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그림책에 녹아 든 인간의 삶을 어떤 모습일까. 교사 등 교육자의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림책은 어떤 통찰을 전해줄까. <에듀인뉴스>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모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와 함께 그림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김다혜 서울 불광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김다혜 서울 불광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세상의 모든 것은 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존재하나 봐


우리가 가장 밀도 높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는 (대부분의 연인들이 그러하겠지만) 그가 군인이던 시절이었다. 나는 여행 갈 때마다 사 왔던 아껴둔 편지지를 꺼내 그에게 편지를 썼다.

대만 작은 상점에서 샀던 천연 염색 된 편지지, 인도 라다크에서 사온 천으로 만들어진 편지지, 한지 같은 거친 질감에 풀잎, 꽃잎이 들어간 편지지 같은 것들에 어울리는 펜을 골랐다.

어떤 날은 붓 펜을, 어떤 날은 만년필을, 또 어떤 날은 얇은 잉크 펜을 사용했다.

편지 봉투까지 편지지와 같은 것으로 맞춰 우표를 붙이고 곱게 주소를 적으면, 마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듯한 뿌듯함을 느꼈다.

마땅한 편지지가 없을 땐 크라프트지에 편지를 썼다. 내 글씨로 이루어진 편지글, 글과 어울리는 그림을 곁들어 한 장 가득 채운 크라프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면, 그와 함께 분위기 있는 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가뭄에 단비 같은 그와의 통화에서 그는 내게 편지를 쓰는 것이 삶의 전부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온갖 것들이 편지를 쓰기 위한 재료로 보인다고.

그는 편지에 어떻게 글자를 배치해야 할지 생각하고, 우표를 골라 붙이는 과정 하나하나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편지를 쓸 때마다 연습장에 써본 뒤 퇴고를 거쳐 편지지에 곱게 옮겨 담는다는 그의 목소리엔 설렘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어느 날엔 세로 방향으로 글자를 빼곡히 적어 편지를 보내왔다. A4종이 앞뒤 가득히 자로 잰 듯한 세로 글자를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그의 장인 정신마저 느껴졌었다.

계절이 바뀔 무렵엔 편지에 계절을 담아 보냈다. 벚꽃 잎을 편지지 전체에 한 잎 한 잎 풀로 붙여 벚꽃 잎이 흩날리고 있는 편지를 읽을 때면 나는 그와 같이 벚꽃 길을 산책하는 상상을 했다.

편지 처음과 끝부분에 그가 붙여놓은 소담한 꽃 잔디, 청순한 코스모스를 보며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동시에 찾아오는 계절의 설렘을 나눌 수 있어 참 좋았다.

그가 제대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여름날, 우린 함께 속초 여행을 떠났다. 속초 여행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일정 속에는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구글 지도에 표시해 두었던 서점도 있었다. 서점에 도착한 우리는 30분 동안 서점을 각자 구경하며, 서로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을 골라오기로 했다.

서점 주인의 취향으로 친절하게 큐레이팅 되어있는 책들을 구경하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나는 책들의 목차를 훑어보며 그가 좋아할 것 같은 음악 에세이를 선물할지, 내가 좋아하는 식물 책을 선물할지 고민에 빠졌다. 한참을 더 돌아보며 책을 찾아 헤매고 나서야 그도, 나도 좋아할 것 같은 꼭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약속한 시간이 되어 각자에게 선물할 책을 결제하고, 우린 선물을 주고받았다.

‘봉투에서 오빠가 좋아하는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책이 나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생각하며 기대 반, 의심 반으로 그가 내게 선물한 책을 확인했을 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준 봉투 속엔 내가 골랐던 그림책과 똑같은 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표지.(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저, 모래알)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표지.(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저, 모래알)

우리가 서로에게 선물한 그림책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는 북쪽에 사는 곰이 세상 끝 남쪽으로 날아간 연인 새를 찾아가며 적어 내려간 사랑의 편지이다.


새를 만나기 위해 겨울잠도 자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곰의 따뜻한 마음이 편지에 적혀 차곡차곡 쌓인다. 곰은 날마다 새에게 편지 쓴다. 그러면 꼭 새가 곁에 있는 것 같으니까. 뱃사람의 그물에 걸려 물에 흠뻑 젖기도, 안개 속에서 길을 잃기도, 사막을 만나 목이 바짝 마르기도 하지만 매일 사랑을 노래하는 곰의 마음은 여전히 너무나도 따뜻하다.

곰은 여정이 힘들지 않다. 새를 향한 그리움이 기쁨이 되어 곰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걷는 길에 뜨거운 화산을 만나면 그날의 편지에는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는 모래를 한 줌 넣어준다. 보름 동안 잠을 못 자서 오늘만큼은 늦잠을 잘 거라는 편지 끝엔 꿈속에 네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서 새를 만나지 못한 시련에도 곰은 실망하지 않는다. 이제 함께 겨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며 좋아하는 곰의 사랑이 여행 내내 아름답게 펼쳐지며 마음을 울린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고 연락할 수 없을 때,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 쑥스러울 때, 무언가 진지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때 편지를 쓴다.

세상에 매체는 정말 많고,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단은 수도 없지만, ‘편지’라는 매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그 어떤 수단보다 낭만적이다.

‘편지를 쓰고, 부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당장 만날 수 없는 결핍과 서로의 부재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속초 여행에서 우리가 동시에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를 고른 이유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정성 가득한 곰의 편지가 우리에게 너무나 낭만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꾸역꾸역 견뎌낸 결핍의 시간들, 한껏 기분 내 적은 기쁨의 순간들은 이제 끈적한 추억이 되어 편지함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편지 속 벚꽃 잎도, 코스모스도 본래의 색깔을 잃은 채 자리한 빛바랜 우리의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으니 또다시 마음이 울렁인다.

오늘만큼은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새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곰의 마음으로.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