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에세이] 외할머니댁 '감나무가 부르면'..."닿고 싶다, 댐 속에 잠긴 외갓집의 추억"
[그림책 에세이] 외할머니댁 '감나무가 부르면'..."닿고 싶다, 댐 속에 잠긴 외갓집의 추억"
  • 김여진 서울 당서초 교사
  • 승인 2021.01.10 08:2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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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그림책에 녹아 든 인간의 삶을 어떤 모습일까. 교사 등 교육자의 교육활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 그림책은 어떤 통찰을 전해줄까. <에듀인뉴스>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모임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와 함께 그림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김여진 서울 당서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김여진 서울 당서초 교사/ '좋아서하는그림책연구회' 운영진

어떤 그림책은 나를 특정 시공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지금 내가 주렁주렁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온전히 『감나무가 부르면』 덕분에 기억 속에서 고스란히 모셔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엄마의 고향이자, 내 엄마의 엄마가 60년을 머물렀던 곳의 이야기다.


차가운 이불이 데워지는 시간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도시 깍쟁이 여자애였던 나는 사실 외할머니를 만나러 시골에 가는 길이 늘 내키지 않았다.

외할머니 댁은 기차를 타고 영주역에 내려서도, 택시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 택시가 없으면 엄지손가락을 들고 지나가는 차를 잡아서 타고 들어갈 만큼 아주 깡촌이었다.

드라마 속 밝은 표정의 한 아역 배우들은 명절날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할머니이!” 하고 사랑스럽게도 달려가던데.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유난히 잎이 반들거리던 마당 앞 감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만 꾸벅 하고는 친척들이 묻는 말에만 간신히 대답을 하는 정도였달까.

시골엔 불편한 게 왜 그리도 많았던지. 겨울밤에는 왜 그렇게 오줌이 자주 마려왔던 걸까?

오줌을 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리 코가 떨어져 나가도록 공기가 차가워도 밖에 따로 떨어진 있는 변소를 가야간 했다. 화장실이라고 하면 당치 않다. ‘변소’ 가 맞다. 휴지를 둘둘 손에 말고 나가서 변소 위에 걸려 있는 노란 불의 스위치를 켠다. 정말 켜고 싶지 않은데, 안 켜면 더 무섭다.

변소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자세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구릿구릿한 냄새가 코를 살살 파고 들어온다.

‘파란 휴지 줄까, 빨간 휴지 줄까? 하고 손이 쑥 올라오진 않겠지? 난 4학년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귀신 얘길 믿으면 안 되지.’

겁먹은 오줌발이 투투둑 아래로 떨어지고 얼른 뒤처리를 하고 바지춤을 정리한다.

해냈다! 천장에 달린 스위치를 다시 끄고 조심조심 변소 문 앞까지 온다. 문지방을 넘고 나면 누가 내 뒷덜미라도 잡을세라 호다닥 방으로 들어온다.

내가 방에 뛰어 들어오면 외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방에 어린 우리 자매의 이부자리를 봐 주셨다. 잘 말린 무명 냄새가 나는 옛날 이불이었다.

방금 꺼낸 이불은 꽤 차가워 곧장 덮으면 몸이 바르르 떨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방, 바닥은 뜨끈뜨끈하고, 차가운 이불은 금세 데워졌다.

외할머니의 안방에서 아슴프레 들려오는 어른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는 자장가가 다름없었다. 낮에 바깥에서 하얀 숨을 몰아쉬며 뛰어 노느라 고단했던 나와 여동생은 금세 잠들곤 했다.

나는 손과 발이 커 가는 것만 알았지, 세상도 바뀌어 가는 건 알지 못했다. 해가 바뀌고 명절에만 찾아와서일까. 언뜻 봐도 초록색으로 가득했던 마을은 싱그러운 색을 잃어갔다. 머리를 박박 깎아버린 듯 초록색 대신 회색이 드러낸 모습이었다.

올 때마다 마을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 늘어가고 돌을 퍼내는 중장비들이 즐비했다. 뭔지 모르지만 마을이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몰랐다. 그건 어른들의 일이었으니까.

그림책 '감나무가 부르면' 표지.(안효림 저, 반달, 2017)
그림책 '감나무가 부르면' 표지.(안효림 저, 반달, 2017)

“봄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갔다. 아이는 어른이, 어른은 노인이 되었다. 감나무가 있던 곳도 바뀌었다.“


『감나무가 부르면』에서 커지고, 노래지고, 빨개지고, 유난히 탐스럽게 감을 길러내던 감나무는 우리 외할머니네 마당 앞에 서 있었던 그 감나무와는 얼마나 닮아 있었지? 키는 얼마나 컸고, 나무 껍질은 얼마나 바삭거렸지? 새빨갛게 터질 것 같은 감은 얼마나 열렸지?

야속하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그 감나무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림책 속 멋드러진 감나무가 차가운 호수 아래에 고요히 잠기듯, 외할머니의 마을은 고스란히 영주댐 아래로 사라져갔다.

교실에서 사회 시간에 아이들에게 댐의 긍정적 효과 3가지, 홍수 예방, 관광 사업 개발, 수력 발전을 거듭 외우라고 강조하며 나는 속울음을 운다.

아이들에게 노트에 베껴 적으라며 칠판에 바른 글씨로 적었던 필기는 마구 분필지우개로 지워버리고, 나는 이렇게 물에 잠긴 마을 이름을 또박또박 몇 번이고 적고 싶다.


이제는 어디에?...'경북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이제는 외할머니가 이부자리를 봐 줘야만 잠을 자는 어린 내 동생과 수줍었던 나도 없고, 차가운 무명 이불의 촉감도 더 이상 없다.

다만, 고향을 차가운 물 밑에 담그고 남몰래 울었을 어린 내 엄마와, 엄마의 엄마를 꽉 껴안고 나는 뒤늦게나마 함께 울고 싶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는 그림책으로 삶을 탐구하는 교사 모임이다. '아이들 곁에서 교사도 창작하는 삶을 살자'는 철학을 가지고 9명의 교사 운영진이 매주 모여서 그림책을 연구한다. 한 달에 한 번 오픈 강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화두를 던지고, 학교 안팎의 다양한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교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김여진 서울 당서초 교사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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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주 2021-01-12 17:59:12
여진쌤 글에 고개를 들어보니 놓치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들어요 ...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리움에 다시 또 고개를 떨구게 되네요 ..

이한샘 2021-01-12 15:41:52
여진쌤의 추억이 담긴 할머니댁 동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네요. 저도 할머니댁 '변소'를 오랫동안 이용해 본 사람으로 더욱 정감가고 따뜻한 글이었어요.