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되는 본성, 뒤따르는 거짓 그리고 가해지는 제재

[에듀인뉴스] 우화(寓話)는 장르적으로 보면 서사적인 것과 교훈적인 것이 절충된 단순 형식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교적 저차원적인 사리 분별을 위한 것이나 우리 삶에 알아두면 좋은 실용주의적인 것입니다. 같은 형식으로 우리의 삶에서 뗄 수 없는 도시와 환경, 그를 이루는 많은 건물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와 일상에서 놓치고 살았던 작은 부분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사는 도시와 건축에 관한 진솔한 물음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텅 빈 거리.(사진=ytn 캡처)

새해를 맞이한지 일주일이 흘렀다. 여느 때처럼 연말의 분위기를 보내고 일상을 되찾는 시점이지만 올해 되찾은 일상은 작년과 다를 바 없는 질병으로 인해 여전히 모이기가 힘들고 어려워진 그러한 예전의 삶을 되찾았다. 

모이고 싶고, 거리에 나가고 싶고, 내가 겪은 일을 나누며 웃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그리고 다시 일하러 가고…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비대면 회의, 비대면 교육이 팽배해졌지만 아직도 그것이 잘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모이고 싶고, 나누고 싶고 그리고 진심을 전달하고 싶은 사람의 본성. 현재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바로 이러한 본성에 대한 제재에서 시작된다.


통제되는 본성, 뒤따르는 거짓 그리고 가해지는 제재


요즘 한참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비대면’은 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진실성이 조금 떨어진다. 가령 수업에 좀 참여하기 귀찮고, 회의에 좀 늦게 참석하고 싶으면 간단한 핑계를 대면 된다. ‘기술적 이유로 혹은 인터넷 연결이 좋지 않아… 늦었습니다.’ 잘 하다가도 중간에 갑자기 화면을 끈다한들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더 많은 제재를 가한다. 학점을 깎는다던가, 인사고과에 반영한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그 제재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그 두려움도 잠시 핑계만 대면 원하는 대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누가 마다하랴. 

반면,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출근할 때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한 시간이 넘는 출근을 위해 한 시간을 더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 가는 길도 혹여 지하철을 놓치지 않을까, 버스를 놓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간다. 어찌저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설령 늦더라도 10분을 넘지는 않는다. 그냥 아프다 하고 안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냥 가는 길에 버스가 고장나서 라는 핑계를 댈 수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젓고 그냥 간다. 

코로나로 인해 택하게 된 비대면 회의는 성실하게 임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출처=https://www.airklass.com)
코로나로 인해 택하게 된 비대면 회의는 성실하게 임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출처=https://www.airklass.com)

진심을 전달하는 공간의 힘


두 상황의 차이는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나의 수고가 들어가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어떻게든 제 시간에 회사에 도착하고 싶어 한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컴퓨터를 키는 수고와 출근 전 세면과 복장을 갖추고 시간에 맞추어 집을 떠나는 수고는 근본부터 다르다.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적을수록 사람은 잔꾀를 부리기 쉽다. 책임의 무게가 클수록 조금 더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를 갖춘다. 그 책임은 누군가 지어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지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는 이유는 회사에 출근하여 일을 함으로 월급을 받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책임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학교에 등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림으로 지성과 사회성을 키우는 것으로 보상 받는다.

이처럼 우리는 목적에 맞는 공간을 찾아가는 행위, 그 공간에 가기 위해 이동하는 수고를 거침으로 원하는 목표를 이루며 살아간다. 

출근을 위해 서두르는 모습.(사진=kbs 드라마 직장의신)

공간의 가변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과 한 공간 안에서 직접 만나 눈빛과 음성과 손동작을 통해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따라서 회사원이나 학생들이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순한 통제의 의미가 아니라 공유의 의미가 더 크다.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힘은 여기에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게 하는 것. 그 만남과 목적을 벽과 슬래브로 보호하는 것. 그것이 건축이다.

현재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한 공간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한 공간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요구가 된다. 집이자 사무실인 공간, 방이자 학교인 공간, 거실이자 회의실인 공간, 등 주거시설 내부에 가변성이 요구 되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사무공간의 분위기를 갖추어야 하고, 방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도 어느 정도 교육공간의 분위기를 갖추어야 한다. 그 공간에 가변을 더하기 위해 우리들의 물리적 수고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귀찮아 포기한다면 우리는 쉽게 핑계를 대며 우리 삶에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를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공간의 변화를 시작으로 주거공간, 나아가 우리가 사는 도시공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야 한다. 그 공간의 변화의 시작은 가변성을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말은 쉽지만 이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여간 귀찮고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선택의 기회가 없다. 왜냐면 우리의 본성을 유지하려면 마땅히 지어야 하는 책임이니 말이다.

거주하기 위해 동굴을 찾던 것이 인간이 가진 공간에 대한 욕구의 시작이다. 다양한 욕구에 맞추어 사람이 공간을 스스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간에는 다양한 인간의 본성과 욕구가 담겨지게 되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의 건물과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왔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본능이 통제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져야 하는 책임은 통제에 불응에 따라 무는 벌금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져야 하는 공간에 대한 수고가 그 책임이다. 이러한 수고를 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본성을 억누르는 더 많은 제재를 지게 될 것이다.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도시설계사, 건축도시정책연구소(AUPL) 공동대표.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건축학 전공 후 프랑스 그르노블대학 Université Grenoble Alpes에서 도시학 석사졸업, 파리고등건축학교 Ecole spéciale d’architecture (그랑제꼴)에서 만장일치 합격과 félicitation으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파리 건축설계회사 AREP Group에서 실무 후 현재 파리 건축사무소 Ateilier Patrick Coda에서 근무 중이며 건축도시정책연구소(AUPL)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그는 ”건물과 도시, 사람을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건축가입니다. 우리의 삶의 배경이 되는 건축과 도시의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유용하게 나누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