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는 어떠한 개념적 진화를 이뤄왔을까

[에듀인뉴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가치와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설명하고자 하면 선뜻 입이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계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에서 완벽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민주주의가 교육 현장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에듀인뉴스> 이돈희 발행인은 민주주의의 개념적 내포와 외연의 진화적 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의미론적 검토, 주요쟁점의 확인, 실천적 문제의 분석 등을 이야기하는 연재를 통해 교육현장적 여건과 문제를 규명하고 실천적 가능성과 한계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개념은, 그 의미와 실천에 있어서, 고정된 상태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는 주로 국가의 통치체제에 그 관심이 주어졌다. 한 국가를 한 사람의 통치자가 다스리느냐 혹은 다수로 구성된 통치집단이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특징을 달리하는 국가의 여러 유형들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였다.

즉, 예컨대 국가를 군주 혹은 귀족집단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demos)이 직접 정치 혹은 대의 정치의 틀에 의해서 통치할 수 있도록 한 체제가 민주주의이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정치의 제도적 형태인 (1)‘민주정체’(民主政體, democracy)를 의미한다.

​다수의 통치는 곧 다수의 의사에 의한 제도 혹은 정책의 결정과 그 집행을 의미한다. 국가 운영의 의사결정에 다수가 참여한다는 것은 의견의 다양성이 있음을 기본적으로 상정한다. 그 다양성은 개별적인 참여자를 중심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별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개념에서부터 민주주의는 적어도 소박한 의미의 (2)‘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를 함의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다원주의는 어떤 규범적 기준의 적용을 받는 제한적 다원성을 지향할 수도 있고, 어떤 제약의 기준도 없는 개방적 다원성을 추구할 수도 있다.

고전적 민주주의가 태동한 당시의 다원주의는 개인적 혹은 집단별 이해관계에 의한 의견의 다양성 정도가 반영되는 아주 소박한 의미의 제한적 다원주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방적 다원주의가 확장되어 어떤 제한적 조건도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보장할 수 있느냐의 불안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다원성을 한정하는 ‘완전주의’(perfectivism)의 반론도 있다.

​민주주의의 초기에는 의사결정의 일상적 절차나 방법 중에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것은 다수의 의사에 의한 결정이었다.

지금도 다수결의 원칙은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가끔은 최종적인 결정의 규칙으로 널리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중의 참여에 의한 다수의 결정이라는 매우 단순한 구조적 원칙으로 운영되기 어려운 경우가 너무 많다.

플라톤(Platon)이 우려한 대중의 선동적 폭력도 있을 수 있고, 집권의 중심세력이 지닌 기득권을 교묘히 이용하여 기만적인 포퓰리즘을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어떤 가치체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은 전체주의나 독제체제의 경우보다 절차적으로 복잡하고, 따라서 이러한 절차를 운영하는 규칙들도 정교하고 엄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핵심은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절차적 규칙의 기반과 그 구조라고 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3)‘절차주의’(節次主義, proceduralism)라는 것이다.

​의사결정의 절차는 구조적으로 단순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화된 규칙에 따른 기계적인 자동적 요식행위의 과정일 수도 있고 진지한 관심과 집요한 반성적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해결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의사결정의 절차가 단조롭고 부실할 경우에 결정된 결과는 합리적 선택이나 성실한 의사의 반영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된 결과 그 자체가 질적으로 타당성을 잃은 것일 수도 있고, 불가피하게 정교한 보완을 필요로 하면 결과적으로 효율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목소리가 큰 독단이 지배하였거나 부당한 세력이 강압적으로 작용하였다면, 결정된 결과의 민주주의적 가치는 훼손되거나 소실되는 셈이 된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은 기계적인 단순성의 효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여한 구성원들의 각자가 지닌 관심, 능력, 의견, 열정, 책임감 등이 종합적으로 응결된 협의적 과정의 결정체여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결정체 하나하나의 질적 특성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그러한 결정체의 생산과정에 익숙한 공동체의 문화적 바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4) ‘협의주의’(協議主義, deliberativism)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의문화는 좀 더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면, 협의의 과정에 참여하는 개인들에는 능력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각 개인별로 사안에 따라서, 경험에 따라서, 가치관에 따라서, 때로는 상황적 특성에 따라서 달리 발휘되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적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참여자들을 의사결정을 요하는 문제의 맥락과 상관없이 ‘더 유능한’ 집단과 ‘덜 유능한’ 집단으로 양분하는 절대적인 구분은 물론이고, 상대적 구분도 적용하기가 어렵다.

장기간의 전문적 교육을 받은 법조인, 의사, 교수 등이 특정한 지역사회의 교통, 보건, 주택, 환경, 복지 등의 모든 문제의 전문가는 아니다.

특정한 문제에 대한 관여는 참여자의 일상적, 전문적, 특수상황적 경험 등의 바탕에 따라 의사결정에 기여할 수 있고, 이해관계가 얽혀 있거나 헌신적 성의의 의사가 있어 의무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의 자격, 권리, 의무, 기회 등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근거하여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부여된다.

​참여란 단지 물리적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적 자질, 즉 존엄성, 권리, 의무, 능력(지력), 경험, 의지 등의 가치를 소유한 주체로서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해결의 과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때 문제의 의식은 현재 당면한 사고나 재해나 불편 등의 해결과 같은 소극적 가치의 실현에만 아니라, 삶의 조건에 대한 발전적 기획이나 창조적 재구성이나 해묵은 숙원의 실현 등과 같은 적극적 가치의 구현에도 적용된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참여의식을 공유함은 물론이고, 각종의 문제해결에 자신의 정체적 자질을 다하여 문제와 가치를 인식하고, 해결하고, 기여하고, 전망하는 대열에, 자유의 의지와 평등의 원칙에 의해서, 함께 하는 삶 그 자체를 영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5) ‘생활양식’(生活樣式, mode of life)이다.

# 이 글은 이돈희 교수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 '교육사철정담론'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연재 예정 내용

민주주의의 개념적 진화과정/ 제도적 민주주의의 형성과 발달/ 플라톤은 왜 민주주의를 경멸하였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민주주의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나/ 민주주의와 그 적들/ 민주주의의 내홍: 다원주의와 완전주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절차론적 원리와 문제/ 협의론적 문제해결은 가능한가/ 생활양식으로서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민주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교육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