감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성평등 운동은 여성이 직업세계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얻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개인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까지 성별에 따른 평등을 가져올 수 있도록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한 성교육에서 남녀의 양성평등이라는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나서 보편적인 성평등 교육을 추구하는 성중립성접근법(Gender-neutrality)을 목표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성인지성 교육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 보수우익 성향의 종교단체 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성인지성 교육 반대의 흐름은 시대의 퇴행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가족은 양성간의 결합으로 헌법에 명시된 만큼 올바른 가족제도를 가르치는 것이 공교육의 책무이므로 올바른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위험한 방향성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며, 포괄적 성교육을 철회하고 양성평등 교육과 가족중심의 가부장적인 성교육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스웨덴 어린이 청소년 성교육 책 등을 보급하는 여성가족부의 ‘나다움을 찾는 어린이 책 교육문화 사업’을 여론몰이를 통해 중단시킨 사례도 있다. 

여가부가 지난 2018년부터 시작한 이 사업은 아이들의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을 씻어주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을 시켜주자는 차원에서 우수도서를 선정해서 각 학교로 보내는 좋은 사업이었다. 포괄적 성교육과 성인지성 교육을 반대하는 맥락은 역사성을 갖는다. 

지금부터 그 역사의 뿌리를 캐보자. 말하자면 딸들의 얘기다.

왼쪽부터 잔다르크, 하쳅수트, 나이팅게일

비겁한 남자들에 의해 자칫 전설로 격하되었을 법한 잔다르크의 이야기가 어떤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역사의 진실로 남게 된 것은 오로지 그 재판기록 때문이다. 잔다르크는 평민의 딸이고 평민의 딸로서 왕을 세우고 100년 영․불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평민도 그것도 여자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민권(民權)‘의 개념을 세운 것이다. 그녀의 버려지고 배신당하고 마녀로 지목되어 불태워진 19살의 삶과 죽음의 여정은 평민의 눈물로써만 동정(同情)할 수 있는 슬픔의 영역이다.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 가누나”,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재로 돌아간 평민 잔다르크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무덤이 없으니 비석이 있을 리 없다. 로마 교황청은 1920년에 이르러서 잔다르크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고 시성했다.

역사 이래로 못난 남자들은 걸핏하면 여인의 공을 깍아 내리고 위조하고 삭제해왔다. 이집트의 위대한 여왕 파라오 하쳅수트는 그녀의 의붓아들 파라오에 의해 거의 모든 업적이 훼손당하였다. 심지어 하쳅수트가 파라오로 재위했던 20년의 기간까지 ‘없던 시간’으로 부정했으니, 의붓아들 투토모스 3세의 질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만하다.

믿거나 말거나 늘 남장(男裝)한 여자 교황이 존재했고 그녀의 이름은 요안나였다. 교황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다가 그 자리에서 여성임이 드러나 남자들에게 맞아 죽은 요안나는 여성이라는 신분 때문에 교황 연대표나 모든 기록에서 삭제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증언하고 있다. 

영화 교황 요안나
영화 교황 요안나

종교조차 딸들의 세기를 시기했다.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여서 인류의 원죄를 여자에게 짊어지게 한 신 역시 남성이다. 신은 성이 없다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의 신을 묘사한 모든 대목은 하나님이 다 남성으로 나온다. 신의 아들 예수도 남자다.

18세기에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쓴 최초의 여성인권운동가인 영국 런던 출신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는 가난한 평민의 딸이다. 아내가 남편에 의해 합법적으로 매매되던 시대, 근대의 인간해방의 역사조차 여성에게는 비켜가던 시절에 그녀는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여 남자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의 외로운 사상은 20세기 이후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시금석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상류층 가문의 딸로 태어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스스로 몸을 낮춰 평민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천직(賤職)이었던 간호부가 되었고, 평등한 의료의 혜택을 위한 사회운동, 병원개혁 운동에 전념했다. 

사재를 털어 성 토머스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양성소를 세움으로써 교회나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간호교육을 최초로 독립된 정식학교로 옮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치는 실종되고 지도층은 부패하고 관료주의가 팽배하면 국민수준은 저절로 낮아진다. 종교단체마저 보수우익이 날뛰고 숭고한 성평등 교육을 매도하는 시대에, 국민의 민도는 내리막길이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학교의 성평등 교육은 제자리 뛰기를 반복하고 청소년의 집단 성폭행과 디지털 성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국민의 행복은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 학교교육 그것도 미래지향적인 성평등 교육이 희망의 씨앗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딸들의 시대여야 한다. 우리의 딸들이 마음 편안하게 사는 세상, 그녀들이 웃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교육과 정치를 탄생시켰으면 좋겠다. 

김대유 경기대 초빙교수
김대유 경기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