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가장 보편적인 가치와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한 마디로 설명하고자 하면 선뜻 입이 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계는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에서 완벽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민주주의가 교육 현장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에듀인뉴스> 이돈희 발행인은 민주주의의 개념적 내포와 외연의 진화적 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민주주의의 의미론적 검토, 주요쟁점의 확인, 실천적 문제의 분석 등을 이야기하는 연재를 통해 교육현장적 여건과 문제를 규명하고 실천적 가능성과 한계성을 논의하고자 한다.

요약 고대 그리스의 대표 철학자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30여 편에 달하는 대화록을 남겼는데 그 안에 담긴 이데아론(형이상학), 국가론 등은 고대 서양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출처=두산백과)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대표 철학자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30여편에 달하는 대화록을 남겼으며 그 안에 담긴 이데아론(형이상학), 국가론 등은 고대 서양 철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출처=두산백과)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한창이던 시대의 아테네 시민으로 살던 철학자이다.

그는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한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 분개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가 민주주의를 경멸한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국가는 귀족주의의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여 타락한 수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설명으로는, 우수한 이성의 능력과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귀족국가가 욕망에 지배되는 열등한 대중이 다스리는 민주국가로 타락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Republic, BK VIII)에서 정치체제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귀족정체(Aristocracy), 공명정체(Timocracy), 과두정체(Oligarchy), 민주정체(Democracy), 잠주정체(Tyranny) 등이다.

민주정체는 귀족정체에서 타락하는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인 잠주정체를 낳는 바로 직전인 네 번째 단계에 있다. 이러한 구분은 전체로서 국가등급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 감각적 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實在)인 이데아(idea)의 세계를 상정하는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 세계에 대한 개체 인간의 인식능력을 포함한 인성적 구조의 특성을 언급하면서 설명되고 있다.

플라톤은 사람들을 크게 세 등급으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금(金)의 영혼을 가진 등급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이성(理性)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둘째는 은(銀)의 영혼을 가진 등급에 속하며 기개(氣槪)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고, 셋째는 동(銅)이나 철(鐵)의 영혼을 가진 등급에 속하고 욕망(欲望)이 주도하는 사람이다.

세 가지 등급의 영혼이 각기 계발하는 덕성은 그 범위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이성이 주도하는 금의 등급에 속하는 계급은 지혜와 용기와 절제의 덕성을 균형 있게 구비하고, 기개의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은의 등급에 속하는 계급은 용기와 절제의 덕성을 겸비하며, 욕망에 지배되는 동(혹은 철)의 등급에 속하는 계급은 주로 절제의 덕성을 지니며 생활한다.

"귀족정치”는 금의 영혼이 이성의 작용으로 이데아를 탐구하고 지혜의 덕성을 소유한 상태에서 국가의 통치에 종사하는 체제이다.

이때 은의 영혼은 기개의 작용으로 용기의 덕성을 발휘하며 나라의 방위에 종사하지만, 귀족정체가 타락하면 국가의 통치를 맡기도 한다. 이 경우가 “공명정체”이다.

이보다 한 단계 더 타락하면 금권을 추구하는 부유층이 지배하는 “과두정체”(혹은 금권정체)로 된다.

그러나 과두정체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층 계급이 점점 증대하면 결국 빈곤층이 민중의 자리를 독점하는 승리자가 된다.

욕망의 충족 자체를 즐기는 수준으로 기울면, 동이나 철의 영혼이 지배하는 민주정체가 자리를 잡는다. 민주정체는 과두정체가 한 단계 더 추락하여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민중의 승리자, 즉 민주적 승리자는 다른 편의 일부를 죽이고 일부를 추방한 다음, 나머지 시민들에게는 평등하게 시민권과 관직을 배정한다.

바로 과두적 아들인 민주주의자도 자신의 욕구를 끝없이 추구한다.

다만, 과두주의자들은 주로 필요한 욕구, 즉 본능적으로 혹은 생존을 위하여 추구하는 “필요한 욕구”이지만, 민주주의자들은 재물에 대한 탐욕과 같이 절제의 필요를 넘어 선 “불요불급한 욕구”까지 분별없이 추구한다.

민주정체에서는 사람들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 통치에 종사하거나, 방위자의 대열에 참여하거나, 평화롭게 생산활동을 즐기거나 간에, 누구의 통제도 간섭도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만약에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면, 관직을 맡거나 배심원 노릇을 하는 것을 아무도 강제적으로 제약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각자가 어떤 형태로든지 각자의 마음에 드는 삶의 방식을 찾고 거기에 따르는 개인적인 대책을 세우면서 살아 갈 수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신나는 삶을 누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통치체제에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생겨나므로, 마치 온갖 꽃의 수를 놓은 다채로운 외투처럼, 온갖 특징을 가진 장식이 있어서 어느 정체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생활의 차원은 이렇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의 문제는 따로 있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면, 누가 선장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를 물으면서 민주주의에 관해서 경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아마존)
(출처=아마존)

​...가령 어느 선박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선주가 체구나 체력에 있어서는 그 배에 탄 누구보다도 우월하지만, 청력과 시력이 다소 떨어지고 항해에 관해에서는 약간의 조예가 있을 뿐인 사람이다.

이런 상태에서, 선원들은 키를 조종하는 일을 서로 맡겠다고 다투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그 기술을 배운 적이 없으며, 언제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선생을 내세우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 기술이 가르치고 배워서 익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누군가가 그것을 배워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를 박살낼 태세가 되어 있는 분위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선주를 에워싸고는 자신들에게 키를 맡겨 주도록 요구하며 온갖 짓을 한다.

때로 자신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성공한 편을 죽여 버리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리거나 한다.

그리고선 점잖은 선주에게 최면제를 쓰거나, 술에 취하게 하거나, 또는 그 밖의 별별 수단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한 다음, 배 안에 장치들을 사용해서 배를 지휘한다.

이쯤이 되면, 승리감에 찬 그들은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이고, 의례히 그런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주도한다.

게다가 선주를 설득해서든 강제해서든 자기들이 지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을 항해술과 조타술에 능한 사람으로 치켜세우고, 배에 관해서 잘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비난한다.

실제로 그들은 참된 키잡이가 하는 일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배를 지휘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되려면,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요구되는 온갖 것들에 관해 유의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던 간에, 키를 조정하는 방법에 관하여 기술적 지식이 있고 그것에 숙달해 있어야 조타술을 제대로 익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배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정작 조타술에 제대로 능한 사람은 영락없이 천체관측자 정도로만 취급받고, 아니면 아예 귀찮고 쓸모없는 수다쟁이로 멸시를 당하게 된다.(국가론, 8권 557.)

위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민주주의의 국가를 이렇게 평한 것이다.

민주정체에서는 어떤 국가가 정의로운지, 어떤 인물이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지, 어떤 권리와 의무와 자질이 국민들에게 요구되는지에 관하여 아무런 식견도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국가의 중심에서 통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나라의 통치자는 발굴되거나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선동하거나 회유하거나 압제할 수 있는 인물이면 된다.

진실로 통치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적격의 인물은 솔선하여 나서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진실이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아픈 사람이 의사의 문전으로 찾아 갈 필요가 있고, 또한 다스림을 요하는 모든 사람이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의 문전으로 찾아갈 필요가 있다.

진실로 유능한 능력을 가진 통치자가 다스림을 받을 사람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다스림을 받으라고 간청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통치에 종사하고 있는 정치가들을 방금 우리가 언급한 선원들에 비유하고, 그들한테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되거나 천체관측자 정도로 취급받는 사람들이 참된 키잡이로 비유한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위의 책, 같은 부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의 여러 곳에서는 이러한 풍으로 민주주의를 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물론 민주국가 중에는 더욱 성숙한 국가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국가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인왕의 기준에서 보면, 민주국가의 통치자들은 정의로운 국가의 개념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한 철인적 자질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정체가 추락하면 이제는 아무도 자제력이 없고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정체는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장악되지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은 어디엔가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탁월한 우두머리가 나타나서 권리를 휘두르면 그는 결국 폭군이 되어 버리고 잠주정체가 구축된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다가 나중에는 제거하려고 움직이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폭군은 다름 아닌 민주주의자의 아들이다.

그는 가장 정의롭지 못한 존재가 되어 가장 악질적인 권력자가 된다. 그는 살인과 수탈과 같은 끔직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무법자이다. 그에게는 자제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가장 저질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만약 폭군이 자기가 가진 재화를 모두 탕진하고 가난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도적질 하거나 강탈하는 일을 일삼는다.

난폭한 행위를 과하게 하다가 보면, 주변의 신하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여 자신의 자유를 다소 제한기도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보복을 당할 위험을 항상 느끼게 되고 집을 떠나기를 두려워하여 집안에서만 머문다.

무법자의 행동이 결국 자신을 스스로 감금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문제는 이런 국가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귀족국가와 민주국가의 조건


​플라톤의 사상사적 영향에 관하여,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는, 2천년이 넘는 서양사상사를 통하여 이어져 온 철학적 논의는 플라톤 사상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표현하였다.

플라톤의 사상은 현실적인 감각세계를 초월한 경지, 즉 오직 이성의 사유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데아의 실재에 대한 인식과 그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주의적 사고와 경험주의적 방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 세계의 실재에 관련하여 전개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정치사상은 서양의 지성사에서 다루어 온 기본적인 주제와 문제를 매우 체계적으로 논의한 포괄적 구조와 체계를 가진 것이다.

그 체계 속에서 다루어진 민주주의의 개념적 특징과 문제를 몇 가지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관련하여, 나는 그가 결론적으로 정리한 내용, 특히 현실적인 감각의 세계와 초현실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되는 이원론적 세계관과 초월적인 실재를 인간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한 인식론적 논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가 전개한 이론적 규모와 정교한 논의와 실상의 기술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실제상황에 관하여 많은 문제들을 이미 예언해 두었다.

아마도 그 문제들은 귀족주의적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추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당시의 아테네의 시민으로서 실생활적 경험과 관찰이 영향을 준 것일 수도 있다.

​우선, 플라톤이 귀족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이데아(진리)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는 통치자가 정의로운 국가를 경영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추상적 사유의 내용에서만 아니라, 그가 실제로 경험으로 관찰한 것, 특히 예언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실제 사례로서 발생하게 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포함한 현실적 부조리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폐해를 예고하였다.

무지한 대중이 선동에 휩쓸리고, 가난한 계층이 다수의 힘으로 부자들의 재산을 탐내는 폭력에 가담하며, 공직과 요직의 배분에 전문성이 무시되고, 패거리 형태의 세력들의 질시나 적대의식으로 합리적 대화와 문제해결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기만과 술수를 서슴지 않으며, 정권이 교체되면 정책적 일관성과 사업의 연속성은 무너지는 현상들이 수없이 관찰된다.

오늘의 민주국가 중에는 이러한 무정부적 혼란에 가까운 사회를 정리하는 데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세력이나 힘의 작용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고 혼란스런 수준에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고도의 강대국 혹은 선진국임을 자랑하는 국가에서도 관찰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다른 어느 통치체제의 경우보다 통치자가 통치에 성공을 거두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있다.

​시민 불복종, 정책적 저항, 그리고 타협이나 공존이 불가능한 정치적 노선들의 대결 등, 사실상 통치자나 통치집단에 무한적 자유가 주어져 있고, 온갖 다양한, 서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기도 하는 신념체제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규칙과 원리를 유지하면서 통치에 성공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성공한 통치는 단지 덜 실패한 수준이라고 말해야 할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만 보아도, 정치적 노선이나 소속 정당의 당론에 무조건 집착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다.

거의 모든 정치적 의제에 관하여 그러한 불합리한 태도를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 지도력과 저향력의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가 없고, 양자간의 협상이나 타협도 불가능하게 된다. 오직 필사적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태라면 민주주의는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이고 국가는 기필코 망조에 빠지고 만다.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분명히 민주주의에 산다는 것은 행운도 아니고 축복도 아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플라톤이 경멸하는 민주주의이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귀족주의를 선호하는 것은, 적어도 통치자 혹은 통치집단이 무제한적 자유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보장받는 체제의 구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 당시 아테네는 실제로 민주주의적 성취에 걸맞은 세련된 민중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작은 도시국가였지만, 그는 민주주의가 이데아론적 정의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귀족국가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국가이지만, 그 철인왕은 방위자 계급과 생산자 계급이 별도로 공존하면서 보조적 역할을 분담하지 않으면 정의의 국가를 건설할 수가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통치자 계급, 방위자 계급, 그리고 생산자 계급은 체계적인 교육제도의 운영을 통하여 인성적 특징과 역량을 변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철인왕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를 구상하였다.

교육은 처음에 모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시작한다.

그들은 6세에 정규 교육이 시작하기 이전까지는 신체적-보건적 습관을 기르고, 제1기의 정규교육이 시작되면 전쟁을 목표로 하는 초보적 군사 훈련과 학문에 접근하기 위한 수학 교육을 받게 된다.

제2기 교육은 17세에 시작하여 20세가 될 때까지의 것으로 신체 단련과 군사 훈련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실시된다. 여기에서 성적이 불량한 자는 생산자 계급으로 배치된다.

제3기 교육은 20세에서 30세까지 계속되며 형이상학의 예비적 교과인 대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이론 등을 수업하게 하고, 여기서 성적이 불량한 자는 통치자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되어 방위자 계급으로 배치된다.

제4기는 30세에서 35세까지의 교육으로서 형이상학, 변증법 등을 학습시켜 사물의 실상을 의미하는 이데아를 탐구할 수 있게 한다.

제5기는 35세부터 50세까지의 기간으로서 군사와 정치의 실무를 맡아 실습하고, 그 이후에는 최고의 이데아, 즉 모든 이데아의 통일원리인 “선(善)의 이데아”(the Idea of the Good)를 탐구하게 하는 한편 교대로 정치를 관장하고 후진을 교육하게 한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러한 플라톤의 교육계획은 민주국가가 구성원의 자질을 계발하는 데 소요되는 과정보다도 구조적으로 훨씬 단순하고 운영도 훨씬 용이하다.

사실상 민주주의는 그 이념과 규칙과 습관을 익히지 못한 집단이나 조직이나 국가에서 그 성공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체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오직 민중의 이지적, 도덕적, 사회적 세련성의 수준만큼 그 실현을 기대할 수 있는 체제다.

민주주의는 통치자 측과 민중 측이 그 역할과 임무와 책임을 언제든지 서로 바꾸어 맡을 수 있도록, 즉 정권의 교체가 있어도, 덕성과 지혜와 교양과 습관이 세련되고 훈련된 구성원을 균형 있게 확보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성공이 가능한 체제다.

다른 통치체제도 그렇겠지만, 특히 민주주의는 민중, 국민, 혹은 구성원 자신들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통치에 참여하여 일구어 가는 제도이므로, 구성원의 교육수준, 단순히 민주주의 자체를 정보나 단편적 지식으로가 아니라, 그 이념적 특징, 실천적 원리와 규칙, 생활의 기술과 습관에 이르기까지 심도 있는 이해와 학습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있는 교육수준을 전제로 한 제도다.

민주국가의 자유와 평등과 성장의 삶은 교육과 학습의 성과 만큼 그 내실의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